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3
#172.
잡아오다 (2)
“……왜 또 저분들이야.”
이미혜는 환장하고 싶은 심정으로 퍼스트 클래스 탑승 명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일전에 퍼스트 클래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던 재경 그룹 비서실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VIP가 하필이면 또 그녀의 근무 타임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국내선으로 옮겨 달라고 하든 해야지.’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극심한 일이 퍼스트 클래스 승무 업무인데, 자꾸 저런 손님만 타면 위장병이 돋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저 두 사람이 앉은 곳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할 우울한 공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무장님.”
“응?”
“저쪽 분위기 어떤가요?”
“일단 독한 술부터 달라던데?”
“……저도 한잔하면 안 될까요?”
“정신 차려, 미혜씨.”
“……네.”
이미혜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집이나 가야지.’
이제 슬슬 이 일도 그만둘 때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거, 거의 열애 인정 워딩 아닌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조규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원래 연예인들이 열애 발표 이전에 주로 하는 워딩이 친한 오빠 동생이라는 말 아닌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 발표가 뜨고 7개월 만에 애가 나오는 게 기본 테크 트리인 것이다.
조규민은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강진호가 연예란을 자주 볼 일은 없으니 이런 워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강진호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멀었나요?”
“…….”
저, 강진호 씨…….
눈앞에 스크린이 있고, 스크린에 남은 시간이 떠 있습니다만?
당당하게 스크린을 보시라고 말하고 싶은 조규민이지만, 지금의 강진호를 자극할 용기는 없었다.
“한 시간 반이면 됩니다.”
“……오래 걸리네요. 갈 때는 금방 갔던 거 같은데.”
조규민은 강진호에게 보이지 않게 낮은 한숨을 쉬었다.
쇼핑도 못하고 돌아가는 판인데.
‘죽여 버릴 테다!’
더 보이스인지 더 아구창인지 모를 그 애송이 놈에게 세상에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사생활 관리는 완벽하게 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렇게 들었는데?”
조규민이 쭈구리처럼 의자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제, 제가 직접 할 때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일이 바빠서 코드 측에 위임을 조금 했더니, 구멍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강진호는 더 이상 뭔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규민에게는 그 사실이 더욱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차, 차라리 비난을 하라고!’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조규민은 옆 좌석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생오라비 놈이!’
조규민의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키운 강세아인가.
밤잠 줄여가며 안무를 연구하고, 컨셉을 잡는다고 국내외 가수들을 죽어라고 연구한 조규민이 만들어낸 히트작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애를 날름 집어삼키려고 하다니!
‘죽일 거다! 죽일 거야!’
“손님.”
승무원이 그들에게로 다가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와인 나왔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플레이팅된 치즈와 와인을 가져온 승무원을 보며 조규민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냉수!”
“이쪽도.”
“……예.”
이미혜는 내심으로 한숨을 쉬었다.
‘빨리 시집이나 가야지.’
이미혜의 한숨과 함께 비행기는 한국으로 날아갔다.
쿵!
“깜짝이야!”
문이 거칠게 열리자 강유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든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내미가 이상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기라도 당했니?”
“……은영이는요?”
“어제 안 들어왔는데?”
“그렇습니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쪽에 있는 탕비실로 걸어 들어가 짐을 주섬주섬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니?”
“은영이 데려오겠습니다.”
“지금 한창 스케줄 뛰고 있을 텐데, 애를 데려온다고?”
“예.”
확고하고 단호한 그 목소리에 강유환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저놈의 아들내미가 왜 저런단 말인가.
“진호야, 너 왜…….”
강유환이 뭔가 설명을 요구하려고 할 때, 강진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강유환에게 불쑥 내밀었다.
“응?”
메인 화면에 떠 있는 열애설 기사를 본 강유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들.”
“예.”
“한 시간 내로 데리고 와라.”
“라져.”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내 부아아앙― 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새빨간 람보르기니가 바람처럼 도로를 질주해 나갔다.
“거참.”
강유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해서 지원을 해줬더니, 아직 대학도 안 간 것이 벌써부터 열애설이나 만들고 있고…….
어찌 한숨이 나지 않겠는가.
가만히 고민을 하던 강유환이 전화기를 들었다.
“어, 진호야. 이 남자 놈도 데리고 올 수 있냐?”
강진호보다 한술 더 뜨는 아버지였다.
부아아아앙―
“가평이요? 알겠습니다.”
소속사로부터 강은영이 가평으로 행사를 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강진호가 엑셀을 꾸욱 밟았다.
12기통 엔진이 간만에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연신 고함 소리를 내며 차체를 끝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 저거 뭐야?”
옆을 스치고 지나가기가 무섭게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차를 본 이들이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와, 아벤타도르네.”
“……금수전가 보다. 부럽다.”
“아무리 아벤타도르라고 해도 겁 안 나나? 저렇게 밟다가 사고 나면 바로 골로 갈텐데?”
