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82
81회
어색한 분위기가 해인의 알바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준에게 언제나 아쉬웠던 헤어짐이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아쉬운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더욱 어색할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설에게 미소 지었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윤설 씨의 음식 솜씨를 직접 맛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지 못한 채 연인들이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준은 다정히 손을 흔들며 윤설에게 인사했고 윤설 역시 그에게 같은 방법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지는 준의 뒷모습을 보며 제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은애하는 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다니…. 이를 어찌 하면 좋을까요…… 송구합니다. 그저 송구하단 말밖에 할 수 없는 저를….용서….하십시오.’
세 사람을 떠나보낸 후, 적막이 흐르는 방으로 들어선 윤설이 제 시선에 닿은 것을 보자마자 흐느끼기 시작했다.
준이 선물로 가져온 꽃다발 속엔 평소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론 조선의 것을 구해 올 리는 만무했지만 최대한 맞춰온 것은 연인을 배려한 결과였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들이 조화를 이룬 꽃다발은 마치 준의 마음을 품은 듯 풍성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윤설이 그것을 제 가슴에 안았다.
곧 기분 좋은 향기가 그녀의 후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님은….. 이렇게 날 위해주시거늘…. 난 그분께 해드린 것이 없구나. 이토록 민망하고 처연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온 준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윤설과 헤어지고 돌아올 때면 아쉬움이 역력하곤 했지만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준은 내내 같은 표정을 유지한 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인 행동들을 이어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가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응시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했다.
연인을 만날 때면 힘이 충전되는 기분이 들곤 했지만 오늘은 정반대였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낯선 기분에 당황한 그가 곧 윤설의 말과 표정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던 그녀가 오늘만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곧 그의 뇌리에 극도로 당황한 윤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인 씨와 함께 살게 된 이유를 묻는 것이 큰 결례라도 된 것일까? 윤설 씨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야.’
준은 자신이 실수한 것이 없는지를 돌아보았다.
행여 그녀를 다그쳤다면 바로 용서를 구할 일이었다.
하지만 제 선에서 그것은 내내 궁금하던 것이었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무리는 없는 질문이었다.
‘말하지 못 할 일이 대체 무엇일까…..? 그래,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이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곧 어디에선가 서운함이 샘솟아 준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연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쩐 일인지 역부족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마음속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은 그였다.
그래서 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족 얘기까지 윤설에게 먼저 건넨 것이었다.
그의 사생활은 비공개로 되어 있었고 소속사에서 내세운 프로필에도 사적인 언급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설이 마음을 열지 않자 그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
‘윤설 씨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는데…… 윤설 씨에겐…. 내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닌 걸까?’
시무룩해지고 만 준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몸을 뒤척이던 준이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을 안은 채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
“해인아, 내가 아무래도 어제 실수를 한 것만 같구나.”
아침상을 가운데 두고 윤설이 어렵게 입을 열자 총각김치를 우걱우걱 씹던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수라니? 에이, 어제 반찬은 정말로 맛있었다니까. 다들 감탄했잖아. 히잇.”
“그, 그것이 아니고…. 님께…. 실수를….”
“엥? 준이 씨한테? 왜? 뭔데? 헐, 이제 보니 너 얼굴이 왜 그래? 하루사이에 이렇게 수척해지다니…. 어제 무슨 일이 있긴 했구나? 얼른 말해봐.”
윤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날 말이다. 님께서 자신의 이야길 하시더구나. 그리고… 그간 나에 관해 궁금했던 것이 있다고 하셨지. 그래서 내가 물었더니…..”
“물었더니?”
“너랑 어떻게 은인이 된 것인지…. 또한 어찌 같이 살게 된 것인지를 물으시더구나.”
“헐!!!”
해인이 기어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윤설아, 어쩌지? 언젠가 상규 오빠도 물은 적이 있었거든. 너랑 어떻게 만난 친구냐고 하기에 어릴 적 소꿉친구라고 했지. 고향에서 올라와 같이 살게 된 거라고…. 휴우… 혹시 둘이서 얘기하다가 말이 안 맞으면 우릴 의심할까? 아, 아니지.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그, 그것이….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말았단다.”
“정색?”
“으,응. 실은 사귀기로 한 날….. 미리 양해를 구했었거든.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묻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님께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내 마음은 조금 편해지긴 했었지. 허나, 어젠 너무 당황스러워….. 그만…. 그날의 약조를 기억해달라고 말씀드렸단다. 내가 너무 심한 것이지?”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준이 씬 뭐라고 했는데?”
“기억하신다며…. 알겠다고 하셨지만……”
“하셨지만?”
“어쩐지…그 이후론 내내 잘 이어지던 이야기도 끊어지고…. 조금은 어색한 것이…..”
윤설이 시선을 떨구자 해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색하고 썰렁한 분위기였구나. 뭔지 알겠다.”
“해인아, 아무래도 내가 너무한 것이지?”
