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32
#231화
“아미타불, 자, 잠시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기죽은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낡은 승복을 걸친 젊은 스님이었다.
한 손에 커다란 염주를 쥔 그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 가며 흑도 칼잡이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어. 이것 봐라.”
“어어어?”
난데없이 나타난 스님의 겁 없는 행동에 칼잡이들은 당황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몇몇이 그를 막아섰지만 되려 속절없이 밀렸다.
“이, 이거 뭐야?”
“헉. 뭔 놈의 힘이…….”
주르륵, 퉁!
누가 달려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스님의 낡고 헐렁한 승복 안에 엄청난 근육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람한 팔뚝과 불끈거리는 핏줄. 얼핏 보기에는 적당한 체형의 소유자지만 저건 실전 압축형 근육이다.
‘와, 근육 봐라. 미쳤네.’
저 정도면 승복이 아니라 언더아머를 입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홀로 감탄하는 사이, 수십 명의 흑도 칼잡이 사이를 통과한 스님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우…….”
그걸 보고만 있을 거한이 아니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썹은 계속 실룩거렸다.
나와 스님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 천천히 해. 기다려 줄게.”
“……그거 고맙군.”
뿌드득.
나를 향해 이를 간 녀석이 스님의 앞을 가로막았다.
“뉘슈?”
“빈승(貧僧)은…….”
“됐고.”
날카로운 눈빛이 스님의 위아래를 훑었다.
“중이라고?”
“물론입니다.”
“이마에 계인(契印)도 안 찍혀 있는데?”
스님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직 수행이 짧아 그리되었습니다.”
“수행이라. 법명은?”
“그 역시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계인도, 법명도 없는 중이라 이거지…….”
낮게 뇌까린 거한이 피식 웃으며 수하들에게 물었다.
“껍데기만 보면 딱 우리 쪽인데. 안 그러냐?”
“맞습니다!”
“일 잘하게 생겼는데요? 막내로 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껄껄 웃은 거한이 돌연 얼굴을 굳히고 스님을 노려봤다.
“어디에서 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아. 새꺄. 어디에서 왔냐고. 독룡파? 아니면 흑혈문이냐?”
“도, 독룡파와 흑혈문이라니요. 빈승은 소림(少林)에서 왔습니다.”
“뭐? 소림? 숭산의 소림사?”
“예.”
소림사라니. 이거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는데.
뒤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적천강마저 고개를 돌려 사태를 관전하기 시작했다.
“노야, 소림사라는데요?”
“조용히 해라. 버르장머리 없는 네 녀석을 어떻게 손봐 줄까 생각 중이니까.”
“…….”
그건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인데.
아마 지금 내 표정이 저 스님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커다랗게 폭소하는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하하하! 소림사? 소림사라고?”
“시, 시주. 왜 웃으시는 겁니까?”
“시주는, 시발.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 같은 놈이 누구 앞에서 이빨을 까!”
쾅!
거한의 주먹질에 단단한 벽면이 박살 났다.
기껏해야 이, 삼류로 이루어진 수하들과는 달리 그는 어디를 가도 절정 고수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무력의 소유자였다.
그래 봤자 간신히 초입에 든 정도지만.
“이 개새끼가…… 우리 동천파가 우습냐?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시주, 흥분하신 것 같으니 진정하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진정은 개뿔이!”
쾅!
그나마 남아 있던 잔재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객잔 주인의 마음도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응당 이마에 찍혀 있어야 할 계인도, 법명도 없고, 생긴 건 훌륭한 흑도 같은 놈이 중이라고? 야, 이 새끼야. 차라리 소림 방장이 네 스승이라고 해라!”
“헉, 시주께서 그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젊은 스님의 반응에 거한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을 찍었다.
“이런 개후레……!”
쐐액!
뾰족한 강철 가시가 솟아나 있는 철퇴가 스님을 향해 쏘아진다. 경험이 풍부한 일류 고수답게 능숙하고 깔끔한 궤적.
헉, 하고 헛숨을 삼킨 스님이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치켜세웠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객잔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군중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위험해!”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뭔가가 우수수 쏟아진다.
작고 뾰족한 그것은, 놀랍게도 철퇴에 튀어나와 있던 강철 가시였다.
“……어?”
거한이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철퇴를 바라보던 그때, 젊은 스님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시주께서 먼저 시작하신 겁니다!”
“자, 잠깐만!”
그러나 상황은 이미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촤르르륵!
괴상하게 보일 정도로 커다란 염주가 스님의 팔 전체를 휘감았다.
손가락 사이 사이마다 끼워진 염주 알에서는 어쩐지 낯익은 광택이 흘렀다.
아니, 잠깐만. 저거 설마…….
‘만년한철?’
섬광 같은 깨달음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드드득! 뻑!
철퇴를 산산조각 낸 일권(一拳)이 그대로 거한의 옆구리에 꽂혔다.
“커헉!”
고통을 이기지 못해 딱 벌어진 놈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자, 잠깐만!”
거한은 다급하게 외쳤으나 상대에게 닿지 못할,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젊은 스님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아미타불!”
퍽!
“나무!”
빠각!
“관세음보살!”
우두둑!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부울!”
퍼버버버벅!
때리고, 부수고, 때린 곳을 또 때린다.
영롱하게 빛나는 염주 알이 솟구칠 때마다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오메, 시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스님이 이길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저런 미친놈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 저건.”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적천강도 입을 딱 벌렸다.
“나한권(羅漢拳)!”
“나한이라면 소림사의 그 백팔 나한?”
