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84
283화 장삼풍 사부의 무도(武道)(1)
다음 날.
백무호가 아침부터 건들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어제 뭐 했냐?”
“한 게 이것저것 많아서 그리 물어보면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더 굴려달란 소리로 알아들으면 되겠냐?”
“그건 알아서 할 거니까 접어두고.”
고개를 휘휘 젓던 백무호가 주어를 확실하게 붙였다.
“제갈윤재랑 팽철 두 친구 모두 생각이 많아 보여서.”
“아, 그쪽?”
바로 이해가 되어 나도 모르게 옆방으로 시선이 갔다.
아침부터 뭔가 일이라도 있는 듯 둘은 벌써 자리를 비웠다.
“사이좋게 지내보자는 식으로 말하긴 했는데…….”
“아, 바로 이해되네. 네 말주변이 그렇지 뭐.”
“시꾸락!”
제갈윤재와 팽철은 연합의 미래에서 무당파가 어떤 위치에 있을지 계산을 마친 느낌이다.
무당파와 가까워질 생각을 다진 것 같다.
밤늦게야 숙소로 돌아온 것을 보면 무당파 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문을 위한 영업 활동에 매진한 모양이다.
‘어지간히 낯설었나 보네.’
적어도 내가 파악한 제갈윤재라면 어떻게든 나와 함께 움직이며 무당파와의 인연을 다지려 했을 것이다.
그런 제갈윤재가 혼자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했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좋게 봐야 할지, 나쁘게 봐야 할지…….’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계산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변화다.
다만 좋은 쪽으로의 변화일지, 나쁜 쪽으로의 변화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름 고민에 빠지려는데 백무호가 등을 떠밀었다.
숙소 밖으로 나가니 장소월 소저가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멀뚱히 서 있던 그녀가 바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네요.”
“예, 그러네요.”
“산속이라 그런지 공기가 맑아요.”
아침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장소월 소저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
어제 한 행동을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것인가 싶다.
‘맞나?’
딱딱하달지, 낯설다고 할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노력하는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문득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백무호 녀석이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비무 때는 계도(죽빵)다.’
주먹을 부르는 표정이다.
적어도 내겐 그리 보였다.
***
식사를 하는 곳까지 걸어가며 백무호에게 화산파의 분위기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안 좋아.”
“어느 정도로 안 좋은데?”
“내가 볼 땐 터지기 일보직전이야. 작은 불씨만으로도 당장 불이 붙을 정도?”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해할 수 있다.
장문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정체불명 괴한의 암습에 귀천하셨다.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잠깐의 만남과 이후 들은 소문으로도 높은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분이 괴한에게 암살당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게 당연하다.
하물며 구파 중 가장 고고한 성향을 가졌다고 평해지는 화산파다.
모르긴 몰라도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숨기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화가 났더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은근히 화산파를 생각하는 백무호다.
내색하지 않을 뿐 백무호 역시 착잡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어제 회합에서 본 화산파 장로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지만, 그 안에는 들끓는 분노가 잠들어 있던 모양이다.
‘이거 문제네…….’
분노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그에 비례해서 평정심도 고갈시킨다는 것이다.
강한 원동력을 지닌 곳이 평정심을 잃으면 자칫 폭주로 이어지기 쉽다.
하물며 상대는 학이다.
지금까지 학이 보인 행보를 보면 내부에서 흔들고 충동질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많았다.
흥분해있는 화산파라면 입맛대로 조종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 위해 화산파 내부에는 학의 간자가 심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는 화산파가 종남파 못지않은 위험 요소라는 의미다.
골치 아픈 일이다.
“그건 그렇고, 너 괴롭히던 녀석들은 만나 봤냐?”
달갑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인지 백무호가 슬쩍 화제를 돌린다.
그런 백무호의 말에 나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이 있다.
“연 소협이…… 괴롭힘을 당해요?”
장소월 소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차마 잇지 못하고 늘어진 저 사이에 생략된 ‘어떤 미친놈께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을?’이라는 말이 귓가에 들려오는 느낌이다.
“많이 모자랐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신기하네요.”
딱히 들쑤셔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라 판단했는지 장소월 소저는 더 묻지 않고 선을 지켰다.
흥미는 있지만 나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반면 백무호는 그딴 게 없다.
“내버려둘 거야?”
“잔챙이들 괴롭혀서 뭐가 남겠냐. 사과받는다고 해봐야 진심도 아닐 건데. 그런 사과 받아 봐야 기분만 더러워져.”
무당산을 목전에 뒀을 땐 떠오르는 흑역사를 곱씹으며 산에 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불을 질러버리고 싶단 그 생각은 누군가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그냥 그 시절의 못난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좀 아니긴 했다.
그러니 딱히 내가 성인이라서가 아니다.
당시 윤시후와 어울리던 그놈들을 용서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들에게 품고 있는 내 마음이 그 정도일 뿐이라는 거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복수심을 유지하기 위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가 있는 것이다.
무당파에서 하산한 이후 그렇게까지 한가한 시간을 보낸 기억은 없다.
