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15
#214화
협동 레이드에 관한 세부 조정이 마무리되자 원명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 벌써 가시게요?”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면 좋을 텐데.”
진태경과 임꺽정의 아쉬운 듯한 말투에 원명훈이 사람 좋게 웃었다.
“아직 업무가 남아 있어서요. 명색이 길드장인데 사고 쳐 놓고 혼자만 놀 수는 없잖습니까.”
“아, 그러네.”
이렇게까지 말하니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멀리 나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평화 길드 하우스를 빠져나온 원명훈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의 신호음과 함께 한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 예, 대표님.
“조율 끝났어. 내일 오후 두 시에 협동 레이드 한다.”
– 빨리 잡혔네요.
“미끼가 좋잖아. 얘들 주제에 어느 세월에 A급 게이트 가 보겠어?”
– 하하. 그건 그렇죠.
“우리 길드에서는 한 팀만 데려갈 거야. 애들 입단속은 시켜 놨지?”
– 저 못 믿으십니까? 말 잘 듣는 놈들로만 가려서 뽑아 놨습니다.
“역시 1팀장이야. 지금 바로 돌아갈 테니까 내일 참여하는 애들 명단 미리 추려서 올려놓고.”
– 네. 평화 길드 쪽은 어떻습니까?
“여기?”
원명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개판에 잡탕이지 뭐. 위계질서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야. 애초에 다섯 명밖에 없는 길드가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 그래도 진태경을 제외하더라도 B급이 셋이나 있던데요.
“그래 봤자지. 길드장이라는 노인네는 얼굴마담으로 앉혀 놓은 것 같고. 팀장이랑 여자는 아레스 길드 출신이긴 한데…… 딱히 신경 쓸 정도는 아냐. 심지어 다른 하나는 D급이더라고.
– D급이요? 내일 작업하기 쉽겠네요.
“쉬워?”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원명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움찔한 듯 다급하게 덧붙였다.
– 대표님. 그게 아니고요.
“1팀장, 아니 종훈아.”
– ……예.
“신경 쓰자. 내가 이 나이 먹고 직접 게이트 뛰는 이유가 뭔데. 안 그래?”
– 죄송합니다.
“그래. 알았으면 앞으로라도 잘하자. 말조심하고.”
–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래, 이따 보자.”
통화를 끊은 원명훈은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에 발랐다.
자신도 이제 몇 달 후면 마흔 줄에 접어드는 나이다.
매년 수억을 들여 외모를 관리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세월은 속일 수 없다.
“간만에 매스컴 타는데 오늘은 샵이라도 들렀다 갈까.”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길가에 주차해 둔 스포츠카에 탑승했다.
오랜만에 역겨운 몬스터들을 마주할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이후 자신의 앞에 펼쳐질 꽃길을 떠올리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 *
다음 날 아침, 식탁 맞은편에 앉은 진호 형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밥도 안 먹고 뭘 그렇게 봐?”
“네 인터넷 기사.”
“또?”
“또라니. 이런 건 봐도 봐도 안 질려.”
누가 보면 내 관련 기사가 아니라 진호 형 관련 기사인 줄 알겠다.
요즘은 거의 담당 매니저처럼 인터넷 반응을 체크 해서 알려 주는 게 일상처럼 굳어졌다.
“사람들 반응 좋네. 원명훈 관련 기사도 엄청 많아.”
“그렇겠지.”
“두 사람 보기 좋다. 훈훈하다…… 시벌좌가 나한테 욕 좀 해줬으면 좋겠다 등등.”
“…….”
“묶어 놓고 때려 달라는 놈도 있네.”
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구나.
어이가 없어서 직접 검색해 봤다. 인터넷 기사는 물론이고 온갖 커뮤니티에서 나와 관련된 별명과 합성짤이 넘쳐나는 중이다.
심지어 내 행적을 요약한 게시글이 베스트 게시판에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시벌좌 지금까지의 행적 정리.txt
안녕. 30대 백수다.
오늘은 무슨 쓸모없는 짓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벌좌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음. 뭐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겠지만 혹시 모르는 놈 있을 것 같아서 써 본다.
손가락 놀리기도 귀찮아서 간단 요약함.
1. 20살에 F급 각성. 7년 동안 이등병보다 빡세게 뺑이 치다가 재각성.
2. 하지만 헌터 협회의 함정 카드 발동으로 당시에는 C급으로 측정됨. 헌터 협회가 병신이라는 게 학계 정설.
3. 어리둥절한 시벌좌를 평화 길드라는 듣보잡 길드가 낚아챔.
