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72
271화 어깨를 나란히
“누나가 여기는 왜?”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설아 누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린다.
뭔가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아이마냥 군다.
“어… 음… 가문의 은원을 쫓아오다 보니?”
“가문의 은원이요?”
“응…….”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설아 누나의 시선에서 잠깐이지만 평소 알던 것과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무인으로서의 설아 누나.
아무렇지도 않게 천재지변(天災地變)과도 같은 힘을 휘두르는 존재.
평소 설아 누나가 내게 보이지 않았던 일면이다.
물론 지금도 누나 스스로는 기색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고 있지만, 나름대로 내 경지가 올라간 만큼 자연스럽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
알 것 같은데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어딘가 기분 나쁘면서도 그리운 아릿함.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설아 누나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남궁가주를 패퇴시키고, 남궁세가 주력 고수들을 몰살시킨 것은 아마 흑사신의 후예일 거야.”
“……무림삼불기?!”
무림삼불기라고 하니 괜히 설아 누나의 눈치가 살펴진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앞서 있었던 일들이 엮이기 시작했다.
한산월 아주머니의 시험.
중신상회에서 손속을 겨뤘던 검은 기운을 쓰는 무인들.
천자산에서 보았던 소림십팔나한진을 쓰던 녹림.
그리고 같은 무림삼불기의 하나인 대양무절기를 이은 혈마.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존재.
‘……학!’
혈마의 배후에도 학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미 무림삼불기 중 둘에 학의 손이 닿아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인 설아 누나의 가문 역시도 학의 손길이 닿았을 가능성은 십중팔구다.
그리 생각하니 학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무림삼불기.
무림의 역사가 기록하기를 거부했다는 괴물들.
그런 존재들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만들어낸 존재들이라니!
해선 안 될 생각이지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부님들…… 급(級)…….’
그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되지 않을까?
이념에서부터 그들이 취하는 방법까지, 내가 무림에 출두한 이후 접해온 그들의 존재는 나와는 상극이라고 해도 무관하다.
어쩌면 내가 쓰러트려야 할 대적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림삼불기라면… 남궁세가가 무너진 것도 말이 되네.”
녹림에 학의 손길이 닿아있었던 만큼 장강수로채도 같은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남궁세가를 큰 피해 없이 쓰러트린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흑사신의 후예가 도적 연맹과 함께 움직였다면 남궁세가가 속절없이 무너진 것도 이해가 된다.
‘어! 잠깐…….’
“그럼 흑사신의 후예가 있는 거야?”
순간 경각심이 치솟았다.
천마신교에서 맞상대한 혈마의 무위는 그야말로 하늘에 닿아있었다.
여러 기연들과 기책들, 그리고 수많은 조력들을 합친 끝에 천운이 닿아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그만한 강자가 여기 있다면?
최악(最惡)이다.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나를 피하는 것 같아.”
“아…….”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아쉬워하는 설아 누나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응?’
그런 가운데 내 감각에 다른 것이 잡혔다.
아마 대라조화심결로 주변과 소통하고 있지 않았다면 잡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기운이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다가오는 존재.
고수다.
“……그래도 모두 도망치진 않은 것 같네?”
나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설아 누나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설아 누나의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기지개를 켠다.
완벽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허당인 구석이 있는 살가운 누나가 아니라 무림에서 손꼽는 강자로서의 기세가 드러났다.
촤아아아!
그 기세 끝에 걸려있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격랑이 치는 파도 위에 몸을 올린다.
단 둘뿐이지만, 드러내는 존재감은 몰아치는 격랑만큼이나 크다.
‘흑기를 다루는 자들의 기량 차가 현격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신상회에서 처음 부딪쳤던 자는 흑기가 가진 특유의 특성을 활용할 줄은 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소주에 자리한 전 호부상서의 장원에서 부딪쳤던 자는 특유의 특성을 활용하는 단계를 지나 그 기운 자체를 터득한 수준이었다.
당시 돌원숭이의 조언이 없었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이후로도 흑기를 다루는 자들과는 이래저래 부딪치는 일은 있었지만, 소주에서 보았던 고수급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구파 기준으로 나눈다면 중신상회에서 부딪친 자들이 기본 제자 수준이라면, 소주에서 격돌했던 자는 숙련 제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췄을 때 눈앞에 있는 자들은 장로급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흑기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질 자체가 일반인이 익힐 법한 무공은 아니다.
기운의 특성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만큼 깊이 익힌 자가 나오기 힘든 무공이다.
불완전한 마공처럼 속성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으레 생기는 단점이다.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는 성취는 빠르지만, 단계가 높아질수록 기운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성취가 더뎌진다.
그러나 빼어난 재능은 그러한 단점마저도 이겨내며 극성에 달하게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림삼불기라 일컬어지는 흑사신의 위명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그 영역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자들로 보였다.
‘대체 얼마나 죽어 나간 걸까?’
새삼 천자산에서 격돌했던 자의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
천마사부가 눈여겨봤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파멸로 향하는 실험적인 무공을 익혔던 자들.
스스로의 재능을 저주하며 죽어갔던 그들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자의 판단인 걸까? 아니면 그자의 장악력이 얕은 걸까?”
설아 누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날 선 칼날처럼 예리하다.
아름답지만 무섭다.
“금방 처리하고 올게.”
