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73
#472화
푸푹!
눈동자를 가르며 파고드는 열기는 뜨거웠고 이어지는 고통은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차가웠다.
불길처럼 번지는 통증에, 변이된 수신룡은 고통으로 가득 찬 포효를 내질렀다.
– 크롸아아아아!
아름드리나무 십여 그루를 한데 뭉쳐 놓은 듯한 몸통의 두께와 삼십여 장을 훌쩍 넘기는 길이.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동체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자 엄청난 여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꽈앙! 콰과과과광!
앞서 날려 보낸 기암괴석이 수백, 수천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터져 나가고 흙과 물의 장벽이 솟구쳤다.
마치 집중 포격을 맞은 것처럼 사방이 초토화되는 가운데, 이 혼란 사이를 쾌속하게 가로지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쉬쉬쉭!
누군가는 괴물을 향해 달려들고, 누군가는 괴물의 몸부림을 피해 멀찍이 물러난다. 제갈세가의 당대 가주, 와룡객 제갈풍은 그중 후자에 속했다.
비로소 이성을 되찾게 된 그는 아연한 시선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천기(天氣)가 일그러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괴력난신의 존재까지 나타나는가.’
제갈풍은 영물, 혹은 악물이라 불리는 것들에 관한 숱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저 용을 닮은 괴물은 모든 상식을 파괴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벌어진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무림뿐만 아니라 천하가 경악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어찌 이런 일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려움으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떠는 제갈풍을 향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과 함께 이곳에 계세요. 엄폐물 뒤에 숨어서 최대한 안전하게.”
무림인이라면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무림인이라는 족속은 자신의 무공과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주유하는 자들이니까.
제갈풍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가?”
“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물었네.”
청풍이 대답했다.
“네. 제갈퐁 대협.”
“제갈퐁이 아니라 제갈풍일세. 여하튼 자네 역시 내가 제갈세가의 가주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어어, 알고 있긴 한데요…….”
“한데, 자네는 제갈세가의 가주에게 겁쟁이처럼 숨으라는 것인가?”
고민하던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편이 훨씬 안전하니까요.”
“좋아. 그럼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야겠군.”
“네?”
“이곳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나? 괜히 개죽음당하는 것보다야 겁쟁이가 훨씬 낫지.”
“……?”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단지 오늘은 내가 나서야 할 싸움이 아닐 뿐이니까. 본가의 선조이신 제갈무후(諸葛武侯)께서 선봉에서 적들을 베어 넘기지 않으신 것과 같은 이치지.”
제갈풍은 자신의 위치와 해야 할 일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무인의 자존심에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나도 냉철한 사람이고, 수많은 가솔을 거느린 일가의 가주니까.
“이 거대한 전란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향후 벌어질 전투에서 내 가치를 증명할 날이 오겠지. 그러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게. 이들은 내가 잘 보호하고 있을 테니.”
묘한 눈빛으로 제갈풍을 바라보던 청풍이 목례와 함께 돌아섰다.
이내 한 줄기의 바람이 되어 멀어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갈풍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또 다른 난세의 시작이로구나.’
오십여 년간 이어졌던 평화는 막을 내렸다. 검게 물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새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 전장을 향해 쏘아지는 청풍 역시 그 바람 중 하나다.
‘무후(武侯)시여.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 불민한 후손이 나설 자리가 없을 듯합니다.’
제갈풍이 마음속으로 작게 뇌까리던 그때, 등 뒤에서 넋 나간 목소리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기 괴물이 보이는데. 꿈인가?”
“꿈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혁가 너, 바지가 왜 그렇게 축축해?”
“비 오잖아요. 젖었나 봐요.”
“빗물치고는 샛노란데.”
“그럴 수 있죠.”
“그런가? 거 참 희한하네. 그나저나 이거 진짜 꿈 아닌가?”
“꿈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다. 꿈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혁가 너, 바지가 왜 그렇게 축축…….”
“…….”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풍은 오줌 지린내를 피해 슬쩍 걸음을 옮겼다.
흙과 모래가 쌓이고 쌓여 작은 동산을 만들어 낸 언덕 위.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신화 속 한 장면을 옮겨다 놓은 듯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쉭, 서걱!
한 줄기의 은빛 선이 공간을 가르자 덮쳐오던 모든 것들이 베어졌다.
파팟! 허깨비처럼 사라진 문경의 신형이 허공에 떠오른 돌조각을 밟고 솟구친 순간.
후우우웅!
물보라와 먼지구름을 헤치며 덮쳐오는 거대한 무언가.
그것의 정체가 흑색 비늘로 뒤덮인 꼬리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빠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크기의 체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쾌속한 움직임. 문경은 호흡과 함께 소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츠츠츠츠!
조용하게, 그러나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끌어올린 공력이 소검을 휘감았다.
천하의 어떤 것보다 파괴적이고 예리한 힘. 강기가 검신을 타고 솟구쳤다.
극쾌(極快)의 묘리를 담은 일 초가 고금제일 살수의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단숨에 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덮쳐 오는 꼬리를 향해 비스듬히 일검을 내리그은 문경은 자신의 오판을 깨달았다.