4. 츄리닝에 슬리퍼 찍찍 끌고 출근하다가 B급 게이트 터짐. 혼자서 오우거들 쌈 싸 먹고 수백 명 구함.
5. 인생역전. A급 헌터증 받는 날 5만 명 앞에서 ‘그 발언’ 함. 칭호 ‘시벌좌’ 획득.
대충 이 정도인데 가족 관련 사항은 고소미 먹을까 봐 못 썼다.
이미 언론사 몇 개 날아갔는데 30대 백수는 말할 것도 없지. 고소장 날라오면 등 짝에 맘스터치 당하니까 양해 좀.
아침으로 된장찌개 먹고 부랄 긁다가 대충 끄적여 봤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너무 간단하게 써 놨는데?’
현대와 무림을 오가며 겪은 일들을 전부 떠올리면 백 페이지로도 모자라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니 이게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나는 게시글 아래로 빼곡하게 나열된 댓글을 읽어 내려갔다.
물론 수백 개가 되는 댓글을 전부 읽을 수는 없어서 베스트 댓글 몇 개만.
(Best댓글) 시.벌.조.아.
└ 나 생방 때 봤는데 시벌좌 욕 ㄹㅇ 우리 할머니보다 찰지게 하더라. 욕설 아카데미 이런 거 다녔나.
└ 근데 그게 자연스러움. 밉지가 않다.
└ A급 헌터라고 TV 나오는 애들 보면 좀 순진하고 착한 애는 있었는데 이 정도로 서민적인 놈이 없었음ㅋㅋ
└ ㅇㅇ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인터뷰에서 F급 헌터 때 썰 푸는거 보면 고생 엄청한 것 같던데.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
└ 개인적으로 협회 나오자마자 레이드 하러 간 게 호감이었다. 돈이 아니라 헌터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는 느낌?
└ 인정.
(Best댓글) 얘 원명훈 스타 길드로 이적하는 건 어떻게 됐냐. 차라리 그냥 이적했으면 좋겠는데.
└ 사실 무근. 걍 인터뷰 때마다 원명훈 빨아 대니까 한 번 찾아갔는데 그게 와전된 거임.
└ 빨….아?
└ 오늘은 이거다.
└ 이 시벌좌는 무료로 해 줍니다.
└ 미친 새끼들 많네.
(Best댓글) 시벌좌야 뭐 이미 영구 까방권 획득했고, 원명훈 얘는 진짜 졸지에 멱살 잡고 캐리 당하네.
└ 그러게. 원명훈 이름도 까먹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그 사건 무혐의 판정받은 기사만 언뜻 봄.
└ 인기 좋지 않았냐? 왜 묻힘?
└ 좋았지. 활동 시기부터 전성기였는데 문제는 그게 너무 짧았음. 지금으로 치면 캐릭터도 너무 뻔했고, 연기력도 그닥……그냥 노래가 히트 쳐서 뜬 거고 얼빠들 많았음. 아직도 원명훈 빨아 주는 애들 많잖아. 진태경도 마찬가지고.
└ 빨…아?
└ 이 새끼 윗 댓글 그 새끼네. 아무튼 오늘 평화 길드랑 스타 길드 협동 레이드 한다는데 기대된다.
네티즌들의 전반적인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뉴스 출연 한두 번, 잡지 인터뷰만 몇 번 진행한 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상당히 좋게 비친 모양이다.
‘명훈이 형에 대한 여론도 썩 나쁘지는 않고.’
추억뽕이라고 해야 하나?
비록 썩 좋지 않은 사건으로 점차 잊혔지만, 아직 원명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내 앞에 있는 진호 형도 그중 한 사람이고.
“원명훈 사인 받아 오는 거 잊지 마. 알겠지?”
“알았어. 귀에 딱지 앉겠다.”
나는 사춘기 소녀처럼 설레하는 진호 형에게 대충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해서인지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다. 슬슬 출발해야 레이드 전 최종 점검까지 끝마칠 수 있다.
“젠장. 나도 헌터였으면 원명훈이랑 같이 레이드 뛰는 건데.”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진호 형의 표정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나도 내심 떨리긴 한다.
‘명훈이 형과 A급 게이트라.’
난생처음으로 도전하는 A급 게이트이기 때문도 있지만, 옛 우상과 함께 레이드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 * *
중, 하급 게이트가 모래알이라면 A급 게이트는 장군 바위다.
