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89
188화 태허(2)
‘역시나 곤륜파 제자네.’
목에 검이 겨눠진 어린 곤륜 제자의 눈은 조금 전 내가 곤륜의 도에 관해 물었을 때 보이던 곤륜파 도사들의 눈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천마, 마인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마두의 입에서 도를 논하는 말이 나왔다는 걸 믿기 힘들어하는 얼굴이다.
“한 번 더?”
“……흥!”
목에 닿아 있던 검을 쳐내며 뒤로 물러난 아이가 다시금 정갈하게 검을 겨눈다.
‘눈치가 없진 않네.’
내가 자신을 해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검을 가르치기까지 하니 아예 바닥까지 뽑아먹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차 보이는 기질 때문에 택한 것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맞춰줬다.
‘어디 해볼까?’
어차피 내가 집착해야 할 검로도 아니다.
“검은 무어냐?”
“고리타분한 꼰대 소리 할 거면 때려쳐!”
거칠게 달려들지만 검을 휘두르는 자세는 조금 전과 사뭇 다른 감이 있다.
살기 가득한 공세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일말의 여유를 남겨 놓았다.
‘받아들여야 할 건 잘 받아들이네?’
나는 싫어하지만, 내 말에서 옳다 여겨지는 부분은 받아들인다.
“도문에서 검이란 또 다른 너다. 거기에 넣어야 할 것은 신중히 골라야 한다.”
챙! 그극!
강직하게 뻗어오는 태청검의 검로를 쳐내며 조금 전과 같이 아이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껴내며 막았다.
대단한 재능이다.
“곤륜이란 무어냐?”
“곤륜이 곤륜이지 뭔…….”
“곤륜의 곤은 맏이를 뜻하는 곤(昆)과 산(山)을 합쳐 곤(崑)이다. 산들의 맏이라는 거다. 첫 번째 산이며, 첫 번째 도(道)다. 곤륜은 그 첫 번째 이름을 기리는 것이다.”
“그래서 뭐!”
차앙!
다시금 아이의 검이 거칠어졌다.
감정이 담긴 검격은 흐트러졌지만, 실려 있는 감정만큼 강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따위 뭐가 어떻다고!”
검을 휘두르며 아이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곤륜은 외로운 것이라 말하는 천원진인의 말이 떠올랐다.
‘곤륜파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사실 청해에서도 깊숙한 위치에 자리한 곤륜파이기에 구파라 불리고 있음에도 그 소속감은 없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곤륜을 알아주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천상은 다르다.
‘지상에서 소외당한 그들이 천상에선 누구보다 존중받는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범접지 못한다.’
사부님들을 부추기고 압박할 정도의 많은 신선들이 근본도 없이 갑자기 툭 솟아났을까?
그렇지 않다.
모두가 과거의 결실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앞선 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뒤를 따르게 되어있다. 곤륜의 이름을 좇는 이는 도문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곤륜의 제자로서 곤륜의 이름을 잇고자 한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네 어깨 위에 올라 있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다.”
“……당신 천마 맞아?”
아이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사문의 존장이나 도문의 대선배로서 할 법한 이야기를 천마가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어쩌겠니. 이게 다 네 까마득히 윗줄 선배들이 내 머릿속에 때려 박은 이야기들인걸.’
참고로 내가 풀어낸 이야기들은 곤륜 신선들이 사부님들을 통해 전달한 가르침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도 이렇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식은 구식만의 멋이 있다.
그러면서 함께 전해진 꼰대 정신 투철한 무공 한 자락.
그냥 좀 들었다고 해서 바로 따라 할 무공이 아니지만, 이것도 천상표 무공이라 그런지 정말 뇌리에 쏙쏙 잘 박혔다.
게다가 묘하게도 그 무공은 천마 사부의 무공과 어느 정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추구한 무도는 혼돈무극(混沌無極). 그렇기에 본디 곤륜이 추구했던 무도(武道)인 태허(太虛)는 내게도 한때나마 길이 되어 주었었지.]시인하는 천마 사부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이 간다.
