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2
제42화 – 그날이 언제요?
자시였다.
해가 매일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나는 자시엔 운공에 들어야 했다. 그것은 세 살 때 건곤지공에 입문하고 삼 년여의 시행착오를 거쳐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을 찾은 후 여섯 살 때부터 십오 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강철 같은 규율이었다.
물론 단 하루도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해와 달리 나는 여러 차례 자시 운공을 빼먹었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열 번을 초과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에나, 예를 들어 독사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든가 소년기의 어느 날 갑자기 만사가 허무해져 운공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때나 자시 운공을 건너뛰었다. 그 외에는 거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사지가 부러지고 그가 내 심혼에 공포를 심었을 때도 자시가 오면 어김없이 운공에 들었다.
그토록 철저하게 자시 운공을 지킨 까닭은 그것이 내 성장의 토대인 데다 어기면 급격한 퇴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피 같은 적공이 뭉텅이로 빠져나간 걸 확인한 후부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닌 한 자시 운공을 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준수했다. 기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자시에 운공에 들지 않으면 적공의 손실만 겪는 게 아니었다.
심신 모두가 후유증에 시달렸다. 며칠간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고 몸은 만근의 철근을 짊어진 듯 무거워졌다.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설명이 길었으나 위기는 찰나였다.
나는 둔해진 몸을 움직이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그러고는 간신히 선령이 알리는 유일한 활로인 바닥으로 엎드렸다. 그러면서 무영도수의 다음 칼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임을 예감했다.
땅에 배가 닿기 직전 갈등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속에 봉인된 마정을 깨뜨려 마력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시급히 선정을 분리해 전생할 육신을 찾아 산하를 떠돌 것인가.
둘 다 내키지 않았지만 둘 중 하나는 택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속절없이 염왕을 알현하게 될 터였다.
노인네에겐 미안하지만 적들을 짓이기고픈 갈망에 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운 순간 나는 결단을 보류했다. 선령의 통찰안에 이상한 광경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
엎어졌던 나는 천근만근인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켰다. 쓰러진 나를 치지 않고 칼을 거둔 무영도수에게 창천검이 항의성 호명을 했다.
“총수! 어째서…….”
창천검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무영도수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공격을 멈춘 이유를 밝혔다.
“오십 초가 지났다.”
하아, 그걸 헤아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가.
창천검이 다시 무영도수를 불렀다.
“총수! 그자는 아량을 베풀 상대가 아니오. 지금 놓아주면……, 반드시 잡아야 하오. 자고로 물고기는, 아니 새끼 늑대는 더 크기 전에…….”
무영도수가 손을 들어 창천검의 횡설수설을 막았다.
“네가 바란 대로 오십 초를 주었으니 이제 내가 오십 초를 가질 것이다.”
결국 제 체면 때문에 잠시 처형을 미뤘다는 소리였다. 말귀를 알아들은 창천검이 노골적으로 반색했다. 그러나 내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거 고맙구려. 하지만 나머지 오십 초는 며칠 후에 잇는 게 어떻겠소?”
“무슨 개소리냐, 이놈!”
나는 창천검의 말을 묵살하고 무영도수를 직시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금일 오전 운양호에서 십전공자와 혈투를 벌였소. 그 전부터 작은 내-외상을 안고 있었는데 그 대결로 인해 부상이 도졌소. 그러니 내게 회복할 시간을 주시오. 그런 연후 제대로 붙어봅시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또 창천검이 끼어들었다.
“그래 놓고 내뺄 속셈임을 모를 줄 아느냐?”
저 늙은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촐싹대지? 시정잡배만도 못한 위인 같으니.
창천검을 일별하며 나는 경멸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기특했다.
“몸을 사릴 요량이었으면 애당초 보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소. 닷새. 아니, 나흘만 주시오. 나흘 후 정오 보양 부흥로 광장에서 정식으로 겨뤄봅시다. 그날 오십 초를 받아주겠소.”
“헛소리! 장담컨대 네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
무영도수가 창천검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약속하겠느냐?”
창천검이 소리쳤다.
“총수! 저놈의 말을 어떻게 믿고…….”
“그만하게, 대진. 자꾸 내 말을 막고 나서면 아무리 자네라도 참지 않을 걸세.”
창천검이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소했다.
“물론이오. 공공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리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나흘 후 당신의 칼을 받으러 나가겠소.”
무영도수가 느닷없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네가 보증하겠느냐?”
모두의 시선이 무영도수의 눈길을 쫓았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말똥말똥한 얼굴의 안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와 무영도수, 그리고 창천검의 대화를 다 들었을 터임에도 그녀가 시치미를 뗐다.
“나더러 뭘 보증하라는 거야?”
안진의 말투에 모두들 뒤집어졌다. 나는 감탄했다. 이제 보니 나보다 더한 여자였군.
“너희가 뭘 하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냐. 그러니 죽을 쑤건 밥을 태우건 나를 끌어들이지 마.”
창천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허어, 미친년이었군. 사부란 작자를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헉!”
말하다 말고 창천검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칠팔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운 안진의 신형이 내 면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실로 놀라운 이형환위였다.
내 코앞에서 고개를 발딱 치켜든 안진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너, 설마 내 사부를 판 거야? 죽으려고 작정했어? 사부가 알면…….”
“별소리 안 했소. 당신 사부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밖엔. 내가 저이와 싸우는 도중 저치들이 당신을 건드리면 곤란하잖소?”
