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3
제43화 – 이유가 뭐요?
석진과 한월노모를 찾기 전에 백화루에 들러 주태를 보았다.
몸은 멀쩡해 보였으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주태는 그새 홀쭉해진 느낌이었다. 그렇더라도 얼굴만 그럴 뿐 배는 여전히 작은 동산을 품은 듯 불룩했다.
나는 나 때문에 고초를 겪은 주태를 위무한 후 양 관주에게 주었던 것들과는 별개의 임무를 맡기고는 주연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객잔에 당도하기 전부터 석진의 걸걸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벌써 취했는지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짐작대로 너른 객잔을 독차지하고 술판을 벌이고 있던 두 사람이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한월노모를 밀친 석진이 식탁들을 마구 쓰러뜨리며 우당탕탕 내게로 달려왔다.
“어서 오게, 아우님. 그 멋진 용안이 나타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네.”
“언제부터 내가 당신 아우가 됐소?”
“하하, 이제부터 그러면 되잖은가. 어디 형님이라고 불러보게나.”
“싫소.”
“삐딱하긴. 그러면 석 형으로 타협을 보세나.”
“그것도 싫소.”
석진이 버럭 화를 냈다.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동고동락한 전우에게 그 정도 배려도 못 해주는가?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
정말 열이 받은 듯 벌겋던 석진의 면상이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으로 돌아왔다. 내공으로 주정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뒤늦게 몸을 추스르고 달려온 한월노모가 석진을 타박했다.
“누구더러 밴댕이래, 이 색골이. 이 아이가 우리를 내팽개치고 안 돌아올 거라는 데 목을 걸었으면서.”
석진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모함을. 나는 어디까지나 아우님이 현명한 처신을 해 줄 것을 바라는 기원을 담아…….”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이 색골아. 내가 듣고 돼지가 듣고 그 빤빤한 년도 들었는데 어디서 흰소리를. 이 아이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저버렸다며 제멋대로 단정하고는 이틀 내내 원망을 바가지로 퍼붓지 않았더냐?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닥쳐라, 할망구! 듣자 듣자 하니까…….”
“뭐? 할망구? 개소리가 풍년이더니 아예 복날의 개마냥 정신 줄을 놓았구나. 그래, 오늘 한 번 제대로 맞아봐라, 이 색골아.”
휘웅.
한월노모의 철장이 허공을 갈랐다. 석진은 몸을 젖혀 피하지 않고 팔뚝으로 쇠 지팡이를 막아냈다.
나는 두 사람이 난타전을 벌이기 전에 개입했다. 내가 석진의 손을 붙들자 한월노모가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는 석진을 노려보며 물었다.
“누가 이랬소?”
석진이 히죽 웃으며 반문했다.
“누가 그랬을 것 같은가?”
충분한 답변이었다.
우리는 탁자에 둘러앉았다.
석진의 눈빛과 음성이 진지해졌다.
“어떻게 우리를 빼냈는가? 아니, 그 전에 자넨 무슨 수로 그 칼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가?”
나는 자꾸 엄지만 빼고 모든 손가락들이 사라진 석진의 오른손으로 눈길이 갔다. 그러자 석진이 슬그머니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내가 오십 초를 버티면 인질들을 풀어주기로 그와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소.”
한월노모가 탄성을 내질렀다.
“굉장하구나, 아이야. 나라면 그자의 일초도 받아내지 못할 텐데.”
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자네 실력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네만, 아무리 자네라도 그 인간한테 오십 초는 무리일 텐데. 솔직히 십 초도 버거울 성싶으이. 대체 그 냉혹한 인간이 어째서 자네를 봐줬을까?”
“봐주긴.”
“그럼 그가 제대로 칼을 부렸단 말인가?”
“그렇소.”
“그럴 리가 없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사흘 후에 직접 확인해 보구려.”
“무슨 소린가?”
“사흘 후 정오에 다시 오십 초를 겨루기로 했소. 여기 보양에서.”
“정말인가?”
“그렇소.”
석진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이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서 튀어야지. 무슨 연유로 자네를 놓아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냉혈한은 이번엔 절대로 자네를 봐주지 않을 걸세.”