‘청조가 따랐다는 것도 그렇고…… 천마 사부는 알려진 것과 달리 곤륜과 인연이 깊었나 보네.’
가르치는 이 없이 홀로 배웠다곤 하지만, 미숙했던 천마 사부에게도 이정표가 될 만한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태허(太虛).
모든 것이 혼돈 속에 잠겨 있을 무렵, 만물이 형을 이루기 이전의 상태.
혼돈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상.
그 사상과 함께 곤륜에 전해지는 검이 있다.
오래전, 태허로서 지상을 어지럽히는 악룡을 죽일 때 썼다는 검.
태허도룡검법(太虛屠龍劍法).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검선지학(劍仙之學).
검선에 이르는 무공.
천마무겁수의 흐름을 타고 튀어나온 지극한 힘이 맞닿아 있는 아이의 검에 스며들었다.
부스스!
“헉?!”
아이의 검신이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뒤로 물러나다가 발이 꼬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투지가 가득하던 아이의 눈빛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검을 잘라내는 정도라면 본 적이 있겠지만 먼지처럼 부스러트리는 무공은 처음 봤을 거다.
“곤륜의 검에 살기만을 담고자 한다면 검선지학은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의 점혈을 풀어주었다.
“무열아!”
제압당해 있던 아이가 달려가 주저앉아있는 아이를 살피더니 냅다 둘러업고 뛰었다.
삐이익!
때마침 머리 위에서 청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됐나?’
씨앗을 뿌렸으니 이제 싹이 틀 거다.
그사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나 해야겠다.
***
곤륜의 어린 제자 영진은 넋이 나가 있는 동기 무열을 둘러업고 숨이 가빠질 때까지 뛰었다.
어린 몸이라 하나 곤륜의 무공을 익힌 기재답게 천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릴 수 있었다.
“됐어. 내려줘.”
“헥…… 헥…… 어? 괘, 괜찮아? 후읍!”
걱정하는 영진의 물음에 무열은 업혀 있던 등에서 폴짝 내려섰다.
“후읍…… 다친 곳 없어?”
“멀쩡해.”
영진은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이었지만, 무열의 시선은 자신의 손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한때 검이었다고 말하는 듯한 손잡이를 보며 무열은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더 웃긴 일이지만…….”
“그렇긴 해.”
무열의 말에 영진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검신이 없는 손잡이를 바라봤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쇠로 이뤄진 검신을 가루로 만들 정도의 힘이다.
그런데 검의 손잡이는 멀쩡하게 남아 있다.
게다가 검을 쥐고 있던 손 역시 아무런 타격이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다.
“천마는 천마인가 봐.”
“글쎄…….”
겁을 먹은 영진에 비해 무열은 상념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천마가 도를 논한다……라…….”
곤륜파엔 더 이상 도를 논하는 이가 없다.
그저 무(武)가 있을 뿐이다.
한데 마두 중의 마두라는 천마가 도(道)와 도문(道門)을 논했다.
현기 가득한 말속에는 무시할 수 없는 내용들도 담겨있었다.
“검선지학…… 태허도룡검법…….”
곤륜의 무공 중에서도 온전하게 맥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지는 무공이다.
마교와의 싸움 속에서 실전(失傳)되었다 말해지는 무공을 천마가 논했다.
온전하게 맥이 이어졌다면 감히 마교가 도발 따위를 해오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 논해지는 신공절학.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과장된 발언이다.
과거 그 무공이 온전하게 이어졌을 때도 마교와의 분쟁은 여전했다 전해지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검선지학이라 불리는 온전한 태허도룡검법에 대한 향수가 존재했다.
당장 곤륜파 장문인이 스스로 자칭하는 별호만 봐도 알 수 있다.
태허검종.
자신의 시대에서 반드시 태허도룡검법을 온전하게 복원하여 스스로 검종(劍宗), 검의 종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별호다.
