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92
191화 새로운 길목에서
비움으로써 얻는다.
여러 방면에서 쓰이는 말이다.
특히 도가에서 자주 쓰인다.
어쨌거나 도문의 최고 가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자연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인위와 멀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천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다 헛소리인 것 같지만…….’
아직도 태을진인의 환호성이 귓가에 남아있는 것 같다.
진인은 그 자체로 도에 이른 사람이라 행하는 모든 것이 지극함에 닿아있다고들 하니, 아직 깨달음에 일천한 내가 모르는 심오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문의 제자로 일단은 그렇게 믿고 싶네.’
아무튼, 곤륜파는 차후 신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선근의 주인이 생겼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집착이 문제였을 줄은 몰랐네.”
“일반적인 무인들이 생각할 길이 아니긴 하죠.”
“하하하! 그렇기는 하지!”
무인의 길은 쌓는 것으로 시작하여 쌓는 것으로 끝난다.
무공이 그렇고, 내공이 그러하다.
내려놓음으로써 성취를 보일 수 있다니.
세속에서 추구하는 일반적인 길과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데 불필요한 것이라면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는 나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돌을 쌓아 올려 본들, 쌓아 올린 돌은 결국 돌일 뿐이라…….”
천원진인의 혼잣말에서 장문경 선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산맥이 아무리 높다 한들, 바다가 아무리 넓다 한들, 아무리 크고 장대한 것을 이룬다 한들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일 뿐이다.
선(仙)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저 높게 쌓기만 하는 것으론 불가능하다.
하늘 끝에 올라 모든 것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 다다를 필요가 있다.
“언젠가 자네에게도 필요한 진언(眞言)이니 천천히 참구(參究)하도록 하시게.”
푸근하게 웃는 천원진인의 미소에는 처음 봤을 때 보였던 그늘진 기색이나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천경진인 역시 마찬가지다.
“자네에게 큰 빚을 졌군. 실례를 범한 데다 신세까지 지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경진인이 내게 예를 갖췄다.
천경진인의 성정을 아는 사람들은 크게 놀라는 얼굴이다.
아무리 내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다곤 해도 천마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땐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선근을 얻었다는 것은 스스로 얻은 바를 온전히 마음에 심었다는 의미이다.
아집을 버렸으니 이전의 과격한 성정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언젠가 자네에게 힘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면, 한 번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지.”
“사제?”
“아니, 그게 무슨…….”
천경진인의 말에 곤륜파 제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건 나도 좀 놀랐는데?’
정파의 대적인 천마를 돕겠다는 것은 자칫 정파 사회에서 매장당할 일이다.
마음이 좀 바뀌었다고 떠올릴만한 선언은 아니다.
“크흠! 어디까지나 자네가 변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야. 가만히 떠올려 보면 자네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주었지.”
천경진인이 헛기침을 하며 사족을 덧붙였다.
“……자네가 진짜 천마위에 오른다면 저 아이들의 시대는 평화로울지도 모르겠어. 다툼이 적어진다면 그만큼 득도의 길이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천경진인은 곤륜의 어린 제자들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곤륜파를 좀먹었던 것은 마교라는 대적을 상대로 홀로 외롭게 대치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이었다.
‘곤륜에는 학의 세작(細作)이 없는 것 같지?’
무당파나 종남파 등 구파에도 은근히 학의 입김이 닿는 자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곤륜에서는 그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곤륜을 변질시키기 어려우니, 마교를 이용한 것이려나? 아니, 이건 너무 많이 나간 생각인가?’
마교는 정파무림이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는 거대한 세력이다.
그런 마교를 움직여 꾀하는 것이 고작 곤륜의 변질이라니.
들어간 노력에 비해 얻는 이득이 너무 적다.
곤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라면 모를까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행적 자체에 큰 모순이 없다.
‘곤륜은 대 마교의 최전선. 마교 입장에선 어떻게든 무너트려야 할 대상이니까.’
아무튼, 곤륜이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게도 이로운 일이다.
이걸로 곤륜에서의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하아…….”
하나를 일단락했다는 후련함이 느껴졌지만, 잠깐뿐이었다.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일이 마교라는 것을 상기하니 암담해졌다.
이런저런 써먹을 것들이 많긴 하지만, 일백의 계획이라 한들 현실 앞에선 쉬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해야 마교를 쉽게 털어먹을 수 있을까?’
직접 마교를 접해 보면서 상황에 맞게 계책을 수정해야겠지만, 기본 골조가 될 전략은 탄탄하게 짜놓아야 할 것이다.
일단, 마교에 도착할 때까진 여러모로 궁리를 해봐야겠다.
***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적소벽이 생각이 많아 보이는 연청운의 안색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하시는? 너 말이 좀 높다?”
툭하면 연청운을 깎아내리며 천마로 인정할 수 없다 했던 적소벽이다.
적소벽이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어? 어…… 아니, 내 말은 뭔 생각을 저리 보란 듯이 하고 있냐는 거지. 괜히 주변 사람들 신경 쓰이게시리.”
이제 와서 말투를 바꿔 봐야 자연스러운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임아형이 피식 웃었다.
“뭐야, 왜 웃어?”
