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79
#478화
처음부터 그곳을 노렸던 것은 아니다. 아니, 몰랐다.
이건 울창한 숲속에 숨어 있는 다람쥐를 쉽게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곳을 발견하기에는 변이된 수신룡의 동체는 실로 거대했고, 놈이 전투 도중에도 철저히 보호했던 부위에 그런 빈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건.’
있었다. 이 거대한 괴물의 질긴 숨통을 끊을 만한 약점이.
그리고 나는 이 싸움을 끝낼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푹!
– 크륵……!
생물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주위 환경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며 진화하니까.
이제 고작 평균 수명 100년을 바라보는 인간도 그럴진대, 수백 년을 살아온 이 지고한 존재라고 다를 리 없다.
‘우연인가? 아니면 운명?’
둘 중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가장 단단한 비늘로 둘러싸여 있던 놈의 목덜미 부위에 딱 비늘 한 장만큼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생했다.”
마지막으로 건네는 덕담은 오직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
목 아랫부분, 인간이었다면 목젖이 있어야 할 그 부위에 정확히 창날을 꽂아 넣은 나는, 창대를 쥔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그대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푸욱-!
크르륵. 헛숨을 들이키는 듯한 짧은 신음과 함께 비늘에 뒤덮인 턱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칠흑색 동공이 흔들리고, 한껏 벌린 아가리의 끝에서 완성을 코앞에 둔 물의 구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완성되지 못한 워터 브레스는 단순한 물에 불과한 것.
나는 정수리를 향해 쏟아지는 물벼락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
유난히도 서늘한 동정호의 강물이 전신을 흠뻑 적시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겼다.’
동시에 짜릿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솟구쳤다.
길고 치열했던 전투의 끝.
나는 다시 한번 살아남았고 강적의 목에 창날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목숨을 건 싸움의 끝은 오직 두 단어로 귀결된다.
수직과 수평.
우뚝 선 승자와 쓰러지는 패자.
비록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악물(惡物)이라 할지라도, 이 절대적인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후우우웅. 촤악!
한때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대한 힘을 품었던 동체가 허물어지고, 이내 동정호의 강물 위로 쓰러진다.
높게 솟구치는 물보라 사이로 천천히 깜빡이는 눈동자와 잘게 떨리는 주둥이가 보였다.
아니.
들렸다.
– 그대로군.
“……!”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숨통을 끊기 위해 재차 창을 밀어 넣으려던 손에 힘이 풀렸다.
뭔가에 홀린 듯 변이된 수신룡의 거대한 눈동자를 바라본 나는, 그대로 몸이 덜컥 굳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온통 칠흑빛으로 번들거리던, 흉성(凶星)을 띤 괴물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바탕 비바람을 쏟아 낸 어느 날의 먹구름이 걷힌 것처럼, 푸른 하늘을 닮은 맑고 깊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 놀랄 것 없네. 오백 년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능력이니까.
“……전음(傳音)?”
– 글쎄, 그보다는 의념(疑念)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변이된 수신룡, 아니 동정호의 이각수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닌 신령스러운 존재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념을 흘려보냈다.
– 그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대를 알지.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야. 단순한 미몽(迷夢)이라 여겨 잊고 있었건만……. 그래, 이 또한 순리겠지.
꿈? 순리?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이게, 이게 그러니까.”
– 허.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내 모습이 퍽 우스웠던 모양이다. 피로 흠뻑 젖은 수신룡의 입가에서 그르릉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말게. 수행이 부족하여 승천(昇天)하지 못한 늙은 이무기의 푸념일 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애석한 점이 있다면, 내게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일세.
수신룡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육신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깊은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제기랄.’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수신룡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기도 했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쉽기도 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정신을 차린 이 영험한 존재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니까.
‘암천(暗天).’
신령스럽고도 지혜로운 이무기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을 살육하는 미친 악물이 되었을 리는 없다.
분명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현재 무림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용의 선상에서 가장 윗줄을 차지하는 암천을 빼놓을 수 없다.
“누가, 어떻게 한 겁니까.”
짧지만 모든 것이 담긴 질문.
그러나 곧이어 머릿속에 울려 퍼진 수신룡의 의념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 직접 보도록 하게.
“예?”
내 반문에 수신룡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스륵.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 고인 푸른 액체. 모두가 눈물이라 부르는 그것이 천천히 비늘 위를 미끄러져 내 몸에 닿은 순간, 나는 앞서 수신룡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띠링.
– [수신룡]이 당신에게 자신의 기억 중 일부를 전하고자 합니다.
– [기억의 파편]을 습득했습니다.
– [기억의 파편]에 서린 힘이 당신을 수신룡의 기억으로 이끕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수신룡의 눈물이 장막처럼 펼쳐져 내 눈앞에 드리워졌다.
솨아아아.
시원한 물의 감촉과 함께, 세상이 멈췄다.
* * *
그건 말 그대로 기억의 파편이었다.
수신룡이 간직한 오백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하지만 변이의 영향 때문인지 부분부분 깨져 나가 어떤 부분은 흐릿하고 어느 부분은 또렷한 기억의 파편.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탄생이었다.
– 꾸룩?
동정호의 깊은 물 속 어딘가, 갓 태어난 작은 생명체가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춤을 추듯 넘실거리는 수초(水草)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중 생물들이 모인 자리.
신령스러운 존재의 탄생을 알아차린 백성들이 기뻐하며 물살을 가르며 헤엄친다.
그날은 동정호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한 경사스러운 날이었고, 성대한 즉위식이 열린 날이었다.
– 구룩? 꾹!
