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97
제97화 – 다른 목적이 있겠죠?
부러지지 않은 오른발로만 착지하고 도약했음에도 통증이 극심했다.
새삼스레 아르의 장공이 얼마나 살벌했던지를 상기한 나는 치가 떨렸다. 정황상 그녀가 주범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설혹 검룡의 꼬드김이 넘어간 것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내 천이통에 대해 아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검룡이 토굴 가까이 오지 않았던 연유는 내 청력을 경계한 그녀가 그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아르는 왜 그랬을까.
내가 배필이 되기를 바라는 그녀의 원을 물리쳐서 화가 난 걸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나를 처치하려 하다니.
왼팔과 왼 다리의 극통이 생생히 증명하고 있음에도 나는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믿고 싶었다.
양천의 행동도 납득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나에 대한 살해 공모에 동조했을까. 내가 아는 그는 결코 그런 협잡에 응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잘못 알았던 걸까. 그가 줄곧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그렇다면 전날 무영도수와의 일전을 앞두고 피신할 것을 강권하며 그가 선사했던 청화는 무엇이었던가. 거짓으로도 푸른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때는 진심이었으나 나중에 변심한 걸까. 오늘 나와 손을 섞으며 느낀 무기력함이 그를 절망에 빠뜨리고 아르나 검룡이 그 절망감을 이용해 그를 구워삶은 걸까. 나만 제거하면 자기가 다시 최고초신성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을까.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내 심상은 배신감으로 가득 찼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게 어떤 것인지 이보다 더 실감할 수는 없을 터였다.
나는 심마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육신을 학대했다. 몸이 질러대는 고통의 절규 덕분에 나는 분노와 광기에 함몰되지 않고 정신 줄을 잡을 수 있었다.
검룡의 검기가 꽂혔던 이마에서 코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핥으며 다짐했다. 그들 모두에게 오늘의 작당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임을.
죽음으로써.
***
가뜩이나 자시 운공을 깨뜨려 천근만근이 된 몸에 중상까지 입은지라 경공은 자해행위나 진배없었지만 나는 내-외상의 악화를 무릅쓰고 서진(西進)을 계속했다.
최고 속력을 내지는 못했지만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결과 해가 뜨기 전에 호원에 당도할 수 있었다. 심신이 모두 망가진 최악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천사백 리를 세 시진 이내에 주파한 것이었다.
새벽어둠에 잠긴 천하제일도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인적이 사라진 대로를 질주해 곧장 십자무련으로 향했다.
동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무사들이 괴상한 자세로 그들에게 날아가는 나를 보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나는 일제히 내 쪽으로 돌아서서 창을 겨누는 무사들에게 신분과 용건을 밝혔다.
“절대천룡이오. 문상을 보러 왔소. 어서 그녀에게 보고하오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경비무사들의 목전에 이르러있었다, 내 꼴을 본 그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나는 그들이 무어라 감상을 내뱉기 전에 동문을 통과해 십자무련에 들어섰다.
고월서각을 향해 달리고 있노라니 뒤에서 경비무사들이 부산을 떨며 일으킨 소란이 나를 따라왔다. 그들이 발했음에 분명한 호각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너른 화원 속에 단층의 목조건물이 망망대해의 고도(孤島)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꽃밭을 가로질러 고월서각에 들었다. 그러고는 복도 끝의 연실로 갔다.
문상은 당연히 없었다. 여기는 그녀의 처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리로 올 것이었다.
의자를 두고 바닥에 정좌한 나는 운기조식을 취했다. 운공에 들었을 때 못지않은 지옥의 고통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절로 터져 나오는 욕지기를 참으며 나는 나를 원망하는 육신을 달랬다.
최소한의 원기도 회복하기 전에 외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상은 아니었다. 연실로 달려오는 이는 건곤장이었다.
나는 뒷목이 뻣뻣해졌다.
아르와 양천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후유증인지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게 된 건곤장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에도 놀란다더니.
연실의 주렴을 걷고 들어선 건곤장이 나를 보더니 안구를 쏟아낼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게 어인 일인가, 천룡?”
나에게 대답할 겨를을 주지 않고 건곤장이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건곤장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나를 부축했을 뿐이었다.
“괜찮은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용봉들과 함께 무련으로 오고 있다고 들었거늘. 설마 그들하고 싸운 겐가?”
건곤장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니, 어쩌다가?”
나도 알고 싶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전조도 전혀 없었는데. 혹시 있었음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최근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들을 경시했던 걸까.
“나도 모르겠소. 어젯밤에 예고도 없이 암습합디다.”
건곤장이 길게 뻗은 백미를 한껏 찌푸렸다. 그는 내 자시 운공의 습성을 아는 몇 안 되는 친인들 중 하나였다.
“자네가 무방비 상태에 빠졌을 때 말인가?”
“그렇소.”
“허어, 고약한지고. 헌데 자네가 이렇게까지 당했다면 그 아이들도 무사하지는 못했겠구먼. 죽은 자도 있는가?”
“다들 다치기는 했어도 명줄이 끊어진 사람은 없을 거요.”
“허어, 자네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헷갈리는구먼.”
후자였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 모두가 뒈졌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리되면 나 역시 망했을 터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천지조화지경에 이르러 불살의 금제에서 벗어나는 즉시 양천과 아르를 찾아 제일 먼저 처단할 작정이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까지 후순위로 밀어두고서.
“간밤의 사정을 듣기 전에 자네한테 사과부터 해야겠네. 그날 문상을 통해 주군에게 간곡히 청했으나 끝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네. 칠주봉에 사람을 보내 자네에게 내가 갈 수 없음을 알리고자 했으나 주군은 그마저도 금했다네. 면목이 없네. 참으로 미안하이.”
