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17
#216화
허공을 배회하는 와이번을 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작구나.’
머리부터 꼬리까지. 20여 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몸뚱이와 날개였지만 내게는 아무런 위압감도 주지 못했다.
3년 전의 그놈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강해져서? 아냐, 놈은 훨씬 크고 강했어.’
녀석은 온통 새카만 흑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반면 지금 상공에서 배회하는 저 와이번의 몸통은 환한 녹색이다.
선두의 원명훈이 힘찬 목소리로 와이번의 정체를 알렸다.
“그린 와이번이다! 비교적 약한 개체니까 다들 침착하게 행동해!”
이어 30대 초반의 남자가 타워 실드를 땅에 박아 넣으며 외쳤다.
“대형 갖춰!”
스타 길드가 보유한 두 번째 A급 헌터이자 1팀장인 그의 지시에 탱커들이 우르르 달려가 방패의 벽을 쌓는다.
“태경아, 몸조심해라!”
황급히 한마디를 던진 임꺽정도 힘찬 함성을 내지르며 탱커들의 벽에 합류했다.
쿵! 쿵쿵쿵!
1열, 그리고 2열. 크고 아름다운 타워 실드가 겹겹이 덧대어지며 곡선의 방어막을 형성한다.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와 힐러들이 주문을 외웠다.
“바람이 깃든다. 헤이스트(Haste)!”
“바위도 부수는 힘. 스트렝스(Strength)!”
“지친 육신에 생기를, 힐링(Healing)!”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 나가는 환한 빛무리.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마법의 효과로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 [민첩]이 10 상승했습니다!
– [근력]이 10 상승했습니다!
– 피로가 회복되었습니다!
괜히 마법사, 힐러들을 철밥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마약 3종 세트라 불리는 버프 마법의 효과는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다.
‘다들 B급이라 그런가?’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은 어디를 가도 대접받을 수 있는 재원들.
그러나 상공을 날아다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린 와이번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자그마치 A급 몬스터니까.
– 끼아아아악!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놈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다.
다음 순간, 멀리서도 눈에 띄는 녹색 점액질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독이다!”
“산개!”
누군가는 탱커들이 쳐 놓은 방패 벽 뒤로 몸을 피했고, 다른 누군가는 근처의 엄폐물을 찾아 몸을 날렸다.
나는 후자였다. 집채만 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기자마자 녹색 빗줄기가 반경 30여 미터를 뒤덮었다.
투투툭, 치이이이익!
독. 그것도 산성(酸性) 독이다.
바위 표면에 닿자마자 구멍이 숭숭 뚫리고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와이번은 와이번이라 이거지.’
호랑이 새끼도 호랑이다.
와이번 중에서 비교적 약한 개체라는 그린 와이번이지만 발출되는 속도도 빠르고 산성의 위력도 굉장했다. 어중간한 중, 하급 헌터들이었다면 장비 채 녹아내렸을 것이다.
“1팀장. 사상자 보고.”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는 대부분 B급 헌터들.
유일한 구멍이라고 할 수 있는 임꺽정조차 2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부족한 신체 능력은 최 팀장의 최고급 장비가 메워 주니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원명훈과는 달리 그린 와이번은 뿔이 단단히 났다.
– 캬륵! 끼아아아악!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으로 우리를 노려보던 그린 와이번이 돌연 날개를 접었다.
유유히 하늘을 누비던 거대한 동체가 지면을 향해 기우뚱 기울더니 급강하를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무려 수백 미터 상공에서 내리꽂히는 와이번의 모습은 비행기 추락을 연상케 했다.
산성 독은 방패로 막을 수나 있지, 저건 충돌하는 순간 골로 간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공포에 질린 임꺽정이 비명을 내질렀다.
“여보! 진우야! 소원아!”
이러다가 오촌 당숙 이름까지 나오겠다.
하지만 그런 임꺽정과는 달리 스타 길드원들은 덤덤했다.
심지어 원명훈은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태경아, 형이 좋은 거 보여 줄까?”
“……지금요?”
“어.”
그보다는 차라리 산개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충돌까지는 아직 수십 초가 남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여유를 부리다니.
“똑똑히 봐 둬. 너한테 도움이 될 테니까.”
한마디를 툭 던진 원명훈이 창을 역수(逆手)로 고쳐 잡았다.
“후읍.”
촘촘한 근육 위로 핏줄이 불끈 솟고, 막대한 기운이 그의 창을 향해 물밀 듯이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창날에 어리는 희미한 빛줄기.
츠츠츠츠.
그것은 창기(槍氣). 현대에서는 오러(Aura)라 불리는 강력한 기의 집약체였다.
– 키야우우우!
그 힘을 느껴서일까? 그린 와이번이 포효와 함께 몸을 틀었다. 정확히 나와 원명훈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그리고 다음 순간.
탁, 콰쾅!
원명훈이 힘차게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지막으로 세 걸음.
어느새 검은 점에 불과하던 그린 와이번은 불과 수 미터 위에 있었다. 농구공만큼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우둘투둘한 비늘로 덮인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날카로운 이빨이 작은 먹잇감을 덮치려던 그때.
“합!”
힘찬 기합과 함께 원명훈의 손아귀에서 빛이 쏘아졌다.
쐐애애애애액! 퍼걱!
오러가 서린 한 자루의 창이 그린 와이번의 목을 꿰뚫었다. 붉은 핏물, 그리고 녹색 산성 독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동공이 축소되고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체가 몸부림쳤다.
– 끼익! 끼이이이익!
쾅! 콰과광!
