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3
172화 욕심이 눈을 가리면
악군패에게 여러 가지 악조건들이 달려 있었다곤 하지만, 고작 후기지수에 불과한 내가 단신으로 녹림의 일각을 무너트렸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런 시선들이 모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이~ 예. 많이들 보세요~.’
이제는 이런 시선들도 제법 익숙해졌다.
더불어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녹림 도적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림에서 칼 맞기 딱 좋을 때가 틈을 보일 때, 약한 모습을 보일 때라고 사부님들은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하셨다.
처음부터 이빨을 드러낼 틈을 주지 않는 편이 최선이라 하셨다.
이는 병법(兵法)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나는 거친 숨을 어떻게든 다스리며 허리를 곧추세우려 노력했다.
“채주님,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요.”
거록채 녹림도들은 악군패에게 다가가 툭툭 건드렸다. 진짜 쓰러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도 악군패가 쓰러진 것을 본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진짜 의식이 날아간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악군패를 업고 후다닥 도주했다.
“이건 놀랍군.”
말을 걸어 온 중년 사내 옆에는 비슷한 나이의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들 뒤로 녹림도들이 주르륵 나열해 있다.
이 두 사람 역시 녹림칠십이채의 채주인 것 같다.
정황만으로 추론이 가능한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아! 이거 미안하군. 한동안 사회생활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 보니.”
멋쩍은 얼굴로 사내가 포권을 쥐었다.
“강무채의 채주인 단야흔이라고 하네.”
뭔가 녹림의 도적답지 않은 느낌의 사람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정갈함이 느껴지는 사람이랄까.
‘녹림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나도 예의를 갖춰야겠…….
“자네들을 여기로 초청하자는 의견을 내가 내었지.”
“……댁이 그 미친놈이세요?”
정갈은 얼어 죽을.
갑자기 사람이 새롭게 보인다.
정갈하고 예의 바른 행세 속에 똘기 가득한 광기가 숨어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칼 한 자루 쥐여 주면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환장의 조합이다.
과연 녹림의 일각!
또라이들의 고향!
뒤늦게 말이 좀 심했나 싶었지만, 그 주변의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오히려 박수라도 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착각인가?
“응? 아! 난 흑호채주 만산호라고 한다. 그리고 이 친구 욕이라면 괜찮아. 오히려 더 욕해도 좋아. 대리만족은 언제나 환영이야.”
단지 개인의 의견은 아닌 듯 주변 모두가 찬동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놀라울 정도로 통일성이 있었다.
“선지자는 늘 고통받는 법이지.”
단야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충 어떤 취급을 받는 사람인지 알 것 같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기껏 초대받아 놓고 아직까지 듣지 못한 녹림의 의견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 이야기 좀 하세.”
***
이른 아침 벌어진 거록채주 악군패와 소천룡의 비무 결과는 빠른 속도로 천자산에 퍼져나갔다.
녹림도들 셋만 모여도 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벽지심이 소집한 채주들의 모임에서도 그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탕! 탕!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벽지심이 잔뜩 성난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다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 있는 건 이해하겠소만, 그런 이야기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소이까?”
벽지심은 지지부진한 현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녹림칠십이채가 천자산에 모인 것은 구파의 폭거에 대항하여 세력을 규합해 보자는 의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도록 녹림이 하나로 뭉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각각의 파벌을 중심으로 분열만 치열해졌다.
이 지지부진한 모임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내버려두고 멀리로 돌아서만 가려 하니 이리된 게 아니오!”
“힘으로 해결해 보자는 소리 말인가?”
“그렇소!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녹림다운 방법이지. 허나 녹림의 전력만 상할 뿐이라는 말로 그 의견을 와해시킨 것은 천신채주 벽지심 당신이오!”
“맞소!”
“시간 낭비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방금 벽지심의 토로에 기분이 상한 채주들이 벽지심을 헐뜯었다.
원색적인 비난에 노출된 벽지심이 의자에 주저앉아 손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도 이제 지치는구려. 녹림의 대통합을 이뤄 무림의 패자로 당당해지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이었기에 이 일을 주도해 왔건만, 다들 의견들이 이리 안 맞아서야…….”
“허! 그럼 어쩌자는 거요?”
“어쩌기는! 이대로 끝나는 거지!!”
콰앙!
벽지심이 탁자를 후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으음!”
“허 참……. 이렇게 끝난다고?”
마치 녹림의 미래라도 되는 것처럼 쪼개진 탁자의 모습에 목소리를 높여 성토하던 채주들의 말이 쏙 들어갔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모임이 있었지만, 벽지심이 이토록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혼란에 빠졌다.
“일생일대의 꿈이라더니, 단번에 태세를 전환하시는구려.”
“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싫을 뿐이오. 다들 알다시피 지금 우리의 의견은 너무도 갈려 있는 것이 현실 아니오? 어설프게 갈린 파벌들 탓에 서로의 입장만 더욱 공고해졌고.”
차라리 둘 셋 정도로 갈려 있다면 의견을 취합하기가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녹림의 파벌은 사분오열(四分五裂)의 끝판왕이다.
문제는 다수가 머리를 맞댄 상황에서 각 파벌들이 함부로 의견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이다.
누군가 양보를 하든가 고개를 숙이면 실마리라도 잡으련만, 산적들에게 이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다음 모임까지 ‘의견들이 모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면, 녹림 대통합은 없던 일로 하겠소.”
