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02
#1601.
일어나다 (1)
“오셨습니까?”
강진호가 빙그레 웃는 조규민을 보며 마주 웃었다.
“이상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실제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조규민이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실 만하죠.”
강진호는 되레 그런 조규민을 위로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조규민이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강진호에게 말한다.
“그런데 말투가 다시 좀 높아진 것 같은데,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수록 제가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이 상합니다.”
“지금은 이게 편해서……. 천천히 바꿔보죠.”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보다…… 현수 형님, 아니, 이 실장님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그 인간은, 아니, 이 실장은…….”
‘그 인간은’이라는 말에서 이미 감을 잡아버린 조규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사고 쳤구만, 이 양반.’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 못해서 무시무시한 인간이 꼭 이상한 사고를 치고는 했다.
하기야 그게 천성인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조규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하튼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올라가시죠.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강진호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듣자하니…….”
황정후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이 그 정가놈이랑 뭔가를 하려 든다던데?”
“예.”
황정후가 눈가를 찌푸린다.
“물론…….”
그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정가 놈이 능력이 없는 놈은 아니야. 예전에는 나도 그놈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지. 아첨과 뇌물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대한민국에 그런 식으로 성공하려 한 놈들이 몇 천은 족히 될 거다. 하지만 오직 그놈만이 끝까지 살아남았지.”
황정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은 있지, 능력은. 하지만 인품이 없는 놈이야. 그런 놈과 사업을 같이했다가는 반드시 뒤통수를 맞는다. 그런데도 꼭 그놈과 같이해야겠느냐?”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제 뒤통수요?”
“으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정홍근은 눈치 하나로 살아남은 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그도 강진호가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이미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되레 그 눈치가 정홍근의 족쇄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끄으응.”
황정후가 담배를 연신 빨아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광과 합작을 하는 건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태광은 자금이 탄탄한 건실한 기업이니까.
하지만 정홍근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황정후를 영 거슬리게 만들었다.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 잘 알아서 해라.”
“예.”
황정후가 입맛을 다셨다.
사업가란 때로는 이득을 위해 구정물을 퍼먹는 것조차 마다해서는 안 된다.
강진호가 정홍근이라는 구정물을 퍼먹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해도 강진호를 사업가로 인정한다면 눈을 감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쯧, 나는 한 번씩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강진호가 가볍게 웃고 말았다.
“딱히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럼? 네놈이 남의 말을 잘 듣는 놈도 아니고, 하기 싫은 일을 왜 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
황정후가 슬쩍 강진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호한 강진호의 눈을 본 황정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해야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얼어 죽을.”
황정후가 혀를 차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 때문에 불렀다.”
“예?”
“재단 말이다, 재단!”
“아…….”
강진호가 아차하는 얼굴로 황정후와 조규민을 번갈아 봤다.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마침내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적당한 부지를 선정해서 보육원을 설립한 다음에 성심 보육원을 흡수하는 형태로 진행할 겁니다.”
“음.”
그렇게 되면 강진호는 실질적인 운영자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성심 보육원의 운영자가 될 수 있다.
“우선은 재경 재단이라는 가칭으로 신청을 마쳤습니다. 개명은 바로 가능하니,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 주십시오. 차후에도 관련 서류나 인감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제가 연락을 드리면 관할 부서를 방문하셔야 합니다.”
“제가요?”
“예. 당연하죠. 이사장이시니까요.”
“예?”
강진호가 의문 어린 눈으로 황정후를 바라봤다.
“이사장은 회장님이 맡아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이사장을 맡기로 한 이유가 뭔데?”
“그게…….”
황정후가 혀를 찼다.
“내 연줄과 명성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승인을 쉽게 따내려고 한 것 아니었어?”
“그랬죠.”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네 이름 하나만 대면 다 일사천린데, 왜 내 이름을 대? 불편하게.”
“…….”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강진호는 굳이 누군가의 협조를 구할 필요도 없이 전화 한 통만으로 국가에서 처리하는 대부분의 업무를 프리패스할 수 있다.
더구나 제 이득을 찾는 일도 아니고, 돈을 들여 복지 재단을 만들겠다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그래도 이사장은 회장님께서…….”
“됐어, 이놈아. 짐 떠넘기지 마!”
“…….”
황정후가 눈을 찌푸렸다.