바위, 나무. 가릴 것 없이 부서지고 날아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린 와이번의 날개가 파르르 경련했다.
불과 몇 초 후, 꼿꼿하게 서 있던 놈의 꼬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끼우우우…….
단말마와 함께 흉포하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뒤이어 놈의 죽음을 증명하듯 시스템 알림이 울려 퍼졌다.
띠링.
– [Lv.97 그린 와이번]을 처치했습니다!
–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므로 경험치가 지급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 이건 오직 한 사람의 공로니까.
눈앞에 뜬 홀로그램 창을 지우자 그린 와이번의 사체에서 창을 뽑아내는 원명훈이 보였다.
“역시 길드장님!”
“랭커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오러 잘 봤습니다!”
“랭커는 무슨. 다 옛날 얘기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스타 길드원들의 환호 소리에 씩 웃어 보인 원명훈이 내게 다가왔다.
“잘 봤어?”
“어, 네.”
“오러를 직접 본 건 처음이지?”
“그…… 그렇죠.”
“하하, 놀라긴 했나 보네. 말도 더듬을 정도면.”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죽하겠습니까?”
스타 길드의 이인자이자 오늘 레이드 팀의 메인 탱커인 1팀장이다.
족제비를 닮은 그는 내 팔을 툭 치며 넉살을 떨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뭐 저런 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오러를 사용할 줄 알아야 진정한 A급 헌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원명훈이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금칠 그만해, 인마. 쪽팔리게.”
“에이, 금칠은 무슨. 실력 좋은 게 사실이지, 허풍인가? 진태경 헌터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아요?”
“어…… 그렇죠.”
“그것 보세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다행히도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원명훈이 입을 열었다.
“넌 다 좋은데, 아부가 많아서 탈이다. 금칠 적당히 했으면 애들 시켜서 뒷정리나 해. 장비도 다시 점검해 보고.”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충성!”
과장스럽게 경례까지 척 붙인 1팀장이 몸을 돌렸다.
“저 자식이 원래 그래. 가볍고 덤벙거리는 성격이라 계약서도 잘못 보내고…….”
멀어지는 1팀장의 뒷모습을 보며 말하던 원명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태경아.”
“네?”
“괜찮아?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
“와이번 때문에 그런가? 뭐, 너는 A급 게이트가 처음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차차 괜찮아질 거야.”
“…….”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임금님의 당나귀 귀를 본 이발사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닌데.’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원명훈을 바라봤다.
큰 키에 길쭉한 기럭지. 곧 마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동안.
하지만 내가 그를 동경했던 진짜 이유는 화려한 외모나 입에 착착 달라붙는 히트곡 때문이 아니었다.
‘A급 헌터, 창의 달인. 그리고 랭커.’
아주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 우상은 스타 원명훈이 아니라 헌터 원명훈이었다.
헌터 일을 시작하며 창을 고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원명훈이 랭커 시절 만든 창술 교본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약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원명훈의 전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상상 이상이었다.
‘움직임은 느려 터졌고, 겉멋은 잔뜩 들어가 있고. 그렇다고 오러를 제대로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보다가 답답해서 뇌졸중이 올 뻔했다.
원명훈이 원래 이 정도 실력이었나? 아니면 퇴보한 건가?
의문투성이지만 지금 내 머릿속을 한 줄 요약하자면 이거다.
‘이게 뭐여, 시벌.’
억울하다. 딱히 억울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뭔가 엄청나게 억울하다!
7성 호텔 코스 요리를 예약했는데 명태 순살 조림과 육고기 비빔 소스가 나온 기분이랄까.
‘아, 내가 생각한 건 이건 아닌데. 진짜 아닌데.’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원명훈은 여전히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목걸이는 어디 갔어? 안 보이는데.”
이 시국에 목걸이가 문제냐.
왠지 모를 허탈감에 휩싸인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뒀어요.”
“왜?”
“그냥요. 거추장스러워서. 그런데 왜요?”
“아냐. 상관없어. 잘 갖고만 있으면 돼.”
원명훈의 시선이 흘끗 내 하반신을 향했다.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의 주머니가 불룩 솟아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덧붙였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잃어버릴 수가 없다. 아니, 만약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
‘내 물건은 소중하니까.’
무림과 현실의 신체가 같다는 건 참 좋은 거다.
바지 안에 똬리를 튼 블랙 아나콘다를 떠올리자 우울했던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 * *
헌터들이 그린 와이번을 해체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원명훈은 1팀장과 함께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목걸이, 효과 좋더라.”
1팀장이 씩 웃었다.
“그거 어렵게 구한 겁니다. 마법으로 훑어봐도 안 걸려요.”
“그래, 잘하긴 했는데…….”
원명훈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효과가 생각 이상이야. 아직 밀림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와이번이 나올 정도니까.”
“그냥 우연 아닐까요? 아주 드문 일도 아니잖아요.”
“8년 전 그때도 우연이었지.”
“……별수 있겠습니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곳이 게이트인데.”
“그래서 내가 게이트를 싫어하는 거야. 사람들은 얼추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알 수 있겠는데 이 좆 같은 공간은 그게 안 되거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원명훈이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닿는 곳마다 풀과 나무, 이상한 벌레 천지다. 그는 한 시라도 빨리 빌딩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슬슬 시작하자. 그린 와이번이 아니라 좀 더 크고 강한 놈이 와 줘야 돼.”
“그래야 살아남은 목격자들이 증언을 해 줄 테니까?”
“똑똑한 새끼.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아요.”
원명훈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