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42
제142화 – 또 왜 이래?
장원은 십자무련과 마원 사이의 중립지대에 자리한 도시였다.
교통의 요지로 사흘 전 용왕과 비무를 벌였던 송주와 여러모로 흡사한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다만 규모는 송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원의 인구는 오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보양보다도 작았다.
나는 하동으로 돌아가기 전 장원에서 용왕과 다시 공개 비무를 할 작정이었다. 그럼으로써 그와의 비무가 계속 청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확인할 작정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개세팔천의 무위에 도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매일 장소를 옮겨가며 용왕과 비무행을 벌이면 천지조화지경에 이르는 데 필요한 건기(乾氣)를 단기간에 충족할 수 있을 터였다.
그에 상응하는 곤기(坤氣)의 체화에 대해서도 복안이 있었다. 문상의 협조였다.
그녀는 제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원한을 갚고자 하는 이들을 수만 명 모아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불러일으킬 적화는 서역의 전장에서 취득한 양에 못지않을 터였다.
나는 장원의 번화가에 면한 광장에서 용왕과 일백 초 공방전을 벌였다.
급조한 것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숫자의 관중이 모였고 분위기도 열광적이었지만 그들이 피워 올린 청화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용왕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없음을 확인한 나는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내 심기를 일전했다.
창제의 초대일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있었고 무후와 약속한 날짜는 그보다 보름 후였다. 그 기간 안에 신선이 되기는 어려울지라도 그들과 대등한 무위에 도달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터였다. 구 단계의 절반만 통과해도 그 시기의 선력에 준하는 마력을 끌어내어 무력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문상과 무관하게 건곤기를 확충할 대안들을 갖고 있었다.
***
해가 지고 태화강을 넘은 직후 용왕이 재비무를 요청했다.
“다시 해 봄세. 이번엔 시늉만 하지 말고 제대로.”
용왕의 표정과 음성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낮에 장원에서 치렀던 비무에서 그는 내 무력이 사흘 새 증강되었음을 감지했음이 틀림없었다. 힘을 조절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그의 안목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그럽시다.”
내가 동의하자마자 용왕이 선공해왔다. 십지에서 지공을 쏘아내 그의 장공을 맞받아치며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쏟았다. 경악성을 내지르더니 용왕도 강도를 올렸다.
쌍방 최강으로 부딪치자 내 열세가 뚜렷해졌다. 하지만 나는 오십 초 이상 그와 어울렸다. 생사투였다고 해도 삼십 초는 버텼을 듯싶었다.
나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고서야 용왕이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마치 패배한 사람처럼 죽상이 되었다.
“허어, 참으로 기절초풍할 노릇이군. 전날 칼리에서 자네는 내 십초지적도 되지 못했네. 내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삼 초에 끝낼 수도 있었을 걸세. 그런데 한 달도 안 돼 내 턱 밑까지 올라오다니. 이러다가 며칠 후엔 내 위에 설지도 모르겠구먼.”
“용왕의 도움이 컸소. 고맙소.”
진심이었다.
용왕은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두 번이나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칼리에서는 적화를, 그리고 송주에서는 청화를 선사하면서. 그가 없었다면 나는 먼 길을 돌아갔어야 할뿐더러 어쩌면 때를 놓쳐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었다.
내 말을 곡해한 용왕이 멋쩍게 웃었다.
“도움이랄 게 뭐 있는가. 그저 자네 무공을 받아준 것뿐인데. 다시 한번 말하네만 참으로 경이로우이. 무림이 태동한 이래 자네처럼 단기간에 무위가 수직 상승한 이는 아무도 없을 걸세. 앞으로도 다시 나오지 않을 테고. 자넨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절대무존(絶對武尊)이 될 터, 그 지고한 자리에 오르더라도 내 딸아이를 버리지 말게나.”