잔챙이들에게 일일이 원한을 불태울 여유 따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윤시후가 여전히 무당파에 남아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차라리 눈앞에 앵앵거리는 모기는 성가시기라도 하지.”
“풉! 그게 더 심한 말 아니냐? 모기 이하라니. 하하하하!”
“심하긴.”
“아니, 그렇잖아. 지금쯤 그놈들 모르긴 몰라도 말라 죽어가고 있을걸?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모기 취급도 안 해 주니 웃기지.”
백무호 말에도 일리는 있다.
주동자는 윤시후였지만 그놈과 동조해서 나를 괴롭히던 놈들이라면 공포에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내 알 바 아냐.”
직접 나서서 원한을 풀 생각이 없듯, 그놈들이 제풀에 두려움을 품는 것 역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걸 신경 쓴다면 오히려 내가 호구와 병신 사이의 무언가가 될 뿐이다.
“얼굴 마주칠 일 없으면 그걸로 됐어.”
어차피 내가 가르칠 대상은 무당파 본산제자들이 주축일 것이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데 하찮은 일에 힘을 쏟고 싶지 않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
식사 후 연무장으로 향하니 생각보다 많은 인원들이 보였다.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 제자들부터 나이 지긋한 반백의 어르신들까지 다양했다.
모두 내 무공에 흥미를 가지고 모인 무당파 본산제자들이다.
다만, 뒤쪽에는 머리를 땅에 파묻은 꿩마냥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젊은것들이 있었다.
‘저것들은 왜 저기에? 제 발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들이 그럴 깜냥이 있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누군가 의견을 내 불러낸 모양이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저 꼴을 보니 속이 좀 시원해지긴 했다.
그래도 우선해서 신경 써야 할 것은 무당파 본산제자들이다.
무당파의 무를 이어야 할 사람들.
나는 연무장에 마련된 단상 위에 올랐다.
“연청운이라 합니다.”
포권을 쥐며 예를 갖추자 단상 위로 시선이 모인다.
“허도진인께서 제가 이룬 성취를 눈여겨보셨는지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 어리긴 하나 스스로 이룬 바가 있어 나온 자리이니 많은 것을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건방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눈에 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니까.
겸손한 척할 순 있다.
허나 이 자리에서는 겸손해선 안 된다.
내가 전하는 것은 장삼풍 사부의 무(武)다.
장삼풍 사부의 무를 논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단순히 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게 된다.
가식이나 떨며 시늉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다.
거부는 거부한다.
싫어도 강제로 욱여넣을 생각이다.
사람 감정에는 뚜렷한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무공에는 정답이 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는 이상 거리낄 필요는 없다.
‘꼬우면 어디 장삼풍 사부한테 따져보시든가.’
무론(武論)으로 나오면 무론으로 논파하고, 실력에 의문을 보이면 비무로 꺾어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 시작을 알리는 투로를 펼친다.
시작은 태극권이다.
무당파 제자라면 누구나 익히는 기초 무공.
하지만 내가 펼치는 태극권은 다르다.
장삼풍 사부가 전한 진짜 태극권이다.
“허! 고작 태극권인가.”
대단한 거라도 보여주는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에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있다.
“다르구먼.”
“예?”
“같지만 달라. 아니, 같은 것조차 아닌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과 다름을 알아차린 몇몇 무당파 제자들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차이를 비교해봤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이들의 시큰둥한 반응은 여전했다.
“태극권이 태극권이지 뭐가 다르다고 하시는지요?”
“집중해서 보기나 하거라. 수준 낮은 거 티 내지 말고.”
퉁명스럽게 말하거나 대단치 않다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 제자들이었다.
질책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다.
어르신들의 질책에 볼멘소리를 하던 이들이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해 다시 태극권을 처음부터 펼쳐 보였다.
“으음…….”
“이거…….”
“생각보다…….”
무당파 제자가 태극권을 모를 리 없다.
집중한 만큼 차이점을 찾아낸 그들이 하나씩 결론에 다다랐다.
“별론데?”
그들의 표정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너무 수비적이야.”
“막기만 하다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불살주의라도 있는 건가?”
실망감이 짙은 만큼 어투도 거칠어졌다.
경험이 깊은 이들은 뭔가 감을 잡아가는 듯 보였지만, 젊은 제자들의 반응은 곱지 않았다.
시작부터 건방질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내 태도에 대한 반발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예상은 했다.
진의를 전한다고 해도 이를 손쉽게 받아먹을 수 있다면 무당파 무공의 본질이 이리 흐트러졌을 리가 없다.
결국, 부족한 부분은 실력으로 납득시켜야 한다.
왜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지.
왜 이게 정답인지.
“수비적이라 했습니까?”
내 물음에 무당파의 젊은 제자들이 멈칫했다.
허나 굽힐 마음이 없는지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이 수비적인 투로가 아니면 무엇이오?”
“글쎄요. 제가 봤을 땐 굉장히 공격적인 투로입니다만.”
“공격적? 이게 말이오?”
어이없어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는 눈빛이다.
“해보시겠습니까?”
나는 가장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못할 것 없지!”
무당파의 젊은 제자가 단번에 단상 위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