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는구먼.
날씨가 더없이 쾌청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봄바람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해가 뜨고 한 시진 후쯤 건곤장과 함께 오죽채를 나섰다. 오늘 오시에 그와의 공개 비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십자무련에 든 첫날 나는 이날 일전을 치르기로 그와 합의했다.
나흘은 표면적으로는 부상의 완쾌에 필요한 기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루시마 건을 처리하며 획득한 선력을 완전히 체화하는 데 소요될 시간이었다. 나는 건곤장을 믿고 자시부터 다음 날 오후까지 운공에 들었다. 그 덕분에 이틀 만에 새로운 선력을 남김없이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건곤장과의 비무를 앞당기지 않았다. 이미 날짜를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장소는 호원의 대표적인 번화가인 남사로였다.
건곤장은 대규모 군중 앞에서 대결하자는 내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게 패배하는 망신을 당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 혹여 비무의 여파에 휩쓸려 다치거나 심할 경우 사망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모는 양천과 흡사했다.
나는 비무 공간을 넉넉히 하고 십자무련의 무인들을 전면에 배치해 성급한 관전자들의 무모한 접근을 차단하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건곤장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도 비무 도중 군중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
북문(北門)을 나간 우리는 텅 빈 대로를 따라 걸었다.
마차와 인파로 붐빌 시각이었으나 쥐새끼 한 마리도 찾아보기 힘든 건 호원의 백성들 모두가 남사로에 몰려갔기 때문일 터였다. 그곳의 광장은 물경 일백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날 도봉과 검룡의 비무를 관전하러 우장평에 운집한 이들의 수는 오십만 어림으로 집계되었다. 장담컨대 오늘 그 기록은 깨질 터였다.
과연 남사로에 접어들자 어마어마한 숨소리들이 내 고막을 압박했다. 마치 해일이 덮쳐오는 것 같았다.
우리의 등장에 외곽으로 밀려나 있던 이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쪽까지 환호성이 연쇄적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펄떡거리는 심장을 주체하려 애썼다.
이제 얼마 후면 상상으로도 가늠이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결실을 얻게 될 터였다. 벌써부터 뭉게구름 같은 안개가 남사로의 상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 운무는 수천 개의 번개로 화해 내 상단전에 푸른 불꽃의 축제를 일으킬 것이었다.
***
장소는 동일했지만 군중의 태도는 상반되었다.
전날 안진과 함께 들러 일장연설을 했을 때 호원의 백성들은 시금털털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입을 열어 호응을 유도할 필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열광하고 있었다.
이는 단지 대륙을 아우르는 위명을 지닌 우리 노소의 대결을 직관할 수 있다는 기쁨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게 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큰 몫을 했다.
한 달여 전 호원의 민중은 나를 적으로 간주했다.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의 백성이자 천하제일세(天下第一勢)의 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터에 십자무련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줄줄이 나한테 깨졌으니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을 터였다. 그러던 차에 내가 난데없이 등장에 악인 척결 운운하며 장광설을 쏟아냈으니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십자무련에 들고도 무사히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 사정이 바뀌었다. 무후가 나를 사면한 셈이니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 내가 낙일쾌검을 대신해 무후의 충견 노릇을 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한통속이 된 것이나 진배없으니 호원의 백성들로서는 더 이상 나에게 반감을 가질 까닭이 없었다. 더욱이 낙일쾌검보다 강한 데다 젊기까지 하니 십자무련과 자기들을 동일시하는 그들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으리라.
설명이 다소 길었지만 내가 획득하게 될 미증유의 청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이니 양해해주시길.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나는 사거리의 중앙을 비워놓고 사방의 대로와 전각들의 창이며 지붕까지 새카맣게 들어찬 일백만 군중의 열렬한 기대 속에 건곤장과 칠팔 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이미 내 상단전에는 태산 크기의 청화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다 비무를 수행하지 못할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
나는 건곤장을 향해 포권했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 명망 높은 건곤장에게 삼가 가르침을 청하는 바이오.”
건곤장이 내게 마주 포권하며 화답했다.
“내가 할 소리일세, 천룡. 이미 엿새 전 공주에서 패배한 나에게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네.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짤 터이니 너무 방심하지는 말게나. 내가 하수이니 선공의 이(利)를 취하겠네. 허락하겠는가?”
“물론이오. 오시구려.”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건곤장이 웅혼한 장공을 발출함으로써 비무 개시를 알렸다. 일백만 개의 입들이 있었지만 천공을 가르며 지나가는 새가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사위는 고요했다.
질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직 오른쪽 어깨가 불편하고 옆구리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으나 전투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십여 초가량의 전초전을 통해 몸을 푼 우리는 본격적으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비무의 양상은 전날 오죽채에서 치렀던 일차전과는 판이했다. 그날과 달리 나는 제자리를 고수했고 건곤장은 부지런히 내 주위를 오가며 파상공세를 펼쳤다.