나는 나를 일으키려는 석진을 잡아당겼다.
“설레발치지 말고 앉으쇼. 뚜껑을 열기 전에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지 않소? 혹시 아오? 내가 오십 초를 버틸뿐더러 그의 칼을 부러뜨릴지.”
석진이 고리눈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무슨 뒷거래를 한 건가? 혹시 그가 자네 낯짝을 보고 반해서 잠자리를…….”
“아, 진짜! 적당히 하쇼.”
“그렇다면 정말로 그의 칼을 오십 초나 받아낼 수 있을 거란 말인가?”
“글쎄, 그럴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고. 가 봐야 알겠소.”
석진이 정색했다.
“만약 그날 자네가 그런 기적을 일으키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걸세. 자네 나이에 초절정 극상의 강호와 대등하게 맞선다는 건 젊은 날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제치고 천하십대고수에 들었던 창제(槍帝)라도 쉽지 않았을 일일세.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네는 개세팔천을 능가하는 기재로 인정받게 될 터, 이는 곧 고금제일인의 반열에 오를 것임을…….”
“그쯤 하쇼. 그보다 대충 마셨으면 그만 나갑시다.”
“어딜?”
“두 분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
나는 석진과 한월노모를 부려 먹었다.
연신 구시렁대면서도 석진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보양 인근을 오가며 내게 원사를 털어놓는 이들의 원수들을 잡아 왔다. 주태가 물색한 고객들의 제물들은 한월노모에게 맡겼다. 둘이 부지런을 떤 덕분에 그날만 삼십 건이 넘는 원사를 처리했다.
아직 부족한 적화를 채우기엔 꽤 모자랐지만 무영도수와 재회할 때까진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듯싶었다.
내가 주태의 창고에서 진종일 원사를 청취하는 동안 안진은 그 옆의 와옥에서 주근깨가 돌보았다. 내 청에 의해 주근깨는 당분간 기루의 일을 접고 안진을 전담하기로 했다. 안진은 다른 사람에겐 곁을 내주지 않았으나 희한하게도 주근깨는 잘 따랐다. 그렇더라도 두 시진마다 한 번은 내 얼굴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했다.
이틀 내내 창고에 틀어박혀 적화의 확충에 여념이 없던 나는 마지막 운공에 들기 전 안진에게 해가 뜨면 바로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정오 전까지 새로이 체화된 선력을 원활히 부릴 연습을 해둘 참이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일출과 동시에 수련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뜻밖의 방문객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석진과 함께 산등성이를 넘어온 인물을 본 나는 어리둥절했다. 저 친구가 여긴 웬일이지?
“마침 일어나 있었군, 아우님. 귀하디귀한 손님이 자넬 찾아왔기에 이 우형이 몸소 안내해왔다네.”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사내, 양천이 내게 포권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오.”
“벌써 도전할 채비를 마친 거요?”
양천이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니라 석진에게 말을 건넸다.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석 대인.”
감사 인사로 포장된 축객령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었을 터임에도 석진은 버텼다.
“잘 모르나 본데 아우님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아우님이 있다네. 그리고 자네도 나와 아주 남남은 아니지 않은가. 예전만큼의 결속력은 없지만 오대세가는 원래 한통속이 아닌가 말이지. 비록 가문에서 쫓겨났으나 나도 한때는 어엿한 조양 석가의 일원이었네. 한 번 석가는 영원한 석가라는 말 들어보았나?
내가 자네에겐 숙부뻘이 될 걸세. 아니, 백부가 되려나? 아무튼 길잡이 노릇까지 해 준 가문의 존장에게 일이 끝났으니 꺼지라는 것은 무례함을 넘어 아랫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선전포고에 다름 아닐세. 남이 아니니 이번은 그냥 넘어갈 테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묵과하지 않을 걸세.”
석진의 장광설에 질린 양천이 항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석 대인. 여의공자와 긴히 할 얘기가 있어 급한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청컨대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석진이 양천의 등을 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같은 식구끼리 용서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자네 속을 잠시 떠봤을 뿐일세. 이 노형은 이만 물러갈 터이니 젊은 용들끼리 편하게 어울려보게나. 하지만 자넨 이따가 나하고 필히 대작해야 하네. 듣자 하니 열 말의 독주를 마시고도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꼭 확인해봐야겠네.”