서걱.
분명 베었음에도 전해지는 반발력이 터무니없이 강하다.
소검에 실린 강기가 베어야 하는 것은 흑색 비늘뿐만이 아니었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비늘에 숨겨진 것은 무쇠 같은 살과 근육. 그리고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는 뼈였다.
‘이런.’
문경은 내심 혀를 찼다.
강기. 그것도 다름 아닌 고금제일 살수의 깨달음이 녹아든 강기다.
이 괴물의 몸뚱어리가 제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그의 강기라면 단숨에 베어 버릴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두께였다.
직경만 이 장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꼬리의 두께.
거기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피륙의 강도까지 더한다면…….
‘일격으로 단번에 베어 내는 것은 무리겠군.’
평소였다면 모를까, 피어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는 자신의 무위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경은 판단과 동시에 검파를 잡은 손목을 비틀었다.
비늘을 베고 살과 근육을 갈라가던 검날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검의 옆면으로 꼬리에 실린 힘을 흘려보냈다.
카가각, 후웅!
작고 호리호리한 신형이 허공으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쾅!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은 문경이 유령환살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움직임으로 내려서자, 옆에서 날아드는 기암괴석을 일장으로 녹여 버린 적천강이 놀리듯이 중얼거렸다.
“반로환동 하더니 무공도 어린애가 됐나?”
“힘과 속도. 모두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군.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리로도 완전히 흘리지 못했어.”
“혓바닥도 길어졌고.”
문경이 건조한 눈빛으로 적천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도발하는 것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지. 시기가 영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도발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야. 아까 노부가 한 대 치니까 저놈이 픽 쓰러지는 꼴 못 봤어?”
“그건 내가 먼저 놈의 뿔을 자른 상황에서…….”
취리리리릭! 콰앙!
터져 나온 굉음이 이어지려던 문경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신형을 날린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이 있던 자리는 온통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해괴한 놈이로다. 악물(惡物) 주제에 강기를 구사해?”
“강기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검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다. 분명 내공심법은 아닌데…… 오랜 세월 축적된 기운으로 이런 기예를 구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야.”
기운을 품는 것과 기운을 활용, 발산하는 것은 궤를 달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괴물은 두 사람이 갖고 있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장강일도와 동정채를 전멸시킨 것도 저것의 소행인가.’
재차 날아드는 공격을 피한 문경은 심유한 눈빛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소 두 명 이상의 초절정 고수가 동정채를 습격했다고 짐작했지만, 저 상상치도 못한 괴물을 마주하니 비로소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저 괴이한 수염과 거대한 몸집…… 틀림없다. 시신들에 남아 있던 흔적과 유사해.’
꼬리와 수염을 이용하여 닥치는 대로 뭉개고 베어 버렸을 광경이 눈앞에 선했다.
더불어 모두가 물고기 떼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생각한 장강일도의 시신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죽어서 뜯어 먹힌 것이 아니라, 뜯어 먹혔기에 죽었던 거였어.’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용을 닮은 거대한 괴물이 뱃길로도 막혀 있는, 오직 물고기들만이 오갈 수 있는 물속 깊숙한 지류를 통해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목격자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괴물이 따로 없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은 수백의 절정 고수, 혹은 초절정 고수 두 세명과 비견될 만한 힘을 지닌 괴력난신의 존재다.
그리고 그런 문경의 탄식에 적천강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맞아. 괴물이지.”
“이런 불가사의한 존재가 정말 있을 줄이야.”
“볼 때마다 놀라운 놈이야. 그래서 미련이 생기고는 하지. 더, 조금 더 노부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
“지금 무슨…….”
그제야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문경이 적천강을 바라보았다. 감출 수 없는 세월이 서린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봐, 살성. 그거 알고 있나?”
후우우웅!
천하를 쪼갤 듯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그림자.
자신의 자그마한 체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흑색 꼬리를 올려다보던 적천강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놈은 말이야. 노부가 지금껏 살아오며 본 것 중 가장 기이하고 무서운 괴물이라네.”
“위험……!”
문경이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콰과과광! 푸화아아악!
거대한 굉음과 진동이 반경 수십여 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우뚝 선 적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그와 달리, 흑색 비늘로 뒤덮인 꼬리는 한참 벗어난 곳을 직격한 후였다.
“그래, 그렇고 말고. 역시 괴물은 괴물로 상대해야 제격인 게야.”
“……!”
투두두둑.
껄껄 소리 내어 웃는 적천강의 머리 위, 괴물의 검푸른 핏물이 비바람과 섞여 쏟아져 내렸다.
괴물의 거대한 동체를 향해 고개를 돌린 문경과 막 전장으로 복귀한 청풍은 마침내 볼 수 있었다.
– 그워어어어어!
몸부림치는 괴물과, 까마득한 높이에 있는 놈의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맨손으로 수염을 잡아 뜯는 누군가의 모습을.
“민머리! 대머리! 맨들맨들 빡빡이!”
뽁! 뽁! 뽀보보보복!
– 크뤄어어어어어!
수신룡의 구슬픈 비명이 비바람을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