“노인장 잘못이 아니잖소. 나는 그저 나를 돕고자 하는 노인장의 마음에 감사할 따름이오.”
건곤장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신선이 되면 해야 할 일이 또 있음을 알았다. 무후가 건곤장에게 채운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고리타분한 언약에 묶여 사소한 반기조차 들지 못하는 고지식한 노인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싶었다.
***
건곤장에게 어젯밤의 비극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렸다. 고월서각 입구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문상이었다.
나는 기실 그녀를 멘 가마가 화원에 난 길을 지나올 때부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린 문상이 빙판처럼 미끈거리는 복도를 조심스레 걸어왔다. 잠시 후 주렴이 걷히고 그녀가 연실에 들어섰다.
나를 본 문상의 면사가 가볍게 펄럭였다. 그녀의 호흡도 일순지간 거칠어졌다. 나는 그녀가 간밤의 봉화산 사태를 아직 알지 못함을 알았다. 심산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거리가 일천사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그녀라도 벌써 파악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문상이 건곤장에게 면사를 돌리며 대뜸 축객령을 내렸다.
“태상봉공께선 그만 나가보세요.”
건곤장의 낯빛이 붉어졌다. 공식적인 서열은 그가 더 높았다. 하지만 무후를 대리하는 탓에 문상은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건곤장이 버텼다.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되겠는가?”
문상은 묵묵부답으로 압박했다. 건곤장이 나를 보았다. 나는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문상과 나눌 얘기는 비밀이어야 했다.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소.”
건곤장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기분을 헤아린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바로 어제 믿었던 이들에게 등을 찍히고도 나에게 진심인 이를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하다니.
마음을 바꿔 문상에게 건곤장의 동석을 요청하려는데 건곤장이 먼저 뜻을 접었다.
“알겠네. 기다림세.”
“아니오. 그럴 것 없이 여기서 함께…….”
건곤장이 내 말을 잘랐다.
“아닐세. 나 같은 퇴물이 있어봤자 방해밖에 더 되겠는가. 오죽채에 돌아가 있을 테니 여유 있을 때 찾아오게나.”
내가 팔을 붙잡았지만 건곤장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내 손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문상에겐 일별도 주지 않고 연실을 나갔다.
건곤장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문상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인 것 같소?”
문상은 내 시험에 응했다.
“그간의 경로를 보건대 오늘 새벽에 수릉에 이를 것 같았는데 오지 않았다더군요. 그렇다면 봉화산에서 묵었을 테지요. 그리고 거기서 사달이 벌어졌겠죠. 그들 네 사람이 오 공자를 합공했나요? 검룡과 용궁 공주의 무력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들이 도봉이나 십전공자와 비슷한 수준이라 추정한다면 합공 이전에 암습부터 했을 공산이 크겠네요. 정상적인 대결이었다면 설령 세가 불리했더라도 오 공자가 이토록 심한 부상은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혹시 독을 썼나요? 의복과 맨살의 그을림을 보아하니 굉천뢰 같은 화탄도 사용했을 듯싶네요. 그런가요?”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소름이 돋았다.
“대충 비슷하오.”
“그들이 왜 그랬나요?”
“왜 그랬을 것 같소?”
“계속 말꼬리만 잡을 건가요?”
“나도 몰라서 묻는 거요. 당신이라면 답을 알 것 같소만.”
“오 공자도 충분히 짐작할 텐데요. 어려운 문제는 아니잖아요?”
“나를 없애면 자기들끼리 경쟁할 수 있다고 계산했을 거란 말이오?”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적어도 아르와 양천의 동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지만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누가 주동했나요?”
“모르오.”
“둘 중 하나일 테죠? 혹은 둘 다거나.”
“둘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요?”
“당연히 검룡과 용궁의 공주죠. 도봉, 그 아이는 그런 일을 도모할 능력이 없어요. 만약 그랬다면 오 공자가 사전에 눈치를 챘을 테고요. 십전공자는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부족해요. 사실 그가 이번 일에 가담했다는 것 자체가 의외네요.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겠어요. 오 공자로 인한 심상(心傷)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던 모양이네요. 심성까지 바꿀 만큼.”
적잖이 속이 쓰렸다.
“그들은 어떻게 됐나요? 모두 죽였나요?”
“다 살아 있소. 크고 작은 부상들은 입었을 테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을 보건대 문상은 별반 놀란 낌새가 아니었다.
“어차피 도제와 검제, 그리고 용왕과 적이 될 터인데 이참에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버리지 그랬어요? 아량을 베푼다고 그치들이 감지덕지하며 화해를 청할 리 만무한데. 이럴 때 보면 오 공자는 뜻밖에도 무른 구석이 있어요. 혹시 그 애송이들을 가차 없이 징치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럴 여유가 없었을 뿐이오.”
문상이 나를 면사 너머로 빤히 바라보는 게 훤히 보였다.
“본인은 아니라고 자신할 테지만 오 공자는 거짓말에 서툴러요. 아주 많이.”
나는 보이지 않는 문상의 눈과 눈싸움을 벌였다.
짧은 신경전을 끝내고 문상이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설마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하소연하러 그 몸을 하고 그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진 않았을 테고, 나한테 뭘 바라나요?”
내가 답을 주기도 전에 문상이 선부터 그었다.
“참! 미리 말하지만 우리는 오 공자를 감쌀 수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천하제일세라지만 도산-검림과 용궁을 동시에 대적하는 건 불가능해요. 실은 오늘부로 오 공자가 본련과 무관함을 공표할 작정이에요. 그들이 오 공자를 치는 걸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요. 야속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처신이에요. 이해하죠?”
예상했던 바였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오 공자가 나를 찾은 데는 다른 목적이 있겠죠?”
나는 문상이 이미 내가 무엇을 청할지 알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를 빌미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