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88
87회
극장에서 윤설의 순수함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현대의 문물이 집약된 곳이라 더욱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를 꼬옥 품은 채 입 맞추고 싶은 욕망이 준의 무의식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좁았고 평일 심야 영화를 택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일부러 뒤돌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는 맨 끝자리….
주변이 차단된 연인 석은 마치 준에게 깔아준 멍석 같았다.
본능이 매너를 삼키려는 찰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조차 잡지 않은 건 윤설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보이고 있는 눈빛과 표정 그리고 행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윤설은 지금 후대의 문물을 제대로 즐기는 중이었다.
조선의 규수에게 이보다 특별한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평생 불가능한 것을 겪는 중인 이를 제 본능 때문에 방해한다면 미안한 일이었다.
준은 이 순간을 배려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믿었다.
엔딩 타이틀까지 세심히 바라보는 윤설의 눈길이 촉촉했다.
준이 가만히 여린 손을 잡았다.
“재밌었어요?”
그제야 낭군을 의식한 이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어찌 이런 것이 있는지…..마치 저 세상으로 빠져들어 저들과 함께 숨 쉬는 것만 같았습니다.”
준이 싱긋 웃었다.
아이처럼 순수한 대답은 저절로 흐뭇함을 유발하고 있었다.
수줍어하던 윤설이 곧 겸연쩍게 웃었다.
“헌데…. 이것을 제가 다 먹은 것 같아 어찌해야 할지….. 부끄럽습니다.”
그녀가 내민 팝콘 통을 보고 준이 또다시 웃고 말았다.
“아닙니다. 반이나 남았는걸요? 음…. 그럼, 우리 가는 동안 차에서 같이 먹을까요?”
“네에.”
미안함을 덜어낸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자 준이 꼬옥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손등에 준의 입술이 닿는 순간……
윤설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이 처음인 그녀에겐 낭군이 표현하는 모든 방식들이 놀람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현은 매우 특별한 느낌을 선사하고 있었다.
설렘으로 두근거림은 당연했다.
거기에 더해진 느낌은 바로 존중이었다.
윤설이 준으로부터 느끼는 사랑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진솔하며 다정한 그의 사랑엔 정인에 대한 존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후대로 넘어와 늘 불안해하며 주눅 들어 있던 그녀에게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극장을 벗어난 승용차가 대로 위에 합류했다.
윤 매니저는 해인과 깔깔 웃더니 뒤쪽을 향해 말했다.
“준아, 너 먼저 내려줄게. 내일 출발 스케줄 때문에 무리하면 안 된다. 알지?”
“저 괜찮아요. 윤설 씨 바래다주고 싶어요.”
“얌마, 너 사랑꾼인 거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아니까 이제 본업 생각도 좀 하자. 남주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우리 내일도 그래봅시다. 윤설 씬 해인이랑 같이 잘 모셔다드릴 테니까. 나에게 맡겨.”
“하지만……”
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윤설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업을 앞두셨으니 그쪽에만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하셔야 저 또한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전 언제나 옥탑 방에 있질 않습니까? 허니, 심려를 거두십시오.”
“윤설 씨……”
애타하던 윤 매니저가 감탄을 내뱉었다.
“캬, 역시 윤설 씨가 뭘 좀 아시네요. 내조의 여왕이신가? 하핫. 실은 준이 내일 원주까지 도착해야 할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지금 가서 자도 몇 시간 못 자고 떠나게 생겼네요.”
윤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송구합니다. 오늘 쉬시는 편이 좋았을 터인데……”
“아, 아니에요. 윤설 씰 못 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요. 괜찮습니다.”
“허면, 지금이라도 어서 가서 주무십시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
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자 윤 매니저가 좌회전 신호를 받아 움직였다.
“자아, 너희 집으로 먼저 간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준은 윤설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윤설 씨, 미안해요.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당신에게 늘 부족한 것만 같군요. 당분간 못 볼 텐데….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미안해요. 빨리 끝내고 올게요. 기다려줄 거죠?”
