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56
#455.
생각하다 (5)
강진호는 연병장을 채운 사람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네. 그런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오늘부터 수련한 몰골이 아닌 것 같은데?”
“하하, 가벼운 워밍업이죠.”
“워밍업이라…….”
강진호가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방진훈은 먼 산을 보며 강진호의 시선을 피했다.
“뭘 한 겁니까?”
“산 좀 탔습니다.”
“산이요?”
방진훈이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켰다.
“날도 좋고 경치도 좋을 것 같아서 한 번 구경 갔다 왔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훈련만 한다고 하면 산을 타는 것이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전통이라더니, 그 습성이 여기까지 이어져 있을 줄이야.
“그런 것치고는 과도하게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내공 없이 뛰게 했거든요.”
“내공 없이요?”
“예.”
방진훈이 씨익 웃었다.
“내공을 가지고 수련을 하면 순수한 체력 단련을 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강진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내공도 없이 그냥 체력 훈련을 했다구요?”
“예. 뭐 잘못됐습니까?”
“아니요.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해가 잘 안 가서요.”
“이해요?”
강진호가 정말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애초에 앞으로 이들이 상대해야 할 이들은 무인들이잖아요.”
“그야 그렇죠.”
“내공 없이 체력만 남은 상황에서 무인들 상대로 뭘 해볼 수 있습니까?”
“…….”
방진훈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무인을 상대할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총이라도 쓰면 모를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강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애들의 눈이 심상치 않게 변해간다는 것을 알아챈 방진훈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그…… 싸울 때는 내공이 중요하지만, 지금은 바로 전투를 하는 게 아니라 수련을 하는 거잖습니까! 수련할 때는 체력이 필요하죠. 체력이 있어야 집중력이 유지되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는 내공이 남아 있는데 지쳐서 훈련을 못 받았다든가,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
“뭐, 여하튼 사람마다 교육의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요. 방 회주님의 방식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 방식과는 좀 맞지 않는 것 같네요.”
방진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 뜨거.’
눈으로 사람을 불태울 기세였다.
왜 아니겠는가. 강진호의 말대로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훈련을 하느라 시간만 낭비했다는 뜻 아닌가.
시간을 낭비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이제 강진호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체력까지 소모했으니…….
잡아먹을 듯한 눈빛들의 향연을 보며 방진훈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회준데 너무 심하게들 노려보네.’
그렇다고 눈빛이 건방지다고 깔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가 깨어 있는 윗사람이라 자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화를 내려면 상식적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게다가 지은 죄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방진훈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후, 훈련하실 거죠?”
“음…….”
강진호가 살짝 고민하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다고 했으니 해야겠죠.”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네?”
“일단 이 사람들 샤워 시키고, 강당으로 모아주세요.”
“예?”
“강당으로요.”
“……알겠습니다.”
영문을 모를 말이지만, 전권을 위임한 이상 따로 토를 다는 것도 이상했다.
“들었지? 30분 내로 전원 샤워, 환복하고 강당으로 모여.”
“…….”
제대로 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듣긴 다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한 방진훈이 강진호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럼 우린 그사이에 커피나 한잔하시죠.”
“네, 그러죠.”
방진훈이 히히덕거리며 강진호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이명환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권위주위가 타파된 게 아니라…… 그냥 권위가 없는 거 아닌가, 이거?”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하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이명환이 머리를 털며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후우.”
그래도 샤워를 하고 나자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거 하난 좋다니까.’
과거 이중걸 집권 당시의 총회는 검은 도복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었다.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검은 도복을 입어야 하고, 공식적인 행사가 있어도 검은 도복을 입어야 했다.
한국 전통의 어쩌고 하며 이유를 듣기는 했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이유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방진훈은 실용주의 노선을 밟았다. 불편하고 땀 흡수도 되지 않던 도복은 트레이닝복으로 대체되었다. 그것도 디자인의 통일 없이 원하는 옷을 입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트레이닝복 구입비를 지원해 준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 칙칙한 도복에서 벗어난 게 어디인가.
“그런 점만 보면 참 좋은 회주인데 말이야.”
가끔씩 자존심이 얽혀서 되도 않는 일을 벌인다는 단점만 빼면 정말로 인정해 줄 수 있었다. 방진훈이 회주가 되고 나서 총회에도 복지라는 개념이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머리를 휘휘 털어 물기를 날려 버린 이명환이 안쪽을 한 번 쭉 훑었다. 샤워를 하고 각양각색의 트레이닝복으로 환복한 회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면 이 강당이 터져 나갈 정도로 많은 회원들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벌컥.
그 순간, 강진호가 앞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니까.’
