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72
371화 있어선 안 될 이름
“무슨 뜻인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음을 느꼈다.
내 안에서 감정이 이성을 앞서려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진다.
당연하다.
‘이 새끼가 감히 할아버지 존함을 입에 담아?’
할아버지와 연관되어있는 무언가가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그 일에 대해서 일호는 내가 모르는 정보를 갖고 있다.
물론 할아버지의 모든 행적에 대해 내가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대상자가 눈앞에 있는 일호, 흑살대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암살하고자 하는 의뢰에 대한 정보이거나, 또는 주변 분들에 대한 정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쪽이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내게 있어 할아버지는 특별하다.
어린 시절 가치관이 형성되는 나이에 나는 부모님보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더 짙게 받았었다.
할아버지는 존경하고 공경해야 하는, 이정표로 삼을만한 분이시다.
저딴 놈의 더러운 주둥이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일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가족을 아끼는구나.”
“당연하지.”
“재미있네. 그자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데, 알맹이는 전혀 달라.”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다.
같은 냄새가 난다는 말은 불쾌하지만, 달리 받아들이면 같은 격에 올라섰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멸천회주?”
“그래, 그자.”
일호 역시 멸천회주의 입김이 닿은 자였던 모양이다.
다만, 멸천회주를 두고 ‘그자’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신뢰나 충성심이 있진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멸천회주에게 걸린 제약을 생각하면 직접적으로 수하로 삼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힘을 쥐여 준 자일 뿐.
“여기 일이 마무리되면 북쪽으로 가봐. 십 리쯤 가면 사당이 있을 거다. 거기에 재미있는 것이 많을 거야. 내가 왜 네 조부를 언급했는지도 알 수 있을 거고.”
살짝 어이가 없다.
이런 정보를 왜 스스로 밝히는지 모르겠다.
“……살려달라는 건가?”
“하하하! 그건 들어주지도 않을 거잖아. 이뤄지지도 않을 거래에 매달리는 재미없는 짓 따윈 안 해.”
죽음을 우습게 본다.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임을 당할 것임을 인지하였음에도 여유가 가득하다.
특이함을 넘어 이질적이다.
‘설마… 함정?’
나는 일호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에 일호가 피식 웃었다.
“너라면 그걸로 재미있는 걸 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뭐, 믿기 싫으면 관두든가. 것도 재미는 있겠네.”
일호의 대답에서 한 가지 일괄적인 단어를 찾아냈다.
재미. 재미있을 것 같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미친놈이다.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해하면 안 될 작자다.
우습게도 그리 판단을 내리자, 일호가 어떤 자인지 보였다.
가치관이 뒤틀려있는 자다.
특히 죽음에 대한 가치관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
이자에게 죽음이란 헌신짝 같은 거다.
가볍고, 아무렇게나 쓰다, 아무 데나 버려도 부담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고, 타인의 것이고 차이가 없다.
내가 할아버지를 보며 가치관을 형성했듯이, 이자는 흑살대라는 살수조직 안에서 가치관을 만들었다.
흑살대의 성향을 생각하면 어쩌면 가장 흑살대다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대화가 너무 길었나?”
일호가 칼을 뽑았다.
이호가 쓰던 것과 닮은 기형도다.
“어디 흑살대의 숨통을 끊어봐라.”
콰릉!!
구불구불한 기형도의 형태를 따라 검은 강기가 벼락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채 뻗어나간다.
슬쩍 옆으로 피하니 미간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쉬익!
감각을 끌어올리자 암기가 정확히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피할 방향을 미리 읽고 암기를 던졌다.
교묘한 수법이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살인에 대한 감각만큼은 천부적이군.] [저런 허접한테 움직임을 읽히다니. 쯧쯧쯧.]머릿속에서 일호에 대한 호평과 나에 대한 타박이 뒤섞였다.
‘예이, 예!’
선계에서 들려온 타박에 좀 더 거칠게 움직이기로 했다.