용왕의 집요함에 쓴웃음이 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만 갑시다. 다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왕은 아르를 주제 삼아 더 말을 섞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나는 바로 몸을 날렸다. 용왕이 마지못해 나를 쫓았다.
***
모두들 나와 용왕의 무사 귀환을 빌며 노심초사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하동에 도착해보니 각자의 일에 바빠 우리는 신경도 안 썼던 모양이었다. 겨우 짬을 낸 양 관주가 나를 만나러 우리가 본부로 사용하는 전각의 밀실에 왔다.
“어떻게 됐나요? 어제 도산에 갔다는 전갈은 받았는데.”
“벌써 연락망을 완성했소?”
“아직은 육처에만 전서구가 오갈 수 있어요. 외부 소식은 우선은 서릉의 소흥상단에서 받아요. 나중에 체계가 잡히면 대처들과 직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일은 잘 풀렸나요? 두 분이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그랬을 듯싶지만.”
나는 이번 출정의 성과를 양 관주에게 설명했다. 다 듣고 난 그녀의 이마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위협은 해소되지 않았네요.”
나는 양 관주의 평가에 동의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검제든 도제든 한 명은 처리해야 했다. 검제에겐 다소 양보를 받아내고 도제는 발을 묶었지만 그들이 합세하면 여전히 우리 쪽이 약간이나마 열세였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제 도제를 무력적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터이기에 위급한 국면은 아니었다.
다만 창제가 변수였다. 그가 그들에게 붙으면 나도 무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문자 그대로 천하대란이 일어날 터였다.
나는 불안해하는 양 관주를 안심시켰다.
“검제의 태도를 보건대 당분간은 별문제가 없을 듯싶소. 그리고 시간은 내 편이니 너무 염려 말구려.”
양 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표시일지 아니면 내 낙관에 대한 핀잔인지 헷갈렸다.
“그래요. 단주만 믿어요.”
전날 하동을 떠나기 전 합의했으나 나는 양 관주의 새 호칭이 낯설었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참! 깜빡했네요. 그제 신입단원들이 들어왔어요.”
“신입단원들? 누군데 그리……, 아! 석 형하고 노모가 왔군.”
양 관주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제 발로 찾아왔더라고요.”
“지금 어디들 있소?”
“원포에 보냈어요. 워낙 처처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지라 한 손이라도 보태야 하거든요. 둘 다 고수이니 쓸모가 많아요. 하지만 나가는 대로 전서구를 날릴게요.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올 거예요. 단주를 보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왔답디까?”
“석 대인의 지인이 별장을 제공했대요. 위치는 비밀이라고 나한테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나는 퍼뜩 살막이 떠올랐다.
“별장이라곤 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곳이었나 봐요. 닷새 전에야 단주 소식을 듣고는 은신처에서 나와 곧장 이리로 달려왔다는군요. 무지하게 무리했던지 오자마자 탈진해 쓰러져서는 반나절 후에야 일어났지 뭐예요.”
“그런 이들을 일하러 내보냈소?”
“자기들이 자원했어요. 뭐라도 거들게 해달라면서. 일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지요. 하지만 단주가 돌아오는 대로 알려주기로 했어요.”
나는 석진과 한월노모의 얼굴들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죽마고우들을 떠올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그나저나 다들 어디로 갔소? 아르도 하동 밖으로 내보냈소? 나우는 중원 유람에 나섰소? 길잡이는 붙여주었소?”
“용궁 공주는 하동 외곽의 산악지대에 산재한 잡마류의 반도들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어요. 서역의 아가씨는 마원을 떠돌고 있고요.”
“무슨 말이오? 마원을 떠돌다니?”
“알고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나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전문가 중의 전문가예요. 조직 관리며 정보망 구축이며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방면의 전권을 주었어요. 그녀 덕분에 나는 양곡 수급과 가옥 건립 및 도로 건설, 그리고 인사와 체제 안정 등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무튼 엄청난 인재를 얻었어요.”
