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98
397화 사천으로
남만야수궁은 사천 남쪽에 위치한 밀림을 근거지로 구축된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독을 잘 다루고, 밀림의 맹수들을 길들여 부리는 술수에 능하다고들 한다.
험지에서 살아가는 만큼 본신의 무력도 만만치 않겠지만, 맹수를 다루는 술수로 수적 우위를 잡으려 한다면 상당히 까다로울 것 같다.
힘으로 굴복시킨 것인지, 다른 방향으로 회유하여 끌어들인 것인지 알 수는 없으니 지금 움직였다는 것은 멸천회주의 손이 닿아있음이 분명하다.
온갖 민폐라는 민폐는 다 끼치는 놈이다.
‘그나저나, 이러다 포달랍궁까지 움직이는 거 아냐?’
서역 무림의 최강자인 포달랍궁까지 움직인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 만들어진다.
주력이 모두 원정을 나온 사천은 물론 천마신교까지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무림맹의 주축이 되고 있는 사천연합이 붕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휘둘릴 수만도 없다.
나는 진중하게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극악사도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고, 남만야수궁은 점창과 함께 움직이는 중. 흑룡회와 대흑련이 힘을 합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럼 공동파는 뭘 하고 있지?’
각개격파를 걱정해 밀집한 나와 달리, 멸천회는 숨겨두었던 패를 하나씩 꺼내 들며 폭넓게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 움직임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각각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모았던 전력을 분산시키는 순간, 단숨에 치고 들어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조가 있었다면 대처가 좀 더 수월…… 아, 썩을!’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청조를 제압한 이유가 화산에 결성된 구파와 정사마 연합을 치려는 사전포석으로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이것 때문인 것 같다.
확실히 무리수를 둘 만했다.
하루 만에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는 청조의 기동력이 온전했다면 멸천회주의 숨겨진 힘들이 각지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대처가 어렵지 않았다.
제아무리 넓게 퍼져서 움직인다고 해도 나, 혹은 입천신마존이 함께 움직이며 유격대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찍어 누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권이 크게 제한되었다.
이대로 몸을 웅크린 채 공세에 대비하느냐, 아니면 움직임이 파악된 적들의 행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느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핵심은 멸천회주의 의중이 어디에 있느냐다.
그러려면 멸천회주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어디냐…….’
멸천회주의 가장 유력한 표적은 구파다.
인과의 문제로 인해 직접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하지만, 구파의 명맥을 끊어내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다면 제 영향력 아래에 있는 세력들이 움직이는 지금이라면 ‘그들의 자의’로 구파를 쳐낼 기회라 여길 수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극악사도가 준비 중인 강시의 힘이 생각보다 큰 것일지도 모른다.
각지에서 문제를 일으킨 후 시간을 벌어 극악사도가 준비 중인 힘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혹은 과율을 만들어 인과를 먹고자 할 수도 있다.
황궁에서 과율을 만들어내던 고관대작들의 목숨을 직접 거둔 것만 봐도 멸천회주는 인과를 얻는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렇게 인과를 쌓게 된다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폭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새로이 등장한 남만야수궁 같은 세력이 과율을 쌓게 만들고 이를 취하는 수단을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를 기반으로 내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무엇이 내게 가장 치명적이고, 멸천회주에게 이로운 것인가?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하고, 멸천회주가 탐낼 것은 어떤 것인가?
결론은 나와 있다.
인과다.
극악사도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강시를 만들었다 한들 멸천회주 본연의 힘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아무리 대단한 무기를 만들어낸들 그 힘은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즉, 극악사도의 움직임은 무림맹, 나아가 구파를 상대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멸천회주가 인과라는 족쇄를 푸는 것에 비하면 위험도는 한없이 떨어진다.
멸천회주의 가장 큰 힘은 멸천회주 그 자신이다.
그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과이니 결국 멸천회주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는 인과일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하자 수없이 많던 가능성과 추론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웅크리고 있는 것은 패착(敗着)이다.’
어떤 후회가 생길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최선의 수를 따라감이 옳다.
결심을 한 나는 제갈신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갈 가주님.”
“군사(軍師)입니다.”
내 부름에 제갈신무는 허리춤을 두드렸다.
그곳에는 내가 건넨 부월이 달려있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검가(劍家)에 속하는 제갈세가의 가주가 허리춤에 매달린 도끼를 자랑스럽게 내보인다.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 부월을 내린 내 마음이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군사님.”
“예, 맹주님.”
“무림맹은 웅크리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갈신무가 포권을 쥐며 허리를 숙였다.
부가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방향을 정하는 것은 무리를 이끄는 이의 소임이지 따르는 자의 소임이 아닙니다. 맹주께서 뜻을 정하셨으니 저는 그를 이루기 위한 계책(計策)을 냄이 옳지요.”
고개를 숙이고 나보다 낮은 눈높이를 하고 있음에도 제갈 가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럴 때 계책을 내는 것이 군사의 사명입니다.”
자신만만하다.
이와 같은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찌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힘을 밀집시키라 하셨기에 화산을 요새화하고 진법을 깔아놓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화산을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력 분산은 병가에서 금기시하나, 우리가 무림인임을 고려한다면 나름의 장점이 있지요. 허면…… 그렇군요. 공성계(空城計)라……. 선조의 지혜를 따르는 것도 괜찮을 성싶습니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방향이 될 것 같다.