“음…. 상규 오빠도 물어본 걸 보면 우리가 같이 지내는 걸 궁금히 여기는 건 당연한 일 같아. 아마 준이 씨도 너랑 사귀는 입장에서 궁금했을 거야. 우리도 그렇잖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선 뭐든지 알고 싶고 궁금하고…… 난, 네가 준이 씨에게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상대편에선 서운할 수도 있겠다 싶어. 서로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벗의 의견을 경청하던 이가 여전히 서글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나….나의 존재를 밝힐 순 없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니. 님께선 언제나 나를 진실로 대해주시니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단다. 그러나…. 이건 너무 엄청난 것이 아니니. 자신이 없단다. 그분께 상처를 주게 될까 봐….. 그리고 날 멀리하실까 봐……”
사랑에 빠진 이가 상대를 향해 갖는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해인이 안타까움을 어쩌지 못했다.
윤설이 조선에서 온 규수가 아니었다면 이 커플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몰랐다.
그저 행복하게 웃기만 해도 부족한 나날들일 수 있었다.
해인은 예쁜 두 사람을 돕고 싶었다.
“윤설아, 있잖아…..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면 어떨까?”
“뭐라고?”
윤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벗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했었지? 준이 씨에겐 언제나 진실로 대하고 싶다고…. 그 역시 네게 그렇게 대해준다고….. 난, 준이 씨가 널 이해해줄 거라 믿어. 윤설아, 우리가 조선으로의 귀환을 계속 알아보는 중이지만…. 정말 그 날이 온다면 너, 준이 씨에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사라질 거야? 그건 아니잖니. 그건….연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잖아. 그럼, 자초지종도 모른 채 남겨질 준이 씬 얼마나 힘들겠어…..차라리 속 시원히 이야길 하자. 물론 준이 씨가 매우 당황하겠지만…. 그에게 결정을 맡기면 어떨까?”
해인의 대답 속엔 윤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될 때였다.
그와 장래를 약조할 수 없다는 것까진 염두에 두었지만 정작 홀로 남겨질 그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것이야 말로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였다.
헤어짐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릴 만큼 슬퍼지곤 했지만 제 고통은 문제가 아니었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연인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준이 느끼고 감수해야 할 고통이란 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해인을 출근시킨 후, 또다시 홀로 남겨진 윤설이 화장대에 놓아두었던 폰을 집어 들었다.
준이 선물한 것은 새 것이라 깨끗했지만 님을 생각하며 매일 닦아둔 손길 덕에 유리처럼 말갰다.
곧 스마트폰의 화면에 윤설의 얼굴이 비쳤다.
조심스레 그것을 든 그녀가 준을 떠올렸다.
수시로 울렸던 풍악은 이틀째 소리를 들려주지 않고 있었다.
‘님께서 나를 잊으신 건 아닐까…..? 행여…그날 일로 화가 나신 걸까? 휴우….어쩌면 좋아……’
윤설은 자책을 이어가며 아무 것도 손에 잡지 못했다.
겨우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폰을 들여다보았고 빗자루를 든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쪼르르 달려와 폰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준과의 통화를 일상의 낙으로 삼았던 그녀에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물론, 다정하고 달콤한 음성이 그리웠다.
하지만 윤설은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전화를 걸어온 쪽은 준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선물한 것은 해인이 준 것과 사뭇 달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해인이 몇 차례 알려주긴 했지만 윤설은 그것을 두드리는 것이 두려웠다.
하루의 해가 애달픔 속에서 스르륵 저물었다.
해인은 축 쳐진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맛 집의 음식을 포장해왔고 둘은 즐겁게 저녁을 먹었다.
새로운 것에 잠시 시름을 던 윤설의 얼굴이 아침보다 나아보였다.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해인이 손뼉을 쳤다.
“참, 아까 낙안당 아저씨가 전화했었어. 왜 안 오냐고 하시더라. 헤헷. 너 그동안 집에만 있느라 답답했을 텐데 이번 주말에 한 번 갈까? 아, 맞다. 상규 오빠랑 준이 씨도 같이 식사하면 좋겠다. 모르는 곳도 아니고 서로 편할 것 같은데? 에고….또 나가야 할 시간이네. 윤설아, 오늘은 꼭 먼저 자. 알겠지?”
벽에 걸린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어 새날을 시작하고 있었다.
윤설은 해인의 당부를 기억했지만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기어이 일어나더니 촛불을 밝혔다.
벗이 오려면 아직 한참을 더 있어야 했다.
눈을 비비던 그녀가 화장대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사흘째……
준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윤설의 마음은 애가 타다 못해 재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이젠 그가 화가 난 게 아니라 어디 아픈 건 아닐지를 걱정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 아니야, 님께선 안전하실 것이야.’
윤설은 습관처럼 제 소매로 액정화면을 싹싹 닦기 시작했다.
마치 준의 얼굴을 마주한 듯 느리지만 매우 정성스런 손길이었다.
한층 말개진 것에 제 얼굴을 비추어보던 윤설이 준을 그리워하며 제 손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온기에 반응한 최신 스마트폰이 스르륵 잠에서 깨어나 작동을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단 하나뿐인 번호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헉! 이, 이를 어쩐다…”
윤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고 말았다.
보통의 당황이 아니었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전화기가 작동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끊는 방법도 몰랐다.
급격히 당황한 두 손은 그저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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