“알겠습니다. 양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석 대인.”
“석 형.”
“네?”
“대인이 아니라 형이라니까. 어디 석 형이라고 불러보게나, 현제.”
“…….”
“싫은가? 그럼 나도 퇴장을 취소해야겠네.”
“아닙니다, 석 형.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하하, 자넨 누구와 다르게 말이 통하는 친구구먼. 역시 십전의 이름을 가질 만해.”
찰싹!
양천의 어깨를 소리 나게 후려친 석진이 멀쩡한 왼손을 흔들며 산등성이로 몸을 날렸다.
석진이 사라지자 나는 애초의 질문을 반복했다.
“나와 붙으려고 온 거요?”
양천의 입가에 다시 쓴웃음이 걸렸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하오.”
“그럼 왜 왔소?”
양천이 대답을 미루고 내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여인은 어찌 된 일이오?”
나는 운공을 마친 나와 교대해 집중수행에 든 안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한 눈빛에 입을 헤 벌린 양이 양천의 눈에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소. 별 탈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었으나 양천은 더 이상 안진에 대해 묻지 않고 나에게 집중했다. 그러고는 뒤늦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귀하를 초청하고 싶소. 사람을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닌듯하여 이렇게 직접 찾아왔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초청이라니?”
“나와 함께 공주로 가잔 말이오. 가문의 어른들껜 아직 말씀을 올리지 않았지만 다들 귀하를 반기실 거요.”
양천의 의도를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일단 수락하기로 했다.
“그럽시다. 하지만 한 며칠 기다려주어야겠소. 할 일들이 있으니.”
양천이 별안간 눈에 힘을 주었다.
“안 되오. 당장 가야 하오.”
어라? 이건 무슨 수작이지?
아니, 그보다 이게 무슨 조화지? 어째서 청화가 피어오르는 거지?
나는 단박에 양천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이해 불가였다.
“나더러 무영도수와 싸우지 말고 피신하라는 거군.”
“그렇소. 귀하를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나 귀하가 무영도수를 대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공개 대결이니 그는 필히 귀하에게 심하게 손을 쓸 것이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날 게 틀림없소. 전날 귀하에게 당한 광풍혈사대의 고수들처럼 말이오.
파국이 빤히 보이는데 앉아서 맞이하는 것은 하지하책이오. 적이 압도적으로 강할 땐 일단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상책이오. 누구도 귀하를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을 게요. 오히려 바람직한 처신을 했다고 칭찬할 게요.
사실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중요치 않소. 중요한 건 귀하가 살아남는 거요. 살아서 강해지는 거요. 무영도수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그때까지 나와 더불어 수련합시다. 십자무련이 강대하다고 하나 경계를 넘어오면서까지 귀하를 잡으려 들지는 않을 게요.
만약 그들이 정파 무림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손을 쓰려 든다면 모처에 은신하면 되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들을 감당할 힘이 없소. 그러나 귀하가 안전한 곳에 숨도록 도와줄 수는 있소.
부디 자존심을 잠시 접어두고 내 권고에 따라주길 바라오. 아니, 이건 권고가 아니라 간청이오. 내게 귀하를 능가하는 무력이 있다면 강제로 끌고 가고 싶은 심정이오.”
혼란스러웠다.
이 사내는 왜 나를 살리려고 제 가문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걸까.
오대세가는 정파 무림의 주축이지만 십자무련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설령 양천의 주장처럼 공주 양가가 나를 품더라도 다른 세가들은 불똥이 떨어지는 걸 꺼려 자신들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뺌할 게 뻔했다.
십전이라는 별호의 소유자답게 두뇌도 명석한 걸로 알려진 양천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는 까닭이 뭘까.
다른 꿍꿍이속이 있음에 틀림없으나 청화가 일어난 걸 보니 나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배려는 위장이나 가장이 아니었다.
머리를 굴린들 답이 나올 성싶지 않았기에 나는 추론을 중단하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모를 땐 묻는 게 최선이었다.
“나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