좁은 국토에 비해 게이트가 많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에서도 A급 게이트의 숫자는 적었고, 그만큼 레이드 경쟁률이 치열했다.
아직 정식 길드원이 다섯에 불과한 평화 길드로서는 매우 얻기 힘든 기회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편안하냐.’
이 중에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는데, 최 팀장과 김 집사, 송이 씨는 동네 마트 가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저희 혹시 B급 게이트로 변경됐나요?”
내 물음에 최 팀장이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A급 게이트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하세요? 혹시 저 몰래 다들 청심환 드셨어요?”
“저나 송이 씨는 많이 가 봤습니다. 아레스 길드 시절에.”
“아. 맞다.”
국내 최고, 아니 아시아 최고이자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형 길드가 바로 아레스다.
길드 자체의 힘도 힘이지만 하나같이 정예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A급 게이트라고 해도 못 갈 이유가 없다.
“그리고 김 집사님께서는…….”
이어진 최 팀장의 말에 김 집사가 빙긋 웃었다.
“전 대격변 시절에 질리도록 많이 봤습니다.”
“…….”
“제가 한창 활동할 때는 고속도로에 몬스터 군단이 지나가고, 하늘에 드레이크 무리가 날아다니고 뭐 그랬죠.”
뭐야, 그거. 무서워.
역시 대격변 세대. 짬밥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김 집사는 대외적으로는 B급 헌터로 알려져 있지만, A급 헌터이자 상동 길드장인 임춘수에게 PT 체조도 시킬 수 있는 강자다.
‘도대체 이런 양반이 여기서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
최 팀장과 김 집사의 진짜 정체와 관계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건 그렇고…….’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길드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심 가장 걱정하고 있던 한 사람. 임꺽정은 생각과 다르게 덤덤한 얼굴로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 우웨에엑!”
“…….”
괜찮긴 개뿔이. 오지게 긴장했구만.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미리 챙겨 온 검정 비닐봉지를 잽싸게 꺼내 고개를 처박았다.
한바탕 토악질을 끝낸 임꺽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괜찮아. 진짜야.”
임꺽정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애초에 D급 헌터가 A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 자체부터가 위험천만한 시도니까.
“저,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마자 임꺽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길드장님과 팀장님도 허락하셨어. 언제까지 이렇게 폐만 끼칠 수는 없잖아. 나도 경험을 쌓아야지.”
“으음.”
“태경아, 나도 처자식이 있는 몸이다. 자존심이나 치기 어린 생각으로 결정할 나이는 이미 지났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 알겠어요. 거기까지 하세요.”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임꺽정의 말을 황급히 가로막았다.
아마 다른 길드원들 비해 등급이 훨씬 떨어지다 보니 요새 많은 고민을 한 모양인데,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갔다.
“안전하게 들어가서 안전하게 나오는 겁니다. 스타 길드에서도 A급 헌터가 둘이나 오잖아요. 그것도 명훈이 형은 전 랭커 출신이고.”
양 길드를 모두 합치면 A급 헌터만 넷에 B급 헌터는 십수 명이다. 임꺽정의 공백은 충분히 메울 수 있다.
최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을 겁니다.”
신중한 성격인 그가 임꺽정의 참여를 결정했다면 그건 안전하다는 확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야지.”
임꺽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그때. 자동차 창문 너머로 우뚝 솟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흡사 하나의 마을, 아니 소도시 같은 광경.
총기를 휴대한 군인과 값비싼 장비를 걸친 헌터들이 그곳의 주민이고 경비원들이다.
“우와.”
탄성을 토해 내는 나와 달리 최 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창밖 광경을 둘러보던 최 팀장이 운전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원명훈이 특별히 보내준 리무진 버스의 운전 기사였다.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만.”
“예? 그럴 리가요.”
운전 기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A급 게이트 블랙 와이번의 둥지. 여기 맞는데요. 네비 찍고 바로 온 건데.”
“블랙 와이번의 둥지라니. 분명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명훈 씨 말로는…….”
“원명훈 씨가 누군데요? 저는 버스 회사 소속이라 잘 모릅니다. 전달받은 그대로 온 거예요.”
최 팀장과 운전수의 대화 소리가 귓가에서 윙, 윙 울렸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 3년 전 들었던 포효가 뇌리를 뒤흔들었다.
‘캬우우우우!’
까맣게 물든 눈동자와 칼날 같은 혓바닥.
동굴을 무너트리던 놈의 날갯짓과 팀원들을 찢어발기던 발톱이 생생하게 떠올라 눈 앞을 가렸다.
‘블랙 와이번.’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