“난 웃지도 못하냐?”
“기분 나쁘게 웃으니까 그렇지.”
적소벽이 투덜거렸지만, 뭔 말을 해봐야 설득력이 없었다.
“……쳇!”
결국,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그런 적소벽의 행동을 보며 임아형은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임아형의 표정 역시 어딘가 적소벽과 닮아갔다.
뭔가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을 한 임아형은 무의식중에 머릿속에 담겨 있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분은 언제나 스스로를 뛰어넘으시고,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천마수신위에게 들었던, 화인처럼 박힌 그 말을 임아형은 되풀이했다.
염진묵만이 그런 동료들의 반응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
곤륜에서는 예정대로 며칠 더 머물렀다.
‘뽑아먹을 수 있을 때 확실히 뽑아먹어야지.’
곤륜은 영약의 보고였다.
겹경사에 천상에서도 인심이 후해졌는지 이것저것 많이 챙길 수 있었다.
다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걸린단 말이지……. 학 그놈들…….’
황궁 쪽에서도, 녹림 쪽에서도, 그놈들이 배후에 있었다.
그 외에도 다방면으로 암약하고 있는 것이 마치 때를 기다리며 대비하는 자들처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곤륜파에서의 인연은 큰 횡재였다.
선근이 둘이나 나왔다.
게다가 산을 내려오기 전에 천상에서 내려준 구결을 담은 태허도력검법의 진해를 남겨놓았다.
우리가 머물렀던 곳에 두고 왔으니, 지금쯤 곤륜파는 그 비급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인데…….”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움켜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끈 주먹을 쥐어봤지만, 이전에 없는 허무함만이 느껴졌다.
청조에게서 빌린 물의 신력이 모두 소진되면서 다시 불완전해진 흐름 때문이다.
‘오행신력……. 대단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일시적으로나마 오생신력이 완성된 것만으로 곤륜파의 고수 천경진인을 압도했다.
작은 깨달음만으로 선근을 얻을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능가했다.
“어디서 좋은 거 하나 안 떨어지나…….”
물의 신력이라든가, 물의 신력이라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물의 신력이라든가.
머릿속에는 온통 물의 신력만이 떠올랐다.
문득 옆에서 날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너 영물이지?”
삐이익!
청조는 자랑하듯 소리쳤다.
높고 청명한 울음소리가 뻗어나갔다.
“……너 혹시 내단 같은 거 있어?”
뺙?
청조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마치 ‘잘 못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내 기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도망치듯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농담인데.”
‘반쯤’ 농담으로 한 말에 청조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다.
[하아…… 갑자기 이전에 삼풍이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천마 사부가 깊은 한숨과 함께 뭔가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천마 사부가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다.
“……예?”
[쯧!]혀를 차는 소리가 유독 내 폐부를 찔러 왔다.
***
해가 저물 때쯤이 되어서야 나와 일행은 여정을 멈추고 노숙할 준비를 했다.
“제가 해도 되는데…….”
천마수신위들이 불을 피우며 야영 준비를 하는 사이 스스로 잠자리를 준비하자 이화가 시무룩해졌다.
자잘한 일을 내가 손수 하는 것이 영 불편해하는 투다.
“네 잠자리 얼른 준비하지 않으면 내가 해준다?”
“……!”
‘반쯤’ 농담으로 한 말에 이화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부리나케 자기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 농담 실력이 꽤나 떨어졌나 보네.”
앞으로 한동안 농담은 봉인해야겠다.
잠자리 준비를 끝내고 고개를 들자 어두운 가운데 흐릿한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 끝자락이 보였다.
탁 트인 초원의 밤은 해가 중천에 떠 있던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배 속을 간질이는 느낌이랄까?
일반적인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감흥이 일어났다.
‘어른들이 왜 술을 마시나 했더니…….’
딱히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과 상상 속의 일부를 잘라 붙인 것 같은 초원의 밤 풍경을 바라보자 이상하게 술 한 잔이 생각났다.
평소와 다르게 저 먼 곳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그 너머에서 무언가가 불러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산책 삼아 걸어 볼까?’
생각을 떠올렸을 분인데, 발끝은 이미 초원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삐이이익!
청조의 울음소리와 함께 뭔가가 내 앞으로 툭 떨어졌다.
철푸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린 선물(?)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끄으으으…….”
사람이다. 옅게 신음을 흘리는 사람이 사지에 구멍이 난 상태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워 먹으라고 사냥해 온 건 아닐 테고…….”
뺙?
또 저런다.
마치 눈으로 ‘미쳤습니까, 인간?’이라고 말하는 듯한 녀석이 다시금 슬슬 튈 각을 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쩝! 가끔 고양이가 쥐나 새를 잡아 오는 이유가 주인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라 들어서 그런 건데…….’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 녀석이 목숨을 붙여 놓은 사람을 내 앞으로 끌고 온 이유가 있을 터.
역시나 청조가 잡아 온 사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인, 그것도 그냥 무인이 아니다.
“마인이라…….”
마공을 익힌 자다.
청조가 굳이 멀리까지 가서 마인을 잡아 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자는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의미다.
근방에 마인이 있다.
우연히 우리가 가는 길목에?
“이것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