벽지심이 으름장을 놓으며 모임이 파했다.
채주들은 그 말에서 유독 힘이 들어간 부분을 읽어냈다.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라…….”
의견을 모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들 고되고 지난한 길이다.
하지만 녹림 산적들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에 익숙하다.
그렇게 모든 채주들이 떠나고 혼자 남은 벽지심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게 줬다 뺏는 거라고 하지. 마치 배 속에 있는 걸 꺼내 가는 기분이 들거든.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다가 갑자기 굶주리고 허기가 지는 기분이 되어버려.”
어느샌가 벽지심 앞에는 흑의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잘 먹혀들어 간 모양이군.”
“다행히도. 그동안 공들여 잘 쌓은 둑이 일거에 터진 느낌이었다.”
“그럼 문제는 없겠군.”
흑의의 사내 입가에도, 벽지심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것과 같은 기색의 웃음이 걸렸다.
***
모임이 파한 뒤, 광서에서 온 전림채의 채주는 벽지심이 한 말을 곱씹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은 허리춤의 칼로 향해 있었다.
“묘하단 말이지…….”
전림채주는 노골적이기까지 한 천신채주 벽지심의 변화를 떠올렸다.
“지금까진 말리기만 하던 작자가 갑자기 부추겼단 말이지.”
뭔가 수작을 걸고 있는 냄새가 났다.
비단 전림채주 본인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자리가 마무리될 때쯤 다들 눈알 굴리는 것을 확인했다. 생각하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다른 때라면 그냥 무시했을 거다. 대놓고 냄새를 풍기는 일에 뛰어들 만큼 멍청한 이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전해.”
녹림의 대통합.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자산에 몰려든 녹림의 거대한 세력을 보는 순간 그 믿음은 깨졌다.
녹림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얼마나 크고 강대한 세력이 될 수 있는지 피부로 실감하는 순간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흥분과 설렘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었다.
“이걸 포기하라고?”
이대로 대통합이 실패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된다.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전림채주는 뭔가 큰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싫다…….”
구파니, 제육천이니 하는 저 잘나신 작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작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단 전림채주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같이 손을 잡은 파벌, 합산채주의 말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전림채주가 히죽 웃었다.
“뭔가……라? 자네 지금 무얼 말하는 건가?”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형님.”
“맞습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닙니까?”
파벌의 채주들이 전림채주를 살살 부추겼다.
“사실상 벽 채주 그 양반도 은근히 허락한 상황 아닙니까?”
모여 있는 파벌 채주들의 표정이 하나로 통일되어갔다.
“다른 파벌을 치자?”
“에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통합하자는 거죠. 이건 대의입니다, 대의. 작은 것에 잠깐 눈을 감을 뿐이에요.”
“맞습니다. 본래 큰 것이 움직일 땐 작은 것들이 조금을 밟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저 먹물 먹은 작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사…… 사…… 사대취소였던가?”
“맞을걸! 캬! 너도 제법 먹물 좀 먹었구나.”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을 순 없어요. 구파가 녹림을 노리고 있다고요. 녹림은 하나가 될 필요가 있어요!”
욕심이 사명감으로 포장되었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눈앞에 태산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전체를 볼 수 있음에도 손바닥만큼 작은 것에 시야가 묶인다.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던 벽지심 채주의 행동들이 일생일대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녹림 형제들에게 피가 좀 튀긴 하겠지만, 위대한 결과에 다다르기 위한 작은 희생이라면 눈을 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 어디부터 의견을 통합하는 게 좋겠나?”
“아무래도, 차근차근 통합해 나간다고 하면 우선 작은 곳부터 시작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작은 곳이라…….”
그리 생각하니 다들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곳이 있었다.
“거록채 채주가 좀 많이 다친 상황이군.”
“딱이로군요. 마침 정파 놈들 영향을 많이 받은 쪽 파벌 놈들 아닙니까?”
전림채주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파벌의 채주들 또한 미소를 내보였다.
***
채주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흑호채주 만산호와 강무채주 단야흔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일행은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거, 표국의 역참 계획에 한 발 걸치겠다는 거네요.”
“그러게 말이다. 꿈도 크지.”
표국들 역시 반쯤은 망상에 가까운 느낌으로 나왔던 의견이었다.
실제로 호북의 표국만으로 진행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긴 했다.
하지만 여기에 녹림이 손을 거든다면?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녹림 놈들이 제 버릇 못 참고 상단 물건에 손대는 일이 한두 번만 터져도 바로 좌초되어 버려. 아예 근본적으로 정신교육을 시켜 녹림도 시절의 근성을 싹 빼 버려야 하는 일인데…….”
백진성 아저씨가 말끝을 흐렸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낙인찍지는 않았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무림의 정세를 흔들 수 있는 대업이며, 무림 역사에 이름이 남을 업적이 될 것이다.
백진성 아저씨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공기가 스산해진 느낌이 들지?’
뭔가 기분 나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데, 한영이라 불리는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백가표국의 심처를 지키던 정체불명의 고수이자, 설아 누나를 지키는 설영이라는 이들.
“국주.”
“자네가 나를 그리 부를 때는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말이야…….”
한영의 부름에 백진성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꽤나 죽을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요.”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사방에 녹림 도적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선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