“나우는 길어도 두 달 후엔 서역으로 돌아가야 하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최대한 빼먹으려고요. 그리고 그녀 옆에 상운의 문통 넷을 붙여놓았어요. 그녀를 보필하며 보고 배우라고요.”
“잘했소.”
***
나우가 능력을 인정받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니 괜히 흐뭇했다.
양 관주의 현황 보고를 얼마간 듣다가 그녀에게 부탁해 두었던 두 가지 사안을 점검하려던 나는 귀가 곤두섰다.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양 관주가 당혹감을 담은 시선을 던졌다.
“잠깐 나가봐야겠소.”
“무슨 일이죠?”
“손님이 온 것 같소.”
“어떤 손님이요?”
“내 누이요.”
“네?”
나는 양 관주의 놀람을 뒤로 하고 밀실을 나갔다. 그러고는 전각을 나와 소란이 날아오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동 어귀에서 수십 명의 현마류 마인들이 작은 체구의 여인을 포위하고 있었다.
“글쎄, 나는 너희들 두목의 연인이라고. 그러니 썩 비켜. 다리몽둥이들 부러뜨리기 전에.”
“정의단의 표식을 달지 않은 무인은 이곳에 들 수 없다. 마지막 경고다. 순순히 혈도를 내주지 않으면 제압할 테다. 어서 양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라. 그러면 다치지는…….”
“풋, 다쳐? 선의 졸개들이라 봐주려고 했더니 매를 버네. 어디 덤벼봐. 니들이 자초한 일이니 나중에 이 누나를 원망……, 선!”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발견한 안진이 폴짝폴짝 뛰었다. 내가 그녀 옆에 내려서자 마인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그들 중 뺨에서 목까지 이어진 흉터가 있는 마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정의단 현마대 순찰 삼조가 마종을 뵙습니다.”
나는 내게 달라붙은 안진을 떼어내며 흉터 마인에게 답했다.
“수고들 많소. 이 여인은 내 친인이니 그만 물러들 가구려.”
“존명!”
이구동성으로 복창한 마인들이 장내를 떠났다. 그러자 방금 전 떼놓았던 안진이 다시 나를 안으려 들었다. 나는 이번엔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같이 껴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화들짝 놀란 안진이 내게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이 변태!”
나는 그저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났다.
안진은 큰 변화가 없었다.
넉 달 새 짧았던 머리가 길어져 목덜미를 가리고 어깨까지 닿았지만 선머슴 같은 인상은 그대로였다. 얼핏 보면 여전히 미소년 같았다.
“몇 달 못 본 새 못된 버릇이 생겼군. 설마 다른 여자들한테도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닐 테지? 그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안진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앙증맞았다.
“왜 답이 없어? 너 진짜…….”
나는 안진의 말을 막았다.
“잘 왔다, 진아.”
안진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안진이 놀란 이유가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인지 아니면 말을 놓았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전자일 듯싶었다. 아니면 둘 다거나.
내가 노인네를 제외한 사람에게 반말을 한 건 무려 십육 년 만의 일이었다.
노인네와 함께 천하 주유에 나설 무렵 나는 만인에게 공대할 것을 강권하는 그에게 반발해 아무에게나 반말로 대했다. 스무날 가까이 말투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우리는 ‘평대’로 타협을 봤다. 나는 존대를 거부하는 대신 천지조화지경에 들 때까진 코흘리개 아이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겠다고 노인네와 약속했다. 그리고 오늘 그 약속을 깬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이에게 ‘이랬소, 저랬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묵묵부답하자 안진이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잔뜩 인상을 썼다.
“너 왜 그래 선? 장난치지 마. 너무 놀라서 간 떨어질 뻔했잖아.”
이 정도에 간이 철렁하면 어떡하니, 동생아. 정말 놀랄 일은 이제부터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안진에게 성큼 다가섰다.
“뭐 하는 거야? 또 왜 이래?”
안진이 뒷걸음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