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 장담하이!
양천은 머뭇거렸다.
그럴 만했다. 기상천외한 대답이 그의 입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빛으로 압박하자 그가 결국 그 답을 토해내었다.
“귀하에게 반했기 때문이오.”
일순 말문이 막혔다. 주근깨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양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 고소는 양 관주의 한숨처럼 그의 습관이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런 의미는 아니니까.”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내 반응을 보고는 수습하려는 수작인 게지.
“무인으로서 귀하를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낫겠구려. 오랜 세월을 살아오진 않았으나 네 살에 무공에 입문한 이후 평생 동안 그렇게 가슴이 뛰는 대결은 처음이었소.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고 후회 없이 패했소. 그날 내가 눈물을 흘린 건 분해서가 아니라 후련했기 때문이었소. 내 속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소. 그 심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조금 수긍이 갔다. 양천이 내 안에 남아있는 의구심을 불식시키려 분발했다.
“나는 십전이라는 가당찮은 별호의 무게에 짓눌려있었소.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건 한편으로는 하나에 전념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소. 귀하 덕분에 나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벗어던지고 중요한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소. 귀하에게 도전할 실력을 갖출 때까지, 그리고 귀하를 꺾는 그 날까지 오로지 무공 일도에 매진할 참이오. 그러려면 귀하가 온전해야 하지 않겠소? 목표물이 사라지면 내 의지도 소멸될 테니 말이오.”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으나 나는 양천의 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가 나를 애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보다는 경쟁상대로 보는 게 훨씬 부담이 적었다.
나는 양천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이제 내 입장을 밝히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무영도수와의 일전을 보류하거나 연기할 생각이 없소. 그와 싸우더라도 내가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 간 졸이지 말고 맘 편히 구경이나 하구려.”
양천의 검미가 가운데로 몰렸다. 그럼에도 그의 미간엔 주름이 잡히질 않았다. 얼마나 피부가 탱탱하면 저럴까,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천이 물었다.
“혹시 그와 따로 얘기가 되었소?”
“무슨 소리요?”
“무영도수는 대엿새 전에 이미 보양에 들어왔다고 들었소. 귀하는 그날 나와의 비무 이후 바로 보양으로 귀환했다고 알고 있소. 그렇다면 둘이 벌써 상견례를 했다고 보아도 되지 않겠소?”
“뭐, 그를 만나긴 했소.”
“역시. 그렇다면 이번 일전의 내용과 결과는 사전에 합의가 되었을 터,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구려.”
진실을 알리면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갈 게 빤한지라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건 맞소.”
양천의 입술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랬구려. 아무튼 다행이오. 한시름 놓았소.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뭐요?”
“무영도수가 귀하에게 퇴로를 열어준 게 귀하의 사문을 의식했기 때문이오?”
“내 사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소.”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수련을 해야 하니 얘기는 이쯤에서 끝냅시다. 참, 이왕 온 김에 내 상대가 되어주겠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오. 기꺼이 귀하의 절학들을 받아 주리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양천이라면 석진이나 한월노모보다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활용하지 못했다. 안진을 안전한 장소에 옮긴 후 그와 본격적으로 손을 섞으려는 찰나 일각 전 떠났던 석진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한월노모도 함께였다.
***
나는 보양으로 향했다.
한월노모에 따르면 한 식경 전 정검문의 검사들이 나타나 반 시진 내로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하옥관의 양 관주를 잡고 있다기에 나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지체하면 양 관주의 손가락들이 잘릴 우려가 있었다.
나는 어째서 정검문 일당이 벌써부터 설치는지 의아했다. 비무가 예정된 정오까지는 두 시진 이상 남아있었다.
의문은 보양에 들어서자마자 풀렸다. 여기저기서 ‘무영도수’라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입성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를 부른 건 내가 정한 정오가 아니라 자기의 등장에 맞춰 대결을 시작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과연 자하옥관에 이르기도 전에 서편의 대로에서 정검문의 검사들이 나를 막아서더니 부흥로로 갈 것을 요구했다.
나는 피라미들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선선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한량처럼 느긋하게 나아갔다.
정검문의 검사들이 감시하듯 뒤를 따르며 속보를 독촉했지만 무시했다. 그들은 혀만 놀렸을 뿐 감히 나를 떠밀거나 하지는 못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느리게 걸은 건 최대한 많은 관전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함이었다. 해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거리엔 행인들이 듬성듬성했다. 요 이틀간 보양에 들어온 수만 명의 외인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을 터였다. 나는 내가 몰고 가는 소란이 그들을 깨우기를 바랐다.
기대했던 대로 보양 최대의 번화가인 부흥로에 접어들 때쯤엔 어느새 수많은 군중이 나를 따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십, 수백 명씩 늘어나는 듯했다. 그러다 광장에 이르렀을 때는 하늘을 덮은 뭉게구름처럼 불어났다. 족히 일만은 되어 보였다.
나는 벌써부터 상단전에 일렁이는 푸른 운무에 전율했다. 잠시 후 그 구름안개는 불꽃으로 화해 활활 타오를 것이었다.
일만여 군중이 사천 평 넓이의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정검문의 검사들이 사람들을 뒤로 물리며 반경 십여 장의 원을 비무 공간으로 마련했다. 나는 안고 왔던 안진을 맨 앞줄에 나와 있는 주근깨에게 맡긴 후 원을 독차지하고 선 무영도수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불문곡직 칼을 빼 들고 급전을 시도하면 곤란한지라 나는 그의 호흡을 유심히 관찰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수많은 이들이 운집해 있었으나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모두들 나와 무영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당금 무림 최강의 초신성과 중원 전역은 물론이고 새외에까지 무명(武名)을 떨친 거물의 대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영도수의 오륙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일부러 뒷짐을 졌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선공하지 못할 터였다.