“마, 맞다. 소림의 무공이 확실하다.”
“……저게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눈이 반쯤 뒤집힌 젊은 스님은 쓰러진 거한을 향해 마지막 피니쉬를 날리고 있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엑!!”
빠바바박!
잔혹한 폭력과 피로 점철된 현장. 나는 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요, 노야.”
“말해라.”
“저거 진짜 소림사 무공 맞아요?”
“……일단은.”
“그런데 왜 부처의 자비로움, 뭐 그런 것들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걸까요.”
잠시 후, 적천강의 입에서 짧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살생은 안 했잖아.”
“…….”
저 정도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아 보이는데.
그러나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쩔그럭, 쩔그럭.
걸음마다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염주와 피로 흠뻑 젖은 승복,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기.”
“예?”
“실례지만 혹시 시주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왜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젊은 살인마, 아니 스님은 소심한 걸음걸이로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혹 진가 성을 쓰시는 분이 아니신지…….”
“죄송해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맞다. 이 녀석이 진태경이다.”
적천강의 끼어들기에 나는 즉시 말을 바꿨다.
“맞아요. 장난 좀 쳐 봤습니다. 기분 나쁘셨던 건 아니죠?”
“아미타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염주를 힐끗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기쁨에 찬 웃음이 선명히 떠올라 있었다.
턱 밑에 핏방울이 튀어 있지 않았다면 이게 부처의 웃음이구나,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는 왜 찾으셨어요?”
“빈승은 신성(晨星)의 주인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무슨 주인?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혹 굉도(宏道)를 아느냐?”
“예. 그분이 제 스승님이십니다.”
“……허, 신통한 땡중 같으니.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건 여전하군.”
“하면 시주께서 화왕 적천강 대협이시겠군요.”
“그것도 네 스승이 알려 주더냐?”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젊은 스님의 모습에 적천강이 피식 웃었다.
“긴말할 필요 없겠군. 굉도에게 안내하거라.”
“예.”
스님의 탈을 쓴 염라대왕이 앞장서자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나는 잠시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적천강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노야, 굉도가 누구예요?”
“소림 방장.”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적천강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는 법왕(法王)이라 불리지.”
“……!”
* * *
무명(無名).
그것이 법왕 굉도의 제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스님의 법명이었다.
아니, 그건 사실 법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뜻 자체가 아무런 이름도 없다는 것이니까.
“늙어도 여전하군. 제자한테 지어 준 법명이 저 모양이라니.”
적천강이 혀를 차자 무명이 쑥스럽게 웃었다.
“스승님께서 붙여 주셨으니 그것이 제 이름이고 법명이지요.”
“노부가 보아하니 정식으로 들인 제자도 아닌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아무런 아쉬움도 없느냐?”
“다 하늘의 뜻 아니겠습니까.”
하늘을 가리키며 맑게 웃어 보이는 무명의 모습에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자를 골라도 참, 뭐랄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적천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특이한 녀석을 골랐고.”
“헤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
웃지 마. 그거 칭찬 아냐. 그리고 아미타불도 하지 마.
아직도 눈만 감으면 피에 젖은 무명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웃는 얼굴을 보면 생불(生佛)이 따로 없는데, 손가락 사이에 염주 알만 끼우면 반경 10m를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희한한 놈이었다.
‘이 자식이 제일 무서워.’
반나절 동안 함께 이동하며 들은 바로는,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이라 한 번 눈이 돌아 버리면 주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적천강은 몇 차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심지어 그의 정확한 병명까지 알고 있다.
‘분노 조절 장애.’
이 정도면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수준이다.
아까부터 가급적이면 무명의 뒤에서 이동하려는 이유도 그 탓이었다.
분노 조절 장애를 앓고 있는 절정 고수가 만년한철 염주로 내 목을 조를 수도 있으니까.
‘염주로 목을 조르다니, 절대 안 되지…….’
다행히 낙양에서 숭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리 위치상 인접해 있을뿐더러, 소림사를 찾는 참배객들이 많은 탓에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숭산의 초입에 다다르자 저 멀리 목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한 겁니까?”
내 물음에 적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소실봉 중턱까지는 올라가야 하지. 별다른 목적 없이 온 방문객들은 지객당(知客堂)에만 머물러야 하고.”
“잘 아시네요. 자주 와 보셨어요?”
“자주 들었지.”
“아.”
하기야 소림 방장이 친구인데 저 정도는 당연한 건가?
말에서 내려 소실봉을 오르던 적천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게으른 취미는 여전하군. 아직도 하루에 다섯 시진씩 자나?”
다음 순간, 한참 위 평평한 납작 바위에서 난데없이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오직 적천강 정도의 고수만이 느낄 수 있었던 인기척이었다.
“음. 다섯 시진이라. 그런 시절도 있었지.”
마치 고찰(古刹)의 종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나직했지만 중후했고, 깊은 울림이 있었다.
“소림 방장은 막중한 직책이지. 예전만큼 잘 수가 없어.”
“그런가?”
“아무렴. 팔자 좋은 열화문주 따위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책임감이라네.”
적천강과 굉도는 마치 어제 만난 친구를 대하듯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몇 시진이나 자나?”
“음. 그게 그러니까…….”
쉬이익.
수십 미터 위의 납작 바위에서 검은 인영이 천천히 떨어졌다.
아주 천천히, 허공을 밟으며 내려앉은 법왕(法王) 굉도가 아이처럼 웃었다.
“한, 네 시진밖에 못 자지.”
“게을러 터졌군.”
화왕(火王) 적천강의 입가에도 웃음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