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83
#782화
꽈아아아앙!
굉음을 이기지 못한 귓가가 먹먹해진다.
그러나 이명(耳鳴)보다 앞서 찾아온 것은, 짧은 순간 맞닿은 두 손을 타고 전해진 어마어마한 충격파였다.
퍼엉!
마치 거인의 손바닥이 전신을 후려치는 듯한 느낌.
그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뒤로 튕겨 나간 내가 허공에서 신형을 비틀기가 무섭게, 칼날과도 같은 잿빛 기운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서걱!
아주 미세한, 그야말로 한 끗 차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린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간 그것은 지면을 두부처럼 갈랐고, 나는 부드럽게 그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잿빛 기운을 전신에 두른 채 걸어오는 한 사람을 응시했다.
아니, 이제는 인간의 울타리를 벗어난 무언가를.
“미카엘 실베르트.”
내 부름에 놈이 웃었다. 움푹 파인 보조개에 드리운 음영(陰影)이 유난히도 짙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콰직. 콰지직.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지면이 으스러진다.
미카엘 실베르트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치르던 이들조차 헛숨을 삼키며 최대한 거리를 벌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설 생각도 없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 결심했듯이, 그저 맞서 싸울 뿐이다.
여유롭게 다가오는 저 괴물을 막기 위해. 수십억에 달하는 인류를 다시 한번 불구덩이에 밀어 넣지 않기 위해.
나는 힘주어 걸음을 내디뎠다.
쉭.
단 한 걸음.
전신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공간이 접혔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완성된 두 개의 키워드가 명령어로 발현(發現)했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 두었던 한 자루의 창이 손아귀에 감긴다.
어느덧 느려진 세상 속, 창날을 타고 솟구친 청백색의 화염이 어둠이 출렁이는 회색빛 눈동자를 물들이며 내리그어졌다.
미카엘 실베르트.
저 괴물의 정수리를 향해.
화아아악!
열기가 집중된 반경 수 미터의 모든 수분이 증발한다.
닿는 것만으로도 불타오를 것 같은 공기 속에서 크게 뜨인 놈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격 앞에서도, 여전히 올라가 있는 입꼬리도 함께.
그리고 그 순간.
빛살처럼 쳐올린 한 자루의 검이, 놈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던 백염(白炎)의 창날을 후려쳤다.
콰앙!
마치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그극,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허공에서 맞물린 창날과 검신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줄곧 그 창이 안 보인다 했지.”
“……!”
“그래서, 자네가 준비한 깜짝 마술은 다 끝났나?”
까드득.
혼탁한 오라에 휩싸인 검신이 화염을 머금은 창날을 조금씩 밀어낸다.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힘과 끝을 모르고 샘솟는 미증유(未曾有)의 기운이, 이내 일거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을 정면에서 맞닥트린 순간, 나는 새삼 확실하게 깨달았다.
시스템 덕분에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신체 능력도, 무림의 그 누구도 경시하지 못하는 삼 갑자의 공력으로도 놈의 기운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이 힘의 여파가 주위로 미친다면…….’
뒷일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수십 명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 절반은 이런 자리에서 죽어서는 안 될 영웅들이라는 것을.
결국 내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상쇄(相殺).’
뇌리에 떠오른 한 단어와 함께, 나는 반발력에 의해 위로 쳐든 백염을 미련 없이 놓으며 양손을 떨쳤다.
화륵, 퍼어엉!
오른손으로는 멸염신권. 왼손으로는 화염신장.
일권(一拳)과 일장(一掌).
열화문이라는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가지가, 그 끝에서 피워 올린 두 줄기의 불꽃이 혼탁한 오라와 부딪혔다.
콰드드득!
어마어마한 반발력과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으로 전해지고, 밀려 나가는 발끝을 따라 밭고랑처럼 뒤집힌 지면이 흉한 내부를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오직 눈앞의 기운에만 집중했다. 양손에 깃든 화염을 혼탁한 오라 안으로 끊임없이 흘려보냈다.
집어삼키는 대신 갉아먹으며.
막아서는 대신 흐트러트리며.
그리고 마침내 눈에 띄게 줄어든 그 파괴적인 기운의 집합체를, 온 힘을 다해 비틀어 등 뒤로 내던졌다.
후우우웅, 꽈앙!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이 국회의사당을 뒤흔들었다.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배신자 중 한 사람의 가슴에 골검(骨劍)을 박아 넣은 스켈레톤 킹이 외쳤다.
“조심!”
그건 적절한 조언이었지만, 반 박자 늦은 조언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눈앞까지 들이닥친 미카엘 실베르트와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슈확!
혼탁한 빛을 머금은 오라가 목덜미를 스쳤다.
마치 섬광과도 같은 찌르기를 피해 내며 놈의 안으로 파고든 나는 망설임 없이 일권을 뻗었다.
퍼엉!
오라에 겹겹이 휩싸인 손으로 멸염신권을 막아 낸 미카엘 실베르트가 무릎을 차올렸다.
아니, 차올리려 하던 그 순간 돌연 나를 밀쳐 내며 물러났다.
쉭! 퍼걱!