좀 더 능동적이고 크게 영향력을 보이게 되겠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도는 분명히 커질 수밖에 없다.
어려운 길을 따를 것을 요구한 것이다.
나이에 맞지 않게 흰머리까지 나고 있는 사람에겐 좀 가혹할지도 모르겠다.
“극악사도를 비롯한 사파의 움직임을 막아주세요.”
“따르겠습니다.”
“무림맹의 피해는 최소화시켜주시고요.”
“가문의 미래처럼 살피겠습니다.”
“절대로 제가 돌아올 때까지 무림맹이 무너져선 안 됩니다.”
“군령장(軍令狀)이라도 써드리면 마음이 놓이시겠습니까?”
무리한 요구에도 제갈 가주는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믿음직한 대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만야수궁과 점창을 부수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무림맹을 잘 부탁드립니다.”
“군사 제갈신무. 맹주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포권을 쥐며 허리를 숙이는 제갈신무의 어깨로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열기가 손을 통해서 전해져왔다.
“언젠가 오늘의 이 순간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갈신무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어보였다.
***
이경천.
오래전 천마신교가 철마혈족의 손에 의해 망가져 갈 무렵 회의를 느끼고 천만대산을 빠져나온 방계혈족이다.
녹림에 숨어들어 힘을 모아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꿨고, 우연히 연이 닿은 연청운과 함께 천마신교로 돌아가 임시로나마 책임자에 올랐다.
그런 그가 너른 평원을 눈에 담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사실 이경천은 청해성이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연청운과 지나가며 딱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차라리 녹림 시절이 좋았지…….”
연청운은 입천신마존을 비롯한 천마신교 정예를 이끌고 출정하면서 이경천에게 천마신교를 관리할 것을 명했다.
천마신교는 단순한 종교단체도 무력집단도 아니다.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에 가까운 거대조직이다.
비록 천마로서는 아니지만, 이를 관리하는 자리에 앉은 이경천은 정력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문제는 천마신교의 덩치와 현재 상황이었다.
“왜 무인이 검보다 붓을 더 가까이 해야 하냐고오오오오오!!”
당연히 행정조직의 규모는 일반 무림세력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연청운이 출진할 무렵의 천마신교는 상황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천마혈족이 싸그리 날아가면서, 실무책임자들 또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 빈자리를 채워야 했고, 체계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나마 실무진들은 상당수 살아남았기에, 그들을 승진시켜 행정조직을 갖춰나갔지만, 때 이른 업무로 인해 수많은 혼란이 일었다.
사실, 사람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실수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천마가 구축해놓은 기대감은 그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오죽하면 이경천을 보며 짭천마라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이경천으로서는 억울해서 자다가 이불을 걷어찰 일이었다.
그럼에도 연청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죽어라 노력했다.
이대로 과로사하는 것이 운명이려니 여겼을 정도로 업무에 매진한 끝에 어느 정도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외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붉은 가사를 입은 자들.
서역의 라마승이었다.
그것도 그냥 라마승이 아니라 서역 무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포달랍궁의 대라마였다.
얼마 전 대종사가 죽고 그 유진을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찾아오자마자 꺼내 든 심각한 사안에 이경천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야만 했다.
그러면서 기꺼이 천마가 했던 것처럼 책임자의 자리를 떠넘겼다.
남아있는 천마신교의 전력 중 천만대산을 수호할 최소한의 전력만을 남긴 채 가용전력을 박박 긁어내 출진한 것이다.
여기에 곤륜파에도 사람을 보내 곤륜파에 남아있는 가용전력 역시 싹 끌어냈다.
이는 이경천 본인의 의도라기보단 포달랍궁 대라마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눈에서 불을 뿜어낼 듯 곤륜파를 설득해냈다.
그렇게 천마신교와 곤륜파, 포달랍궁의 연합은 청해성을 가로질렀다.
오랜만에 편안한(?) 여행을 하게 된 이경천은 갈수록 생기가 넘쳤다.
반면.
“……쿨럭쿨럭!”
대라마는 날이 갈수록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는 일이 잦았다.
이경천은 그 원인을 알았기에 안타까워할지언정 그의 행보를 말릴 수가 없었다.
함께 곤륜산을 오르던 중 우연히 대라마의 몸을 본 적이 있었다.
대라마의 심장 부근에는 이상한 것이 있었다.
고치처럼 자리를 잡은 검은 덩어리를 중심으로 검게 물든 혈관이 거미줄처럼 퍼져있었던 것이다.
이경천은 그것이 일종의 금제(禁制)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여로의 근본적인 원인과 닿아있을, 서역제일인이라 해도 무방한 대라마를 천천히 죽이고 있는 무언가다.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이에게 할 말치곤 야박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이경천으로서는 이 말이 최선이었다.
대라마는 그런 이경천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죽지는 않을 겁니다.”
‘죽지 않는다’와 ‘죽을 수 없다’.
두 말은 엄연히 다르다.
이경천의 판단으로 볼 때 대라마의 상태는 명백히 후자였다.
그 순간 이경천은 볼 수 있었다.
자신과 곤륜을 설득할 당시 보였던 대라마의 눈.
“……힘내시구려.”
그 눈은 죽어가는 자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