강아지처럼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새로운 강의 주인은 이내 자그마한 몸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탄생과 동시에 눈부신 지혜와 힘을 부여받은 존재가 움직이자, 수많은 생물이 그의 뒤를 따르고 강물마저 길을 비켰다.
촤아아아악!
유연하면서도 힘차게 동정호의 강물을 가르던 몸집이 서서히 크기를 부풀렸다.
작고 부드럽던 분홍색 몸통에는 은빛 비늘이 돋아났고, 콧잔등 아래에는 위엄이 서린 수염이 제법 길게 자라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수십 년, 혹은 더욱 긴 시간 동안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 신령스러운 존재를 목격한 사람들은 경의를 담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 역시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수신룡(水神龍).’
이마에 난 두 개의 뿔 덕분인지 이각수(二角獸)라고도 불렸지만, 대부분은 이 아름답고도 신비한 존재를 짐승이라 부르기를 꺼렸고, 동정호의 신령으로 떠받들었다.
그리고 인간들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얻은 이무기는 종종, 정말로 신령 같은 일들을 해내고는 했다.
익사 직전의 상태에 빠진 뱃사람들을 구해 내어 인적 드문 뭍에 데려다 놓기도 하고, 타고난 능력을 이용해 난폭한 물살을 잠재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뿐인가. 한때 장강을 피로 물들였던 악물(惡物)을 쓰러트린 것도 바로 수신룡이었다.
거북이의 형태를 한 악물을 치열한 싸움 끝에 쓰러트린 수신룡은 동정호와 장강을 지배하게 되었다.
세월은 유수(流水)와도 같은 법.
그렇게 장장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수신룡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는 강대한 힘과 깊은 지혜를 지닌 선한 이무기였고, 백성을 생각할 줄 아는 훌륭한 지배자였다.
그러나 그런 수신룡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 허어, 하계(下界)에서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구나.
긴 세월 수신룡이 목격한 참상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반목하며 싸웠고, 그럴 때마다 무수한 피와 시체가 강물에 흩뿌려졌다.
두 개의 제국이 몰락하고 전란이 이어지자 수신룡은 근심했고, 지쳐 갔다.
– 이미 아득히 긴 세월을 하계에서 보냈건만, 도대체 나는 언제쯤 승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동정호의 신령이요, 용이라며 떠받들어도 결국 수신룡의 본질은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그런 수신룡에게 승천이라는 목표는 탄생과 함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원망스러울 만큼 수행은 더뎠고, 깨달음은 도통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물고기 무리가 전해 준 소식은 지쳐 있던 수신룡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인간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곳은 지난 수십 년간 아무도 찾지 않았던 곳인데.
동정호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험지(險地)를 찾은 불청객.
문득 호기심이 동한 수신룡은 한때 자신의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던 그곳을 찾아갔고, 도착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이 무슨……!
경악하는 것은 과거의 수신룡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기억의 파편을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설마.’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등골을 타고 천천히 기어오른다.
불신, 의문, 그리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멍하니 뇌까렸다.
‘……게이트.’
틀림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도 넘게 게이트를 통과했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틈새로 줄기줄기 쏟아지는 검은 기운은 분명 마력(魔力)이다.
‘이런 미친……!’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온갖 욕설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마 지금 내가 수신룡의 기억 속이 아니었다면, 마음껏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었다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부쉈을 것이다. 목이 터질 때까지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씨발, 게이트라니. 마력이라니!’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토해 내지 못한 외침이 혀끝에서 흩어진다.
나는 경악과 분노로 눈을 부릅뜬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망연히 응시했다.
– 멈추어라! 멈추란 말이다!
강의 주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백성을 온몸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마기에 노출된 물고기들의 이빨은 톱니보다 예리했고, 비늘은 온통 칠흑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제발 그만두어 다오!
그러나 필사적인 의념은 이미 마기로 변이된 물고기들에게 닿지 않았고, 수신룡은 실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이할 정도로 강하고 난폭해진 물고기들이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동정호와 장강 전체가 피로 물들 터.
대의를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 ……미안하구나.
동정호의 가장 깊은 물 속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연하게도 수신룡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수신룡에게는 비탄에 젖어 있을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백 년간 살아온 이 지혜로운 이무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고, 끊임없이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대한 틈새를 직접 몸으로 막아섰다.
– 네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쿠구구구궁!
그건 수신룡이 살아온 모든 세월 중에서도 가장 길고 치열한 싸움이었다.
힘이 팽팽히 대치한 칠 주야 동안 동정호와 장강의 강물은 난폭하게 요동쳤고, 육지의 사람들은 신령이 노했다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크르르륵.
눈부신 지성을 잃고 악물로 타락한 수신룡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마기를 대부분 흡수함으로써 자신의 영역과 백성을 지켰지만, 그 힘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츠츠츠츠.
서서히 붉게 물드는 한 쌍의 눈동자.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이성이, 수신룡으로 하여금 물 위로 솟구치게 했다.
그건 이와 같은 끔찍한 만행을 벌인 범인을 찾고자 했던 늙은 이무기의 의지였다.
촤아아아악!
어두운 밤, 검게 물든 강물이 갈라졌다.
마치 용이 승천하듯 솟아오른 수신룡의 붉은 동공에, 이끼 낀 바위에 앉아 물장구를 치고 있던 한 사람이 비쳤다.
“기운이 좋네.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어.”
맑고 나긋한 목소리,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목선.
그리고 긴 흑발을 틀어 올려 고정한 은빛 비녀.
‘……홍란(紅蘭).’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산산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