나는 방어에 치중하며 간간이 반격을 가했다. 공격의 주도권은 건곤장이 쥐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그가 밀리는 형국이었다.
이리 말하면 일방적인 우세라 오해할 소지가 있을 테니 진실을 밝히자면 나도 전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고루시마 건으로 새로이 획득한 선력 덕분에 나는 내공 면에서 건곤장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했지만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가 사전에 경고한 대로 조금만 방심해도 전세가 뒤집어질 수 있었다.
하여 나는 결정타만 날리지 않았을 뿐 선령까지 동원하며 매초 최선의 수로 응대했다. 승패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건곤장에 대한 예의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 진의를 헤아린 듯 건곤장도 비무에 앞서 공언한 대로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일백 초가 지나고도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자 싹싹하게 손을 거두었다. 끊임없이 퍼붓던 장공을 뚝 멈춘 그가 패배 선언을 하자 일백만 군중이 천지가 울리는 굉음을 일으킴으로써 내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이날의 일전으로 나는 공식적으로 중원 무림 무력 서열 오 위에 올랐다. 세상은 ‘재수 없는 늙은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
나는 호원을 떠나지 않고 건곤장과 함께 십자무련으로 돌아가 그의 처소인 오죽채에 머물렀다.
오늘의 성과를 갈무리하려면 적어도 닷새는 걸릴 터였다. 인적 없는 야산의 동굴을 찾기보다 건곤장이라는 든든한 호위를 둔 곳에서 운공에 드는 게 나을 듯싶었다.
주위의 이목을 의식한 듯 오는 내내 침묵하던 건곤장이 검은 대나무의 숲을 통과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감상을 토해냈다.
“참으로 대단하이.”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아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두 가지만 물어봄세.”
비무를 복기하자는 건 줄 알았는데 건곤장의 입에서 뜻밖의 질문이 나왔다.
“첫째, 전날 이곳에서 나와 손을 섞었을 때 힘을 아꼈던 겐가? 둘째, 그날 공주에서 일합을 겨루었을 때 용왕의 말마따나 딱 필요한 만큼만 힘을 썼는가?”
사실상 같은 질문이었다. 건곤장은 내가 앞선 두 번의 대결에서 진신무력을 감추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답을 주지 않고 건곤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 깃든 질책을 읽었는지 노인이 얼굴을 붉혔다.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닐세. 다만 도저히 믿기 어려워서 그런 걸세.”
“나는 노인장을 기만한 적이 없소. 앞으로도 그럴 참이고.”
“미안하네. 다시는 오늘과 같은 실언을 하지 않음세.”
“사과할 것까진 없소. 나 자신도 내 발전 속도가 놀라우니까.”
“바로 그걸세. 나는 이제 일 년 후 자네가 주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자로 성장해있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걸세. 아니, 주군을 능가한다고 해도 수긍할 걸세. 살아생전 자네 같은 천하기재를 만나다니 꿈만 같구먼.”
상기되었던 건곤장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나는 무슨 말이 나올지 알았다.
“자네가 천공으로 비상하기 전에 무림의 범들이 자네를 잡으려 들까 봐 불안하구먼. 아무래도 이곳에서 지내며 힘을 기르는 게 나을 듯싶은데. 어떤가, 천룡?”
“이미 끝난 얘기잖소.”
“그렇긴 하네만…….”
“여기서는 강해질 수 없소. 나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악인들을 사냥해 그들을 원수로 여기는 이들에게 제물로 바쳐야 하오. 그것이 내 성장의 자양분이니까.”
작정하고 한 발언이었다. 나는 건곤장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말을 곡해했다.
“허어, 자신의 안위를 도외시하면서까지 민초들의 한을 풀어주고자 한다니. 가히 살신성인의 대덕일세. 자네의 협심과 의기가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는구먼.”
더 얘기하면 오해만 커질 터인지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청화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엿새 내내 하루 평균 무려 여덟 시진이나 운공에 들고도 칠 할 정도밖에 건곤기로 전환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운공을 마칠 때마다 흥분을 억누르느라 심호흡을 해야 했다. 까마득하게만 여겨졌던 구 단계의 벽이 성큼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지만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건곤기의 불균형이었다. 이전에도 겪어본 문제였으나 이번엔 상황이 심각했다. 청화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상쇄하려면 수천 건의 원사(寃事) 청취가 필요할 터였다. 시급히 양 관주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오죽채를 떠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안진과 도봉이 재대결하기로 한 날이 내일이었다. 안진이 우장평에 올지는 불확실했으나 가보기로 했다. 도제가 도봉만 내보내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건곤장이 행선지를 물었을 때 나는 마원이라고 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우장평에 들른 후 곧장 악마들의 소굴이자 인세의 지옥으로 향할 참이었다. 양 관주에겐 가는 도중에 전서구를 날려 내 귀환에 맞춰 필요한 준비를 해두도록 이를 계획이었다.
작별을 고하고 대나무 숲 위로 몸을 날리려는데 건곤장이 나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