설아 누나가 하얀 그림자를 남기며 빠르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흑사신의 후예들이 가진 무공 특성과 위험성 때문인지 나를 배제하려 한다.
나를 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배려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내가 지금은 사부님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만, 처음으로 무공에 대한 동경(憧憬)을 품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설아 누나다.
언젠가 그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했던 동경심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누나 말을 듣지 않는 못된 동생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설아 누나의 배려와 보호를 받기만 하는 어린 동생의 위치를 고수할 생각은 없다.
이런 상황에도 가만히만 있을 거라면 무공 따윈 안 배웠다!
콰앙!
전력을 다해 얼음길을 박찼다!
“운아?”
순식간에 설아 누나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 옆을 지나쳐 앞으로 튀어 나간다.
주머니를 뚫고 나가는 송곳처럼 튀어 나가는 내 몸 안에서 많은 것들이 들끓는다.
사부님들이 하나하나 박아 넣은 가르침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한 점에 수렴한다.
하나로 담겨진 것들이 넘쳐 오르며 줄기줄기 갈래를 뻗어냈다.
[무인의 첫 일격은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첫 격돌의 첫 일격!
내가 누구인지 보여준다.
적에게도.
설아 누나에게도.
뻗어내는 극강격의 묘리 안에 합일권의 일심일기(一心一技)가 담긴다.
콰앙!
“크억!?”
격돌하는 순간 일어나는 파문이 격랑 치는 장강의 흐름마저 찢어버린다.
발에 차인 공처럼 튕겨 나가는 자의 경악이 선명하게 보이는 가운데.
능운금광보를 밟으며 적을 추격한다.
정중동의 묘리가 담긴 금강부동심법에 구름을 밟고 노닌다는 제운종의 묘리가 섞여 있는 절세의 신법.
그림자조차 따르지 못할 속도로 적에 접근하는 중, 내 안에서 넘쳐흐르는 가르침의 하나가 흐름에 스며든다.
내가 보았고, 겪었으며, 그 뿌리 역시 담겨있기에 엉성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는 무공이 형태를 드러낸다.
“연대구품?!”
한순간 한 몸으로 아홉 개의 무공을 토해내는 소림의 절기!
그 누구도 가르친 바가 없는 무공을 흉내 낸다.
[하하하! 달마 그 친구가 보면 좋아하겠구나!]장삼풍 사부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신다.
나름 재현율이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아홉으로 나누어진 투로가 내가 배운 무공들을 뿜어낸다.
한순간에 아홉 절기를 감당해야 하는 기혈이 터질 듯 팽창하며 부풀었지만, 사부님들이 단련시킨 몸이 능히 감당해낸다.
극강격이, 천라무결이, 무극장이 적의 사방팔방을 점거하며 뻗어나간다.
“무, 무슨!!”
당하는 입장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쉬이 감당할 수 없는 절기다.
마치 아홉 명의 고수에게서 합공을 당하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절기들이 쏟아지고 있다.
허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고수임을 증명한다.
“큭!”
사아아아!
설아 누나보다는 미진하지만, 나름의 극음지력을 품은 흑기가 한순간이나마 장강의 파랑 위에 얼음 발판을 만들어낸다.
가진 힘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기 위한 기반을 다진 적이 자욱한 먹구름마냥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낸다.
콰가가가가가!
극음지기가 파고들며 몸을 굳어지게 한다.
연대구품이 만들어낸 절기는 적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에도 적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흔들렸다.
흑기로 이루어진 기운을 직접적으로 후려쳤음에도 멀쩡한 것에 놀라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 내가 보여줄 것은 남아있다.
“일어나라!!”
상화를 일깨우며, 내게 허락된 또 하나의 힘을 꺼내 든다.
대라조화심결.
내가 이기어검을 부리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힘!
하지만, 이 부근에는 검이 없다.
수적들이 휘두르던 검은 모조리 강 속에 빠졌다.
그럼에도 문제는 없다.
검을 대체할 무기는 사방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나와 격돌하며 깨지고 부서져 흩어진 흑기.
그 흑기와 닿아 만들어진 얼음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깨지고 부서진 얼음들에 나의 의지가 닿는다.
부질없이 부서져 흩어진 얼음 조각들이 의미를 갖는다.
다시 한번 존재의 목적성을 가지게 된 얼음 조각들이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을 드러낸다.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얼음 조각이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
‘다시 하나로…….’
연대구품을 거두며 내 신형을 하나로 모은다.
아무리 내 기혈이 튼튼하고, 내공이 한정적으로 무한하다고 해도 연대구품을 통해 사부님들의 온갖 절학을 펼치며 이기어검까지 유지하는 것은 무리다.
하나로 모인 기운을 올곧게 뻗는다.
극강격!
연거푸 두들겨 이곳저곳이 깨진 검은 먹구름 한가운데를 극강의 일격이 꿰뚫는다.
콰아아아아앙!
“쿠어억!”
내상을 입었는지 상대가 입에서 피를 쏟아낸다.
갑옷 같은 검은 구름이 깨지며 무방비해진 적을 향해 주변에서 이빨을 세우고 있던 얼음 조각들이 쏟아진다.
퍼퍼퍽! 퍼퍽! 퍽!
얼음 조각들은 본래 주인의 몸뚱이를 순식간에 찢어버렸다.
순식간에 힘을 잃은 그 몸이 장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한 놈 끝냈고.’
뒤를 돌아보니 설아 누나와 죽은 자의 동료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