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29
제129화 –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문상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도산과 휴전하는 게 어때요? 아니면 이참에 아예 손을 잡거나.”
좀 황당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한바탕 싸운 후에 화해하고 사이가 오히려 돈독해지는 일도 아주 드물지는 않잖아요?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엔…….”
문상에게 무의미한 설득을 잇도록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초장에 싹을 잘랐다.
“불가하오.”
“어째서죠? 도봉 때문인가요? 하지만 그 골 빈 아이도 검룡의 술수에 놀아난 일종의 피해자잖아요? 용궁 공주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지내면서 그 아이한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나요?”
“그녀와는 상관없소. 이건 나와 도제 간의 문제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군요. 그가 이전에 오 공자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었던가요?”
“그렇소.”
나는 ‘그것도 세 번이나.’라는 뒷말은 목구멍에 가두었다.
문상이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랬군요. 어쩐지 오 공자의 도산 침공을 납득하기 어려웠는데. 단순히 내란을 부추기고 식량 조달을 방해한 처사에 대한 응징으로 여기기엔 과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도제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이 주된 원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하지만 오 공자도 참 어지간하네요. 아직 도제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그의 ‘약점’ 하나만 믿고 생사가 걸린 도박을 결행하다니. 아무리 전생이라는 비상 대책이 있다지만 너무 무모한 것 아닌가요?”
“문상도 그의 약점을 알고 있었소?”
“당연하죠. 그러나 그의 새가슴이 약점이 되게 하려면 그만큼의 무력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초절정 극상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승리는 오 공자가 이미 절대지경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방증이에요. 같은 경지에 올랐으니 이제 따라잡을 일만 남았네요. 언니와 두 달을 잡았다고 했죠? 그간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나는 한 달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럴지도.”
“문제는 그 한두 달 동안의 보신이에요.”
“…….”
“표면적으로는 오 공자가 도제를 물리친 걸로 되어있으니 오 공자는 이제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탐내는 초(超)강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금명간 창제가 오 공자를 찾아가리라는 데 손목을 걸 수도 있어요. 호승심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이니 인내심을 오래 발휘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자주 손목을 거는구려. 그가 찾아오면 내 본 실력을 보이고 만족감을 주면 그만이오. 허울뿐인 명예 따위엔 집착하지 않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오 공자 곁엔 용왕이 붙어 있잖아요. 창제는 십중팔구 검제와 동행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검제는 오 공자의 밑천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테고요. 도제도 그들과 함께 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아까 오 공자의 다음 일정이 서역행이 되리라 내다보았던 거예요. 전장에서 과실을 따면서 피신도 겸할 수 있으니. 그 판단을 할 때는 밀왕이 온전하다는 걸 몰랐잖아요.”
“그럼 어쩌면 좋겠소.”
“글쎄요, 여러 방안이 있을 테죠. 예컨대 도제와 다시 공개 비무를 벌여 그의 체면을 세워준다든가, 아니면 당분간 여기 머무르며 추이를 살핀다던가.”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걸 빤히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구려.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쇼. 어떤 묘책이 있는 거요?”
“묘책이랄 것까지는 없어요. 다만 창제와 검제의 동행을 거북하게 만들 패가 있을 것도 같아요.”
“그게 뭐요?”
“하늘을 뚫고 올라간 오 공자의 위상을 좀 끌어 내리는 거죠.”
“……?”
***
전각을 나온 나는 건곤장의 처소인 오죽채로 향했다.
여전히 찜통 속에 들어있는 듯 더웠으나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을씨년스럽던 한 시진 전과는 달리 대로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내가 도래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나온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청화라도 피워주기를 기대했지만 한 오라기의 아지랑이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공중으로 비상한 후 곧장 대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건곤장은 마당에 나와 있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자기 면전에 떨어져 내리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게나, 천룡. 아니, 요즘은 마선이라 불린다지? 자네 스스로 붙였다고 들었네만 고금제일인에겐 너무 소박한 별호가 아닌가.”
나는 건곤장이 내미는 팔뚝을 마주 잡았다.
“오랜만이오. 별고 없으셨소?”
“밥만 축내는 늙은이가 별고 같은 게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도 아닐세.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일세. 그동안 자네는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까마득한 곳으로 올라가 버렸구먼. 이 하잘것없는 늙은이를 보러 땅에 내려와 주다니, 영광일세.”
“노인장이 이처럼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인 줄 미처 몰랐소. 좀 불편하오.”
“허허, 미안하네. 주책을 부렸구먼. 하지만 진심이라네.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어 감사할 따름일세.”
나도 건곤장에게 감사했다.
그는 내게 은인이나 진배없었다. 서역의 전장에서 극한의 적화를 얻었다면 청화의 극대치는 그와의 비무에서 경험했다.
더욱이 그는 내 공수의 요체를 선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일군 최상의 절초인 일지관천지와 엷은 막을 여러 겹 두르는 방식으로 강화한 새로운 기방은 전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단순히 이따금 얼굴을 비추는 것 말고 진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방문 목적으로 직행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구려. 늦어도 두 달 안에 노인장을 꺼내주겠소.”
“갑자기 무슨 소린가? 꺼내주겠다니?”
“여기서 나가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겠단 말이오.”
“…….”