“아까 칼치기하는 거 못 봤어? 운전 쩔게 하던데?”
“하기야.”
뒤쪽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강진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부우우우우웅!
네비게이션이 당황하여 말을 빠르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진호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렸다.
“강은영!”
“세아 씨.”
“네!”
“다음 무대 잘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강은영이 싱긋 웃었다.
“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야외 특설 무대라 음향이 잘 안 들릴 수 있으니까, 인이어 확인 잘해주시구요.”
“걱정 마세요.”
강은영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을 하자 FD가 웃으면서 화답을 하고는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이익!”
강은영은 FD가 사라지자마자 옆에 있던 쿠션을 문짝으로 집어 던졌다.
“능글맞게 웃기는!”
기사는 이미 그녀도 확인을 했다.
“아아아악! 그 미친놈이!”
우연히 언니들을 따라간 자리에서 그 사이코 같은 놈을 만난 것이 실수였다. 그 이후로 끈덕지게 따라붙는다 싶더니, 결국은 이 사단이 난 것이다.
강은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소속사에서는 불이 나도록 전화가 오고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오, 오라비가 중국에 가 있는 게 다행이야.’
그녀의 오빠가 안다면 머리채를 쥐어 잡히는 수준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어린게 겉멋만 들었다고 그녀를 데리고 가 머리를 다 밀어버릴지도 몰랐다.
‘어, 어떻게든 오빠가 중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돼.’
우우우웅!
휴대폰이 진동을 하자 강은영은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세아 씨, 방송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병훈이가 곧 들어간다고 하던데.]“네, 지금 준비 중이에요.”
[괜찮겠어? 일이 이렇게 터졌는데, 생방은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린다 싶으면 말을 해요. 내가 바로 빼볼 테니까.]“아니요, 실장님! 저 할 수 있어요. 이럴 때 스케줄 빼고 하면 사람들이 더 의심할 거예요. 보도자료는 준비되셨어요?”
“괜찮다니까요.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어떻게든 중국 간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이 사태를 해결해야 돼요. 아니면 정말 저 초상나요.”
[세아 씨, 내가 그거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세아 씨, 준비해 주세요.”
“실장님, 저 지금 방송 들어가요!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어, 세아 씨?]강은영은 전화를 끊고는 인이어를 다시 점검했다.
“내가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스타위즈에서 그 고난을 겪고 겨우 데뷔를 했다. 그리고 이제야 나름 인지도를 얻고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중인데, 겨우 이만한 암초 하나를 만났다고 해서 시무룩할 그녀가 아니었다.
“아오, 그 스토커 같은 놈.”
싫다고 하면 사람이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남자가 집착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다.
강은영은 대기 장소로 가서 앞 순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무대가 끝나면 바로 그녀의 차례다. 백댄서 팀들이 긴장한 듯 연신 헛기침을 했고, 로드 매니저가 달려와서 팀을 달랬다.
“생방송이야. 실수하면 안 돼!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긴장을 하라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적당히 긴장하라는 거지. 컨디션에 이상 안 가게 말이야.”
강은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데뷔를 한 지도 벌써 2년이다. 햇수로는 곧 3년 차가 된다. 그런데 생방이라고 긴장을 할 리가 있겠는가.
“시작한다! 올라가자!”
“파이팅!”
“실수 없이 잘해봐요!”
강은영은 백댄서들을 독려하며 무대 위로 올랐다. 카메라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등장에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실내 무대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실내 무대였으면 조명 때문에 관객들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외무대다 보니 조명 사이로 관객들이 수군대는 모습이 보였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강은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수많은 난관을 만나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주저앉아 울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녀의 오빠가 해준 말이고, 지금은 그녀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말이었다.
‘이 정도로 내가 꿈쩍이나 할 것 같아?’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그녀가 천천히 마이크를 잡고 몸에 리듬을 실었다.
이 무대를 완벽하게 끝내고 스캔들에 대해 해명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런 열애설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부르르르.
순간, 완벽하게 안무를 소화해 내던 그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니, 생각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관객들 사이로 천천히 무대로 다가오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아, 안 돼.”
마이크를 뗸 강은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저기 보이는 저것은 그녀가 이십 년 동안 봐온 그녀의 오라비가 틀림없었다.
굳은 안색으로 무대 앞까지 다가온 강진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새, 생방송인데…….’
하지만 알고 있다.
생방송 한 번을 망치는 것과 오라비의 심기를 망치는 것 중 어느 것이 그녀의 커리어에 더 심각한 손상을 줄 것인가를 말이다.
강진호가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강은영이 무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자.”
“……옙.”
강진호가 내민 손을 잡은 강은영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환호하는 관객들 사이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저…… 씨! 저거 뭐하는 거야!”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PD를 보며 FD가 고개를 저었다.
“역대급 방송 사고네.”
이건 방송가 역사에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