“그때는 나름 조용히 살고 싶다는 네 의견을 존중했다. 그만한 재단의 이사장이 되면 싫어도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조금 도와주면 네가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
“TV만 틀면 얼굴 나오고, 번듯한 회사의 회장 자리까지 꿰찬 놈이 재단 이사장 자리가 하나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질 거나 있더냐?”
강진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네가 시작한 일이니, 네가 책임을 져. 괜히 내가 맡으면 나중에 상속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가 얽힌다. 내가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어?”
“오래 사실 겁니다.”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말이라도 그리해 주니 고맙다.”
황정후가 손을 내저었다.
“여하튼 그렇게 처리하고 승인이 났으니, 남은 건 저놈이랑 알아서 해결해.”
황정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걸어서 회장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
강진호가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여기가 회장실인데, 회장이 나가면 어떻게 하란 거지?
“저, 저기…….”
“괜찮습니다.”
조규민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사진들 회의가 있어서 회의실로 가신 겁니다.”
“아니, 그래도…….”
“민망해서 저러시는 거니, 이해해 주십시오.”
“민망해서?”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는 강진호 씨께서 복지 재단을 설립하는 걸 굉장히 대견해하십니다. 처음에는 그리 반기지 않으신 것 같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바뀌신 모양입니다.”
“음…….”
“본인의 재산이라는 게 결국은 자기 혼자 좋고 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말을 최근 들어 자주 하십니다. 그래서 강진호 씨가 더없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십니다. 물론 당신 입으로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시겠지만.”
조규민이 고소를 머금었다.
강진호나 황정후나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건 마찬가지다.
‘물론 이쪽은 엄청 나아졌지만.’
조규민이 강진호를 보며 살짝 감회에 젖었다.
사람을 대하는 걸 더없이 어려워하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복지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그 큰 성장과 변화에 조규민도 한 팔을 거든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설립 자체는 보육원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만, 신고 내용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꾸준히 확장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지원을 받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사실 강진호 씨에게는 국가의 지원이라는 게 굳이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받을 생각도 없어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복지 재단의 이름으로 설립된 곳은 대부분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신에 감사와 감시를 받을 의무가 생기게 됩니다. 그걸 거부한다면 자격을 잃게 되죠. 물론 강진호 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겠지만.”
조규민이 살짝 머리를 긁었다.
“적어도 겉으로나마 적당한 형태를 만들어둘 필요는 있습니다. 대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지만, 강진호 씨가 직접 해야 할 일도 있을 테니, 일단은 알아두십시오.”
“예.”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선 몇 가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은 보육원만 설립할 생각이십니까?”
“네. 우선은요.”
“성심만?”
강진호가 턱을 괴고는 생각에 빠졌다.
아무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당장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성심은 그대로 남겨둔 채로, 다른 보육원을 몇 개 만들어보고 싶네요.”
“전국에 여러 개를?”
“예.”
강진호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제가 만드는 보육원이 다른 보육원들에 비해서 더 좋은 보육원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죠? 일단 강진호 씨의 재력이라면 다른 보육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원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조규민이 묻자 강진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가 아니니까요.”
“음…….”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애들은 돈이 아닌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같은 뻘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애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돈은 반드시 필요하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살면 살수록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애들에게 필요한 건 좋은 시설이나 맛있는 밥, 넘쳐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겠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된다.
‘원장 수녀님.’
과거의 성심 보육원은 지금의 성심 보육원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가난했다.
그럼 지금 보육원 아이들이 그때보다 더 행복한가?
아니.
아니겠지.
강진호는 채울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
이건 겸손이 아니다. 강진호뿐만 아니라 보육원의 아이들도 모두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원장 수녀님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들에게 있어 그분은 내리쬐는 햇살이고, 감싸 안는 바람이었다.
강진호는 아이들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이 되어줄 수는 있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다만 비슷하게나마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제 방식으로.”
조규민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강진호 씨, 그게 포기할 일은 아닐 겁니다.”
“예?”
“강진호 씨가 해주지 못하는 걸 해줄 분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좋은 시설을 만들고 강진호 씨의 진심을 알릴 수 있다면, 그런 분들이 모여들 겁니다.”
“…….”
“혼자 할 필요는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죠.”
“예.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거니까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다.
살짝 불안함에 잠기려던 강진호의 마음이 조금 편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