“문상과 합의를 보았소. 내가 무후와 대등한 무위에 도달하면 전날 그녀와 노인장이 맺었던 금약을 해제해 주겠다고. 문상이 보장했으니 이미 실현된 거나 마찬가지요.”
건곤장이 백미를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먼. 주군과 대등한 무위라니? 그거라면 이미 이루지 않았는가? 아니, 그 이상이 아닌가? 주군과 같은 반열에 있는 도제를 꺾었으니…….”
“실은 다른 사정이 있소. 나는 순수한 무력으로 그를 물리친 게 아니었소.”
“…….”
내게서 진상을 들은 건곤장의 뺨이 뻣뻣해졌다.
“허어, 천하의 도제가 그런 겁쟁이였다니. 전날 자네에게 그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떠들었던 게 쑥스럽구먼. 그나저나 두 달이면 주군과 필적할 무위에 이를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럴 테지?”
“여러 변수가 있어 확약할 수는 없지만 노인장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참이오.”
건곤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마우이.”
나는 눈물을 떨구기 직전인 건곤장을 다독였다. 진정성이 통했는지 그가 울음 대신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요새는 자네 소식을 듣는 게 낙이었다네. 마원에서 천지개벽할 변화를 일으키며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자네를 거들고 싶었다네. 하지만 이 뇌옥 아닌 뇌옥을 나갈 수 없었더랬지. 허어, 이런 날이 오다니, 꿈만 같구먼. 고마우이. 참으로 고마우이.”
나는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노인이 선사한 푸른 불꽃을 뿌듯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하동에 당도했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양 관주는 깨어있었다. 보아하니 밤새워 일한 모양이었다. 도산의 봉쇄가 풀린 후부터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몸을 돌보면서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다 골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오. 우선 눈부터 좀 붙이구려.”
내 말에 양 관주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어떻게 쉬나요? 그리고 내 걱정은 말아요. 이래봬도 제법 근골이 튼실하답니다.”
“그러지 말고…….”
“정말 괜찮다니까요. 사실 너무 신이 나서 힘든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업무를 분담해줄 동지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으니 며칠 후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갑자기 생각나 물었다.
“그이들도 들어왔소?”
양 관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직요.”
나와 양 관주는 조만간 석진과 한월노모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도산에서의 일로 온 천하가 들썩거리고 있는 마당이니 어디에 은신해 있든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마원의 안전지대가 확보된 상황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소문을 듣자마자 무조건 나를 찾아올 거라 보았다. 그런데 도산 대첩 이후 엿새나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불안감이 움트지 않을 수 없었다.
양 관주가 나를 위무했다.
“석 대인은 막무가내인 듯싶지만 의외로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에요. 도산과 검림의 눈을 피해 꽁꽁 숨기로 작정했다면 기가 막힌 곳을 찾았을 거예요. 그래서 아직 낭보를 접하지 못한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오 공자의 안위가 궁금해서라도 가끔 바깥 사정을 알아보려고 나올 테니까 조만간 연락이 올 거예요. 어쩌면 내일이나 모레 불쑥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더라도 나를 보기는 어렵겠구려. 오늘 중으로 반도들을 처리한 후 바로 떠날 작정이니.”
“어디로요?”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소.”
이유를 짐작할 터이기에 양 관주는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알겠어요. 참, 가기 전에 만나야 할 분이 있어요.”
“……?”
“어젯밤에 귀빈이 왔어요.”
“귀빈이라니?”
“보면 알 거예요. 해가 밝는 대로 모셔 올 테니 시간을 좀 내줘요. 잘하겠지만 정중히 대해주길 바라요. 알고 보니 나하고도 인연이 있던 분이더라고요.”
양 관주는 끝내 귀빈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별실을 나갔다.
***
방으로 쭈뼛쭈뼛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나는 당혹스러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알현을 허락해주셔서 만대의 영광이옵니다.”
촉새처럼 생긴 민머리 노인이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전날엔 실례가 많았사옵니다. 저는 공자께서 그토록 엄청난 분인 줄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헌데 상상도 못 할 만큼 어마어마한 위명을 지닌 분이셨더군요. 게다가 이번엔 도제까지 물리치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옵니다.”
나는 노인의 말투가 사뭇 부담스러웠다. 그의 태도는 한 달 보름 전 천벽의 천왕전에서 보았을 때와 너무 달랐다.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전형적인 아첨꾼의 모습이었다.
썩 호감 가는 언행이 아니었지만 양 관주의 당부도 있고 해서 나는 부드러운 음성을 내보냈다.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들었소. 감사하오.”
“아이고, 감사라니, 거두어주시옵소서.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전날의 귀한 인연에 보답코자 작은 성의를 보였을 뿐이옵니다.”
나는 실소했다. 쌀 삼천 섬이라면 작은 성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컸다. 아무리 갑부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쾌척하는 건 쉽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향후에 들어올 이득을 염두에 두고 베푼 호의였겠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가짐을 바로잡았다.
양 관주와 별개로 목전의 노인은 내게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였다. 천벽에서도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적잖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역의 대륙을 하릴없이 헤매다 밀왕에게 걸려 비명횡사했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민머리 노인이 요란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러지 마시옵소서. 소인, 감당치 못하옵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그럭저럭 예의를 보였으니 노인과의 면담을 끝내려던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게 남았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두 가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