티잉!
암기를 쳐 날려버리고.
파앗!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일호가 지면을 스치듯 발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
바닥에 쌓여있던 수북한 돌조각과 흙먼지가 파도처럼 일어나 나를 덮친다.
보통이라면 시야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위화감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덮쳐오는 저 돌조각과 흙먼지에 내력을 실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닿는 순간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 정도의 힘이다.
자연스럽게 몸에 닿은 모든 것을 암기로 쓴다.
하지만 나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저것에 손을 내민다.
일호가 담은 내력을 파훼하고 헤집었다.
촤아아아!
모래가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덮쳐오는 돌조각과 흙먼지가 본연의 모습으로 허물어진다.
흙먼지의 파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잠깐 시야가 차단되었다 싶은 순간!
날카로운 예기와 함께 정면으로 비검이 날아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속지 않는다.
눈속임.
진짜는 따로 있다.
요동치는 날카로움이 포위하듯 사방을 휘감으며 덮쳐왔다.
조금 전에 느껴봤던 기척이다.
파라라라락!
은사(銀絲)!
따당!!
양손으로 각각 대응한다.
한 손으로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비검을 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몸을 휘감으려는 은사를 낚아챈다.
차륵!
보통은 잡는 순간 손이 절단되어야겠지만, 그 정도로 날려 나갈 몸이 아니다.
은사를 잡아당겨 일호를 낚아낼 생각이었지만, 당긴 은사에는 전혀 무게감이 실리지 않았다.
은사를 맨손으로 움켜쥐고도 멀쩡한 걸 보고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정수리에서 서늘한 느낌이 일었다.
‘이 각도에서?’
투척되는 암기는 보통 직선을 그린다.
일부 특이한 형태의 암기는 가파른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
사천당가에서 자랑하는 화접비의 경우 바람과 공기의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리는 암기로 알려져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표적을 향한 직선운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낀 암기의 궤적은 전혀 달랐다.
투척된 암기가 위에서 아래로, 정확하게 정수리를 노리며 떨어져 내린다.
상리에서 어긋난 궤적을 보이는 것이다.
‘이기어검?’
나는 빠르게 머리 위를 손으로 저었다.
티잉!
뭔가 쳐내지는 느낌과 함께 얕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일호가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부린 암기가 찌그러져 날아가는 소리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장침이었다.
가늘고 가벼워 사용하기도 편하고, 허를 찌르기도 좋은 암기다.
‘가지가지 한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수법을 눈가림용으로 깔아놓고, 진짜 노림수는 이기어검으로 부리는 장침이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날리는 비장의 한 수.
정면에서 몰아쳐 오는 암기에 대처하는 것만 생각하다간 바로 당할 수법이었다.
“안 통하네?”
일호가 아쉬움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이빨의 틈새에서 핏기가 감돈다.
내 이기어검과는 달리, 일호가 쓰는 이기어검은 통상적으로 무림에 널리 알려진 이기어검의 수법이었을 것이다.
깨지는 순간 시전자에게도 타격이 전해진 것이다.
“통하겠냐?”
“보통은 먹혀. 니가 괴물인 거야.”
반박하긴 어려웠다.
온갖 암기를 사용하며 철저히 상대의 의중과 감각을 속이는 수법들의 연속.
공격들 하나하나가 변칙적이면서 철저하게 외통수로 몰아간다.
특히 오감을 속이는 방식의 연계는 훌륭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걸 정면에서가 아니라 기습적으로 당한다면?
무림 전체를 통틀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고수는 손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철저하게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법.
무도가 아닌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인술(殺人術)로는 최상급이라 평할 수 있다.
살수의 정점에 있는 자답다.
‘그렇다면 아예 간격을 주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앞으로 달려 나간다.
파앗!
각성 후 처음으로 펼치는 능운금광보.
한순간에 형태를 갖춘 두 절기에 담긴 힘이 내 몸의 위치를 바꾼다.