허공에서 맹렬하게 내리꽂힌 은빛 섬광이 조금 전 놈이 서 있던 그 자리를 정확히 관통한다.
묵묵히 백염을 뽑아 드는 나를 바라보던 놈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재미라, 재미.
비명과 핏물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는 주위를 둘러보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친 새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넌 다시 인간 되긴 글렀다.”
“설령 인간이 아니라 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뭐?”
“이미 오늘과 같은 불균형은 과거에도 몇 번이나 겪었다. 마력 수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나와의 균형이 어긋났고, 마정석에서 흡수한 마력을 통제하지 못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알고 있나?”
미카엘 실베르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한 공간에서 수백 명의 헌터들이 처참한 내전을 벌이고 있음에도, 그 광경을 바라보는 놈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했다.
“마왕(魔王).”
“……!”
“누군가가 끝끝내 나를 방해한다면. 그로 인해 인간으로서 정점에 설 수 없다면…… 아스모데우스의 뒤를 이은 새로운 마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그리 생각했지.”
할 말을 잊은 채 미카엘 실베르트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앞서 했던 말을 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거 다시 보니 그냥 미친 새끼가 아니라, 아주 제대로 미친 새끼였네.”
“지금 당장은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어차피 해가 저물 때쯤이면 모든 것이 결정 날 테니까. 자네와 저 친구들의 생사도, 세상에 알려질 내 진정한 이름도.”
미카엘 실베르트라는 이름은 이미 온 세상이 다 안다.
하지만 지금 들은 ‘진정한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따라 놈은 세계 헌터 연맹의 맹주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마왕으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물론, 내게 있어 그것은 미카엘 실베르트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병신. 너 같은 거머리 주제에 뭘 한다고.”
“거머리?”
“그래, 이 거머리 새끼야.”
서서히 굳어 가는 놈의 얼굴을 보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맑은 연못에 살던 이무기가 승천하지, 시궁창에서 꿈틀거리던 굼벵이가 용 되는 거 봤냐? 너 같은 새끼가 아무리 강해져 봤자 어차피 본질은 그대로야. 기껏해야 모기 아니면 거머리지.”
“……!”
“그깟 힘에 취해서 마정석에 빨대까지 꽂은 모기. 놔둬 봤자 사람 피만 빨아먹는 백해무익한 거머리. 그게 바로 너라고. 이 한심한 새끼야.”
한심한 새끼.
그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한때는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물러나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저 같잖은 야망의 종점이 단지 세계 헌터 연맹을 손에 넣는 것뿐이라면, 단지 정점에 서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라면…… 더 이상 아무런 재앙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나는 고통스러웠다.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처참히 무너지는 도시를, 그 안에서 죽어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서.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이 끔찍한 재앙들이 내가 미카엘 실베르트와 맞섰기 때문인 것 같아서.
그렇기에 잠시나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두려웠던 거지.’
그래. 인정하자.
나는 무수한 죽음이 내리깔린 이 길을 계속 달리는 것이 두려웠다.
미카엘 실베르트의 뒤를 쫓으면 쫓을수록, 더욱 많은 피와 시체가 발에 밟힐 것 같아 무서웠다.
차라리 놈의 손아귀에 세상을 쥐여 준다면, 이제 제 것이 되어버린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선지자를 비롯한 모든 재앙을 멈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홀로 걸었던 그 어둡고 길었던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토록 바라던 빛이 있었다.
아니, 답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내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된 헛된 바람이었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결승선을 통과해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괴물이라는 것을.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인간으로서 놈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 같은 거머리 새끼들은 역시 밟아서 터트리는 게 답이야. 안 그래?”
“……!”
“지금부턴 아가리 닫아. 산소도 아깝다.”
나는 미카엘 실베르트를 향해 창날을 겨누었다.
더는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까맣게 물들어 버린 눈동자, 동시에 끝도 없는 거대한 기운이 놈의 전신을 휘감으며 회오리쳤다.
콰아아아.
올올히 피어오르는 기운에 닿은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갈라진다.
부드럽고 여유가 넘치던 놈의 목소리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울려 퍼졌다.
– 네 시체는 오늘 이 자리에 묻힌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모든 진실과 함께.
그 말에,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을 바라보았다.
절반은 파괴되었지만, 절반은 여전히 제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진실이라.
대충 짐작은 했다. 그토록 주목받기 좋아하는 미카엘 실베르트가 어째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지 않는지.
그리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곁을 따라다니던 그 빌어먹을 애완 까마귀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이런 소란 속에서도 왜 바깥은 여전히 잠잠한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놈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한마디뿐이다.
“아가리 닫으랬지. 이 씨벌 놈아.”
– 놈……!
콰드드드득!
마치 망망대해 속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놈의 기파(氣波)를 향해 달려나가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지닌 삼 갑자의 공력마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저 기운이, 왜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지.
마정석을 흡수하여 나와 비견될 만큼 강한 신체 능력과 마르지 않는 마력을 갖게 된 미카엘 실베르트가 어째서 작게만 느껴지는지.
그리고 창날을 뻗으며, 답을 찾았다.
‘헌터(Hunter)니까.’
사냥꾼은, 사냥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쉬이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