“사부님께 가보자.”
“뭐?”
무열의 말에 영진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어째서? 왜?”
“너도 들었잖아. 천마가 검선지학을 논하는 걸.”
“으아…… 그렇긴 하지만…… 엄청 혼날 텐데.”
“시끄러. 혼나는 게 대수야?”
무열이 우물쭈물하는 영진을 보며 인상을 팍 썼다.
“너, 그 마교 계집애한테 헬렐레했다고 소문 퍼트린다?”
“네 말이 맞아! 혼나는 게 대수겠어? 가자!”
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영진의 모습에 무열이 혀를 찼다.
서툴지만 경공까지 펼치며 달린 두 아이가 곧장 곤륜파로 들어섰다.
문파는 평소와 달리 술렁이고 있었다.
“어른들도 그 천마 이야기에 바쁘신 것 같은데?”
“그러게.”
삼삼오오 모여서 나누는 대화들은 천마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호의가 묻어있는 이야기도 있었고, 적의가 가득한 이야기도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곤륜파에서 천마에 대해 이만큼 의견이 갈린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긴 했다.
무열과 영진은 사부를 찾아 움직였다.
“하여간 답답한 작자들 하곤. 죄다 도덕경 모서리로 찍어버리고 싶네, 시발 거!”
걸걸한 입담을 자랑하는 도인, 지륜도장이 무열과 영진의 사부였다.
두 아이는 사부의 심기가 심히 불편하다는 것을 읽었다.
하지만 무열은 결연한 얼굴로 사부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오! 그래, 내 새끼들. 어딜 갔다 왔기에 찾아도 보이지가…….”
“천마 좀 보고 왔습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무열의 말에 살갑던 지륜도장의 얼굴이 싸악 굳어졌다.
“영진아, 사부 거처에 가서 도덕경 좀 가져오너라. 죽간으로 만들어진 큼지막한 걸로.”
“왜, 왜요, 사부님?”
“왜긴! 네놈들 대가리 후려갈기려는 거지!! 이 천방지축 또라이 놈들아! 어! 참회동 가고 싶어?!”
지륜도장이 노발대발 날뛰었다.
하지만 그런 지륜도장과는 달리 곤륜파 제자들은 무열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거요.”
무열은 검신이 사라진 검의 손잡이를 어른들에게 보였다.
그리고 천마와 나눈 대화를 자세하게 풀어냈다.
충격을 받은 듯 이야기에 집중하던 곤륜제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나온 검선지학이라는 단어에 얼굴색이 변했다.
“허어! 검선지학이라니! 태허도룡검법을 어찌 마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있을 수 없소!”
“터무니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소. 무열이의 말만 들어봐도 그가 도문의 제자는 아닐지언정 도문의 가르침에 무지한 자가 아님은 분명하외다. 실제로 초대 천마만 해도 곤륜과 연이 있지 않았소이까. 그 초대 천마처럼 청조가 저리 따르는 것도 그렇고요.”
“그건 지나친 억측 아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의견들이 확연하게 갈렸다.
빠르게 혼란을 수습한 것은 지륜도장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곤륜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검선지학을 언급하지는 않았을 터. 장문인을 뵈어야겠다.”
제자가 한 말이라 그런지 선입견 없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린 지륜도장이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뒤이은 말이 지륜도장의 발목을 잡았다.
“……이거 좋지 않은데.”
“무슨 소리요?”
“방금 천경 사숙이 움직였소이다. 설령 옳은 말이라 해도 마교의 천마가 한 말이라면 조롱당한 것이 아니냐고 하셨소. 잔뜩 망신을 당했는데 그냥 있어서야 되겠냐고…….”
누군가가 의견을 나눌 때, 누군가는 직접 움직였다.
“말렸어야지!”
“아, 누가 검선지학까지 언급될 줄 알았나!”
항변하는 이에게서는 낭패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서 움직여! 어서!”
지륜도장은 태허도룡검법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검의 손잡이를 쥔 채 장문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