완전해진 능운금광보인만큼 그 안에 담긴 금강부동신법의 공능 또한 완벽하게 펼쳐진다.
“이형환위?!”
한순간에 코앞에 나타난 나를 보며 일호가 놀라 살수를 펼친다.
“잡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이 일호의 간격에서 벌어졌다면, 피부가 맞닿는 근접전은 내 간격이다.
손목을 낚아채 움켜쥐며 곧장 일호의 팔을 휘감았다.
꺾는다.
붙잡아 제압한 뒤 뭉개려는데,
“퉷!”
눈을 노리고 침을 뱉는다.
피가 섞여 있는 침이 암기처럼 눈을 노린다.
온갖 수작을 다 부리는 놈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앞으로 들이민다.
빠악!
내 이마가 일호의 코밑, 인중을 가격한다.
그리고 휘감은 일호의 팔을 잡아당긴다.
내 힘을 이기지 못한 일호의 팔이 관절의 한계치까지 휘어진다.
잡고 꺾은 관절에서 파열음이 들려오려는 찰나.
서걱!
일호가 잡혀 꺾인 팔을 스스로 잘랐다.
“핫하하하하!”
다시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일호의 칼이 재차 쇄도한다.
내 목을 노린 일격.
검은 강기가 기형도의 칼날 위에서 뇌전처럼 번뜩인다.
그에 응하며 허리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온몸을 비틀어 치는 팔꿈치 공격.
쩌엉!
팔꿈치 끝이 기형도의 옆면을 후려친다.
부러진 기형도의 칼날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부러진 반쪽의 칼날은 내 목을 긋지 못한 채 허공을 갈랐다.
우득!
부러진 기형도를 쥐고 있던 나머지 팔을 붙잡고 부러트린다.
퍼억!
두 팔을 잃고 허물어지는 일호를 걷어찬 뒤 가슴을 짓밟는다.
밟아 눌러 제압했다.
일호는 몸부림치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지그시 누르는 발힘에 갈비뼈가 부러진 이후로는 저항을 멈췄다.
“아, 젠장……. 더 할 수… 쿨럭! …있을 것 같았는데…….”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찔렀는지 일호가 허탈하게 피를 토한다.
“그게 유언이냐?”
“멋진 말이… 쿨럭… 별로 안 떠올라서…… 히힛.”
꾸역꾸역 피를 토하는 일호가 히죽 웃는다.
“쿨럭쿨럭… 사후세계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떠오른 멋진 말이라는 게 이런 건가 보다.
“그건 유감이군.”
나는 그대로 일호의 몸통을 밟았다.
퍼걱!
심장 터지는 느낌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그렇게 일호가 죽었다.
***
내가 일호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일자살수들은 설아 누나의 손에 전멸했다.
실전에서 무공을 펼치며 뭔가 감을 잡았는지 오행신력의 흐름이 능숙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설아 누나 역시 천재과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기뻐하는 설아 누나의 성취를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일호가 말한 것.
설아 누나 역시 가타부타 없이 움직이는 나를 조용히 따라주었다.
즉시 북쪽으로 향한 나는 정말 십 리 거리에 있는 사당을 보고 짧은 헛웃음을 토했다.
“진짜네.”
신박하게 미친놈다웠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자 짙은 종이 냄새와 묵향(墨香)이 나를 반겼다.
아마도 흑살대가 의뢰를 받는 접선 장소인 것 같다.
살수조직이니만큼 은밀하게 의뢰를 받기 위한 이런 장소도 필요하긴 할 것이다.
나는 사당에 널려있는 서찰들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나 흑살대가 받은 의뢰내용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내 눈길을 잡았다.
“이건…….”
흑살대에 대량의 암살을 의뢰한 의뢰주다.
직접 접한 사람은 극소수겠으나, 그 존재는 천하만민이 모두 알고 있는 그곳.
“……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