“그래도 사부를 들먹이면 어떡해? 금기를 어겼다고 노발대발할 텐데. 사내가 그렇게 입이 싸서…….”
“아, 제길. 그럼 집중수행을 하지 말든가. 아니면 당신 집에 가서 하든가. 나한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는 보호를 부탁해 놓고…….”
“알았어. 이번은 특별히 눈감아 줄게. 하지만 앞으론 조심해. 참,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 거머리? 뚫린 입이라고…….”
“우리 시비는 나중에 가립시다. 선객이 있잖소?”
나는 씩씩거리는 안진 너머로 무영도수를 보았다.
“이 여인의 보증은 필요 없소. 약속을 지킬 터이니 나를 믿어주구려.”
안진이 현시한 신법에 충격이 컸는지 창천검은 어깃장을 놓지 못했다. 무영도수 또한 그녀의 반말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그날 보겠다.”
그 말만 남기고 무영도수가 단애로 솟아올랐다. 창천검을 비롯한 정검문의 검사들이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이 절벽 위로 사라지기 전에 소리쳐 물었다.
“내 친인들은 어떡할 거요?”
아무도 답변을 내려보내지 않았다.
***
염려했던 것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자시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빨리 정리가 된 덕분에 아주 지체하지는 않았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워낙 체화해야 할 선력이 많은지라 운공을 마쳤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너무 늦게 끝냈다며 신경질을 내더니 안진이 집중수행에 들어갔다. 나는 실혼인처럼 변한 그녀를 안아 들고 보양으로 돌아갔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인질로 잡혔던 이들이 모두 풀려나 있었다.
나는 내 거처로 배정된 소운당에서 양 관주와 독대했다. 석진과 한월노모는 주연객잔에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중이고 주태는 백화루에 있을 거라 했다.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요. 그제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수로 그 꼬장꼬장한 위인을 구워삶았나요?”
나는 무영도수와 치렀던 일전과 그 후의 협상에 대해 양 관주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면 재대결까지 딱 사흘 남았네요. 어때요? 이번에도 그의 오십 초를 견딜 자신이 있나요? 관전하는 눈들이 많으니 본인의 위신 때문에라도 무영도수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거예요.”
어인 일인지 양 관주는 평소와 달리 불안감을 내비치지 않고 평온한 신색이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오십 초가 아니라 오백 초를 주어도 그는 나를 어쩌지 못할 거요.”
내 광오한 말에도 양 관주는 한숨을 내쉬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오 공자가 그렇다면 그럴 테지요.”
양 관주의 미소에 호응해 웃음을 머금으며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 가지 부탁이 있소.”
“뭔가요?”
“하나는 보양 인근에서 악도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을 찾아 한 자리에 모아달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나와 무영도수의 비무에 관해 천하에 소문을 내달라는 거요.”
휴우, 양 관주가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 와중에도 협행을 하려고요? 주제넘은 참견이지만 중대한 결전을 앞두고 있으니 준비에 전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무영도수는 단단히 벼르고 나올 거예요. 더욱이 소문이 나서 외지에서 호사가들이 잔뜩 몰려들면 그들을 의식해서라도 최강으로 나올 게 틀림없어요. 굳이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요?”
현명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맞지 않는 조언이었다.
귀면수라와 양천 건으로 망외의 소득을 올렸지만 문제점도 상당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바는 건곤기의 불균형이었다. 전과는 반대로 이번엔 청화가 적화를 훨씬 상회했다.
나는 그 부족분을 원사의 청취로 메울 작정이었다.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을 터이기에 불균형을 완벽하게 해소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는 보완이 될 거라 보았다.
양천 건은 차치하더라도 귀면수라 건으로 얻은 적화와 청화만 오롯이 선력으로 전환하더라도 능히 무영도수를 대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에 약간만 더 보태면 우세를 점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흘은 다소 빡빡했지만 막막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무영도수와의 일전을 소문내라는 건 당연히 전리품을 노린 조치였다.
그와의 승부를 앞두고 군중이 뿜어내는 열기는 활화산 같은 청화를 일으킬 터였다. 운양호에서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백의 원사를 처리했을 때와 맞먹는 양이었다. 단 하루에, 아니 고작 일다경만에 수년 치의 적공을 얻게 될 터인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어제는 무영도수의 무력에 밀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사흘 후엔 내가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될 터였다. 단순한 설욕을 넘어 막대한 전리품까지 챙길 수 있으니 나로서는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
양 관주에게 자세한 내막을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신속히 내 부탁을 이행해주기를 당부했다.
가벼운 사담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석진을 찾아가 보려는데 양 관주가 기습적인 선물을 주었다.
“고마워요, 오 공자. 구명지은을 입었어요.”
상단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청화에 흐뭇해하며 나도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양 관주의 정인에 관해 들려주겠소? 생명의 은인이 되었으니 이제 그만한 자격을 갖춘 듯싶소만.”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양 관주가 도리질을 했다.
“그렇게 입단속을 했거늘.”
“그를 탓하지 말구려. 내가 애먼 질문을 쏟아내는 바람에 양 관주를 변호하려다 얼떨결에 발설한 거니까. 뭐, 발설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소. 그저 자기가 존경하는 이라고만 하더이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양 관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직 때가 안 됐어요. 그날이 오면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말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줘요.”
“그날이 언제요?”
양 관주의 답이 나를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