이명환이 낮게 숨을 내뿜었다.
무인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세다.
쥐뿔도 가진 게 없는 놈들조차 자존심 하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무인이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놈들만 모아서 훈련을 시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과거 이중걸이 가장 골머리를 썩은 것이 나이가 좀 있는 중견들과 신입들 간의 알력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무인들은 존중이라는 것을 몰랐고,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중견 무인들은 싸가지 없는 후배들을 귀엽게 봐줄 줄 몰랐으니까.
선후배의 충돌을 자제시키는 정책을 만들어 시행해야 할 정도로 젊은 무인들은 선배를 존중할 줄 몰랐다. 그리고 그 젊은 무인들 중에서도 코어라고 할 만한 이들은 이곳에 모두 모여 있지 않은가. 그만큼 평균보다 강하고, 평균보다 더 싸가지가 없는 것들이 말이다.
그런 이들이 딱히 명령이 없었음에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호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총회에서 강진호가 얼마만 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좀 낫네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그걸 어떻게 참아냈나 몰라.’
중원의 위생 개념은 현대의 위생 개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현대인의 개념을 가지고 있던 강진호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러운 이들도 많았다.
‘나름 동화된 거지.’
돌이켜 보면 그도 수련을 하겠답시고 동굴에서 이삼 년은 씻지 않고 지낸 적도 있고, 야산을 타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물도 만지지 못하고 지낸 적도 있다.
당시에는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땀 냄새를 패시브로 풍겨 대는 마염들을 데리고 말이다.
“생각하니 진짜 미친 짓이네.”
“예?”
“아, 아뇨.”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돌이켜 보면 이해 안 가는 짓을 잘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활동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풍덩한 무복을 입힌 것도 모자라 거기에 검은 망토에 검은 삿갓까지 씌우지 않았던가.
‘싸우지 말라는 거지.’
무인들이다 보니 다소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모양에 신경 쓰지 않고 최적의 장비를 갖추게 해주었다면 훨씬 활용도가 올라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위엄이라는 것은 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도 중요한 법입니다. 의전과 의복은 교주님의 위엄에 날개를 달아줄 것입니다.”
‘날개는 얼어 죽을.’
새삼 청마도 결국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들에게 그런 옷을 입혀서 각을 잡겠다고 하면, 조규민이 회초리를 들고 쫓아올 것이다.
고개를 휘휘 저어서 옛 생각을 날려 버린 강진호가 속속들이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간 끌 것 없이 빨리 시작하죠.”
“네?”
“뒤로 한 분씩 오세요. 부르면 그때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한 분씩이요.”
한 명씩?
‘이거, 과외였나?’
여기에 있는 사람만 몇 백 명인데, 한 명씩 뭘 하겠다는 건가.
“아, 거기.”
“네?”
강진호가 콕 찍어 가리키자 이명환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얼굴이 익었는지, 이제는 강진호도 이명환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방진훈 하나도 감당하기가 만만찮은데, 이제는 강진호마저…….
‘아니, 생각하면 개이득이지.’
방진훈은 귀찮은 것만 시키는 타입이지만, 강진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저런 사람은 자신의 사람이다 싶으면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할 사람 아닌가.
“네! 말씀하십시오!”
이 기회에 어떻게든 강진호와의 안면을 더 터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히 대답에도 힘이 들어갔다.
“순서 좀 짜주세요.”
“네?”
“한 사람당 5분씩은 걸릴 것 같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아니에요?”
“그, 그렇죠.”
5분씩 백 명만 해도 오백 분이다. 그럼 여덟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이들이 겨우 백 명은 아니잖은가.
“그냥 기다리면 시간 낭비니까 순서 짜주시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분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다 오라고 하세요. 대신 자기 차례는 어기지 않게 해주시고.”
“집에 가라구요?”
“여기에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계속 있고 싶으신 분이야 있어도 되지만요.”
“아…… 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명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강진호의 등을 향해 뻗은 손을 슬그머니 내린 이명환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저……!”
“네?”
강진호가 의문 어린 눈으로 돌아보자, 이명환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은 알고 있다. 굳이 말을 꺼내서 강진호와 불편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그의 반골 기질이 결국에는 그 말을 하게 만들었다.
못내 마지막까지 참아내지 못한 한 가지 질문이 그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럴 거면 전원 샤워는 왜 하라고 하셨는데요?”
강진호의 눈이 흔들린다.
“…….”
“…….”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강진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강진호가 황급히 자리를 뜨자, 이명환이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거, 방 회주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인간 아냐?’
처음으로 저 인간에게 배우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선택인가를 고민하는 이명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