“개전에 앞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고 싶소. 이 비무로써 나와 귀 무련 간에 있었던 문제가 종결될 것임을 공언해주길 바라오.”
조용하던 군중이 술렁거렸다. 발언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영도수에게 평어를 써서 놀란 것이었다.
특징 없는 무영도수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만인의 면전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어깨로 올라가려는 찰나 잽싸게 말을 이었다. 푸르스름한 안개만이 자욱할 뿐 아직 불길이 일지 않았기에 그의 발도를 늦춰야 했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나, 오선은 오늘 십자무련의 명망 높은 무호(武豪)인 무영도수를 맞아 오십 초의 공방전을 펼치려 하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이 대결의 증인이 되어…….”
제길.
말을 하다 말고 욕을 할 뻔했다. 군중의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설을 허용하지 않고 무영도수가 다짜고짜 칼을 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선전포고도 없이 강맹한 칼바람을 날렸다.
나흘 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이차전은 무영도수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풀린 것도 아니었다.
초장부터 강공으로 밀어붙여 십 초 이내에 승부를 마무리할 속셈이었을 무영도수는 내가 강하게 버티자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나도 여유롭지는 못했다. 연습의 결여로 인해 새로이 체화한 선력을 원활히 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손쉽게 우위를 점하리라 여겼던 계산이 빗나갔다. 오히려 초반에는 내가 약간이라도 밀리는 형국이었다.
무영도수의 신형은 번개처럼 빨랐고 그의 칼은 벼락처럼 강력했다. 나는 그가 전날 아꼈던 삼 푼의 실력까지 끌어내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정면충돌을 자제하고 회피와 방어에 주력했다.
선령의 공능에 힘입어 내가 도풍의 약한 고리를 잘라내며 번번이 공세를 벗어나자 바짝 약이 오른 무영도수가 근접전을 시도했다. 기방만으로 그의 칼질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나는 지공으로써 그의 접근을 차단했다.
안력으로는 따라잡지 못할 만큼 쾌속한 신법을 구사했지만 그는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내 지풍들을 다 흘려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몸놀림이 빨라도 빛살의 속도를 능가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전세에 변화가 생긴 건 삼십 초가 경과했을 시점이었다.
무영도수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던 나는 차츰 새로운 선력에 적응됨에 따라 반격의 강도를 높였다. 현란한 칼부림으로 내가 쏘아낸 빛줄기들을 쳐냈지만 지풍에 실린 선력의 증가로 인해 무영도수가 밀리기 시작했다.
주도권을 쟁취한 나는 지풍을 연사하며 전(全)방위에서 그를 압박했다. 어지러이 휘고 불규칙하게 회전하며 무영도수의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상부까지 장악한 지풍들이 그를 꽁꽁 묶었다. 환상적인 도막(刀幕)을 선보이며 버텼으나 그는 결국 막판에 몰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숨통을 터주었다. 지풍에 꽂히지 않으려면 바닥에 엎어지는 수밖에 없었기에 무영도수는 굴욕적인 자세를 감수해야 했다. 나는 그가 개구리 자세를 취하자마자 손을 거두었다.
“막 오십 초가 지났소.”
기혈은 격탕되었겠지만 딱히 부상을 입지는 않았을 터임에도 무영도수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팔꿈치와 무릎을 땅에 대고 있었다. 마치 내게 절을 하는 것처럼.
나는 설욕의 쾌감을 즐기는 대신 일만 군중이 선사하는 산불 같은 청화를 만끽했다.
무거운 정적이 사위를 백만 근의 바위처럼 내리눌렀다.
아무도 입을 벙긋하지 않았다. 모두들 경악한 표정과 넋이 나간 눈빛들을 공유했다. 특히 창천검을 비롯한 정검문의 검사들은 망연자실한 낯짝들이었다. 내 친인들조차도 충격의 심사를 만면에 담고는 나를 유령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멀쩡한 이는 역설적이게도 실성지경에 빠진 안진뿐이었다.
이윽고 무영도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 불신과 치욕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가 감상을 내놓길 기다렸으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칼을 수습하지도 않고.
마비의 주문이 풀린 듯 그가 가는 방향에 운집해있던 군중이 허둥지둥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정검문 일당이 도망치듯 그를 뒤쫓았다. 나는 무영도수가 장내를 벗어나기 전에 물었다.
“그냥 갈 거요?”
무영도수는 끝까지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군중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 친인들이 내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잔뜩 흥분한 석진이 모두를 대표해 외쳤다.
“꿈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없었을 걸세. 어떻게 이런 기적이! 그거 아는가, 아우님? 자네는 이제 무림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최고최강의 무존들로 자타가 공인하는 개세팔천을 발아래 두는 위명을 얻게 될 걸세. 내, 장담하이!”
과장된 언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후세의 사가들은 이날 무력(武曆) 일천삼백이십팔 년 사월 초하루를 나, 마선(魔仙) 오선이 고금제일인, 나아가 영세제일인으로의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날로 기록할 터였다. 노인네가 전생(轉生)을 마다하고 영원한 적멸을 택한 지, 즉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