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73
372화 멸천회주의 노림수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한번 의뢰서를 살폈다.
황궁에서 녹을 먹는 고관대작들의 이름이 좌르르 올라있는 의뢰서에는 의뢰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지승태.
할아버지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관리들의 필두로 할아버지도 그 충성심만큼은 인정할 만하다고 하셨다.
과거 황궁에서 근무하실 적엔 꽤나 친분을 쌓았다고 들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지승태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한둘은 아니겠지만, 살수조직에 고관대작들의 목을 따라고 의뢰서를 내미는 지승태는 하나뿐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을 진행하는 주체가 누구냐가 중요해진다.
과잉충성에 의한 폭주인가? 황제의 의중이 담긴 행동인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후자다.
개인의 폭주라면 진즉에 저질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움직인다?’
용린대를 통해 들었던 황제의 근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궁인들조차 신뢰할 수 없어 거북이처럼 웅크린 상태라고 했다.
드디어 웅크린 몸을 일으킬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단과 방법이다.
여기 올라온 명단을 보면 말 그대로 고관대작이라면 싸그리 다 죽여 없애겠다는 수준이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건 확실하게 선을 넘었다.
제정신으로 내린 판단이 아니다.
“요즘엔 눈이 돌아가는 게 유행인가?”
“심각한 거니?”
설아 누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서찰을 보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겠네…….”
뭔가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워낙 생소한 이름들뿐이라 아쉬워하는 것 같다.
뭐, 무림인인 설아 누나가 모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장 관과 연관이 없는 사람을 붙잡아놓고 육부 수장들 이름 좀 말해보라고 하면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야 할아버지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많으니 알고 있는 거다.
“황궁 요직에 있는 고관대작들의 이름이에요.”
“이게 다?”
대충 감을 잡았는지 설아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종이가 빽빽할 정도로 이름이 적혀있으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현 황제에 대해서는 동정할 여지가 있다.
현재 처한 상황이 미치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부친인 선황이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
뒤늦게 독살이란 걸 알아냈지만, 공표하지도 못한 채 조용히 파묻어야 했다.
손발이 되어야 할 내시나 궁녀 같은 궁인들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관대작들과는 정치적으로 갈등 중이다.
선황처럼 언제 급사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몰려있다면 주변의 모든 인물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까다롭겠는데?”
독이 오른 맹수는 먹이를 줘도 먹지 않는다.
가뜩이나 북방은 시끄럽고, 무림은 혼란스럽다.
지금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의 폭주는 자칫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네. 멸천회주가 뭔 짓거리를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어?”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말에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
[호오?] [이건가?]영향력만 두고 본다면 하늘 아래에서 누구보다 큰 존재다.
황제가 세우는 정책의 방향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의 하계는 수치상으로는 그럭저럭 태평성대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의미로 잘 가꿔진 텃밭이라 할 수 있겠구나.] [황제가 이걸 무너트리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과율을 떠안아야 할걸?] [그리고 그 과율을 제거하는 것은 큰 공격이 되겠지.] [놈이 그걸 취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말 그대로 놈의 목에 걸려있는 유일한 족쇄가 풀리는 셈이 된다.]소름이 돋는다.
제약이 없어진 멸천회주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소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이겠구나.] [그거야 그 새끼가 공격을 처먹을 욕심 때문이지. 황제가 저지를 짓에 조금이라도 개입했다간 그 잡놈 역시 인과에 대한 책임이 생길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무림에서 해왔던 것처럼 적당히 자리만 마련하고 책임은 모조리 다른 놈들에게 몰아넣은 상태일 거다.] [전대 황제도 그런 식으로 처리했겠네.]천상에서 신선분들이 갑론을박을 하며 의견을 나눴다.
확실히 관련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답게 빠르게 멸천회주의 노림수를 읽어내셨다.
문제는 상황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점이다.
멸천회주는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려 조직을 운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힘을 쥐여 주고 그 힘을 스스로 휘두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선대 황제를 죽인 세력이 황궁 내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제마저 억누른 채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들.
정치를 무기로 삼는 자들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건 단순히 무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던 무림의 방식보다 피곤할지도 모른다.
‘혹시… 이것도 노린 건가?’
어쩌면 황제가 이번처럼 극단적으로 움직이도록 몰아가는 것이 멸천회주의 노림수일지도 모르겠다.
황제를 억누를 수 있는 세력을 키워놓고 그들을 제물 삼아 황제의 실정(失政)을 노리는 것이다.
“……멸천회주의 팔다리를 자를 생각으로 흑살대를 친 건데…… 운이 좋았네요.”
[뭐,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봐야겠지.]만약 내가 흑살대를 박살 내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고관대작들이 모조리 살해당한 뒤 국정운영이 마비된다면 어떤 파국(破局)이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황제가 미쳐 날뛴다면?
나라는 개판이 될 것이고, 황제는 그 과율을 모두 끌어안은 채 멸천회주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멸천회주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공격(功格)을 쌓게 되었겠지.
이를 상상해보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일단…… 황도로 가야 하나?”
“황도로 가게?”
생각을 정리하는 거라 여겼는지 내 혼잣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설아 누나가 물어왔다.
[잘 생각해라. 그 잡놈이 황제의 실정을 노리고 있다면, 기회를 엿보기 위해 인근에 있을 공산이 높다.]일리가 있다.
어쩌면 다시 맞부딪칠지도 모른다.
인과의 제약 탓에 날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그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압박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다.
그냥 넘어갔다간 추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나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넘기기 힘든 부분이라.”
“알았어. 나는 운이를 믿으니까.”
설아 누나가 배시시 웃으며 그대로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어딜 가든 함께야.”
등에 닿아오는 설아 누나의 감촉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저 몸이 닿은 것뿐인데 뭔가 자극적인 느낌이 든다.
“여기 있는 의뢰서들은 어찌할까요?”
이화가 불쑥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이화 역시 이 의뢰서의 가치를 알아본 것 같다.
“챙겨놓자.”
“예. 그럼 분류해서 정리해 담겠습니다.”
“그건 맡길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냥 쓸어 담기만 해.”
“예.”
허리를 숙여 대답한 이화가 빠른 속도로 서류들을 쓸어 담았다.
흑살대 살수들과의 전투에 나서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굉장히 열성적으로 움직여 순식간에 끝냈다. 주술을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 처리가 빨랐다.
‘이화도 뭔가 얻긴 얻은 모양이네.’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던 설아 누나는 오행신력을 얻게 되었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한산월 아주머니의 경우 한빙의 기운이 해소되었다.
이를 미뤄 짐작해보면 이화 역시 뭔가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움직임이 가벼운 것을 보면 육체적인 능력이 아닐까 예상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화는 천마 사부의 피를 이었다.
특히나 이화의 경우 기이할 정도로 강한 불의 신력을 지니고 있다.
그 불의 신력이 내 각성에 영향을 받아 육체적인 능력이 눈을 떴다면?
어쩌면 그 힘은 괴력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안 어울리지 않나?’
절로 실소가 나왔다.
이화와 괴력(怪力)이라니, 뭔가 균형이 안 맞는 느낌이다.
“정리 끝났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이화가 자기 몸보다 더 큰 보따리를 짊어졌다.
“그럼 가자. 대신 처리해줄 사람이 있는 곳으로.”
‘떡은 떡집에’라는 격언이 있다.
제갈가주라면 분명 잘 처리해줄 것이다.
뭔가 자꾸 일을 떠넘기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은 잘하는 사람이 해야 효율적인 거다.
***
챙!
도검이 부딪친다.
저돌적인 도를 검이 빗겨낸다.
“우워어어어어어!”
곰처럼 사나운 괴성을 뿌리며 벗어진 머리에 용 문신이 두드러진 사내가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가며 대도를 휘두른다.
힘과 기세로 밀어붙여 단번에 쪼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팅!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밋밋한 소리를 만들어낸 도검이 서로의 명암을 갈랐다.
푸욱!
“……컥!”
“거친 것도 좋지만, 거기에 휘둘리면 본말전도(本末顚倒)지.”
힘과 기세가 실린 강격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그만큼 움직임의 대부분이 그 일격을 담아내는 것에 묶여버리게 된다.
그 강격을 끌어당겨 몸의 균형을 무너트린다.
만약 정면에서 부딪쳐 상쇄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검을 든 이, 백무호는 비스듬히 흘려냈다.
그리고 열린 빈틈을 놓치지 않고 찔렀다.
“흑룡회 새끼들 X도 없구만!”
백무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음 상대를 찾았다.
조금 전의 외침 덕분에 상대는 부족하지 않았다.
흥분한 흑룡회 무인들이 알아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무호의 주변에 닿지도 못했다.
푸푸푹!
전장에서 가장 사납게 날뛰는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도륙을 내버렸다.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검은 화산파 도복을 입은 이들은 흑룡회의 거친 검격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무가 탄성을 흘렸다.
“체면을 내려놓은 화산파라……. 무섭구나.”
합공도 마다치 않는다.
등이 보이면 암습도 주저하지 않는다.
눈앞에 적이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죽인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목숨도 망설임 없이 미끼로 내걸었다.
그 모습은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보일 정도였다.
“동도들은 흑매검수라 부르고 있습니다.”
“흑매(黑梅)라…….”
오명을 씻고자 목숨을 내던지는 이들이다.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며 검을 휘두르는 그들의 처절한 모습은 사연을 아는 이들에게 안타까움마저 일게 했다.
물론 적들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구파는 구파구나.”
공격성을 극대화한 화산파 검법은 오대세가의 가주들마저 인정할 정도로 살벌했다.
그 매서움은 하나의 유파를 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멸천회의 수작에 걸려 문파가 반 토막 난 화산파는 추후 입지가 위태로운 감이 없지 않다고 여겨졌으나, 아직 충분한 저력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죽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 정도로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사천연합은 화산을 포위하고 함정을 파놓았다.
화산파 내부는 진즉에 정리했지만, 내부의 변절자들을 살려둔 것처럼 소문을 내 적의 공격을 유도했다.
다급히 공격해온 사파연합은 화산파에 남아있는 변절자들과 공조하여 사천연합을 역으로 포위하려 했지만, 모두 박살이 났다.
여기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바로 흑매검수들이다.
혈교의 대법을 받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비밀리에 접선해온 자들은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사파 놈들은 생각보다 단합이 안 되는 느낌인데요?”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는 느낌이긴 하구나.”
구파 중 일부가 내부의 변절로 무너지긴 했지만 연청운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혼란을 수습하는 모양새였다면, 사파는 연합체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힘은 모였지만, 한덩어리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지금만 해도 공격이 일거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각개격파가 되었다.
“저들도 멍청이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니 다른 방도를 찾을 거다.”
“그 전에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어야겠군요.”
“상책(上策)은 지금처럼 계속 한덩어리로 뭉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다만…… 응?”
좋은 방도가 없는지 고민하던 제갈신무는 불현듯 저 멀리 보이는 무언가에 화들짝 놀랐다.
“영물?”
거대한 푸른 새다.
당장은 손톱만큼 작게 보이지만, 떨어져 있는 거리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다가오는데요?”
“흐음…….”
영물이라고 해도 모두 제각각이다.
과연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제갈신무는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눈에 힘을 주었다. 곁에 있던 제갈윤재도 바싹 긴장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맹주?”
그 덩치에 감탄할 만큼 다가왔을 때 거대한 푸른 새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을 알아본 제갈신무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정말이지 언제나 상식 밖에 있는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