윤설이 싱긋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님의 그 마음으로도 충분합니다. 허니, 부족하단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전…. 정말 행복합니다.”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준의 얼굴에 한 줌의 빛이 스며드는 찰나, 윤설이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연인을 바라보던 준이 곧 제 손등에 닿은 그녀의 입술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윤설은 낭군의 손등에 입 맞춘 후, 수줍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윤설 씨……”
준이 행복을 이기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은 그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고 말았다.
윤설은 언제나 부끄러워하는 편이어서 크게 기대하는 바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첫 애정 표현은 그에게 굉장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준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나온 승용차가 다시금 대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달린 차량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편의점 앞에 멈춰선 차량에서 윤설과 해인이 내렸다.
운전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윤 매니저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돌아갈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편의점 앞엔 낯선 차량 한 대만이 남았다.
준의 아파트에서 극장으로 그리고 두 여자들이 하차한 이곳까지 줄곧 따라온 차량엔 남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까 정말 민준 맞았어? 아니, 무슨 남자 둘이서 똑같이 변장을 하고 나타나지? 참내…. 디스패치 기자 된 후,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네?”
“그러게 정말 황당했다니까? 키가 조금 더 큰 남자가 아니었을까?”
“아니,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사귀는 관계라면 집까지 바래다줬을 텐데…. 차량이랑 댕기머리는 맞잖아?”
“누가 아니래? 차량은 민준 소속사에서부터 봤으니까 확실하고 아파트도 민준 집이 확실하단 말이지. 댕기머리도 한눈에 확 띄잖아? 그런데 단둘이 같이 있는 걸 포착하지 못했으니…나 원….”
잔뜩 약이 오른 남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도 분명 여자 둘이랑 남자 하나가 먼저 들어갔지? 어떻게 단 둘이 있는 걸 못 보냐? 사귀는 거 맞아? 이쯤 되니까 제보가 의심스럽네. 아, 진짜 어떤 인간인지… 우리 똥개 훈련시키려고 작정한 거 아냐?”
“내 말이…. 상식적으로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천하의 민준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동네 사는 여자를 좋아하겠어? 강남에 사는 남자가 여기까지? 배우 동선이 빤한데… 참내…억지로 엮기도 쉽지 않겠다. 뭐, 여기 로케라도 왔대? 현장 촬영하다가 눈이 맞았다? 그거야말로 드라마네 드라마야.”
“푸하하… 맞다.”
상대가 동조하자 성질을 내던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진, 건질 것도 없겠지? 에휴, 기름 값도 안 나오겠네. 이거 접자.”
“그래야겠지? 며칠 더 잠복해봐?”
“됐다. 됐어. 민준 내일 원주 간대. 스케줄 확인했어. 공연히 쓸데없는 곳에 열정 쏟지 말고 김유나-성진우 커플이나 더 파보자고.”
“앗, 걔들 진짜래?”
운전석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준보단 훨씬 더 현실감 있겠다. 직접 봤다는 제보도 많고…아이 씨, 배고파. 우리 뭐 좀 먹고 가자.”
“그러고 보니 더럽게 배고프네.”
헤어숍에서 나와 밴에 오른 이지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상단엔 부재중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의 검지는 포털 사이트를 클릭하기에 바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예란으로 직진한 그녀는 메인 기사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어? 이상하다?”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이가 재빨리 검색창에 “민준”을 써넣었다.
금세 그의 이름으로 언급된 기사가 최신 순으로 정렬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상단의 기사는 이틀 전, 드라마 의 제작 발표회 소식이었다.
이지의 손이 사진을 클릭하더니 곧 크게 확대했다.
감독과 주요 배우들의 단체 사진 속에서 민준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아……”
그만을 바라보던 이지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준의 웃음은 연예인의 흔한 판박이 웃음이 아니었다.
거기엔 그만의 올곧음과 다정함이 함축되어 있었다.
배우가 되기 전의 그를 아는 이지였다.
민준은 전과 후가 한결같이 동일한 사람이었다.
‘당신과의 연애는 나의 꿈이었단 말이야. 이런 꿈조차 꾸지 말라는 건 잔인하잖아. 난 그럴 권리가 있어!’
이지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 하던 일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지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를 바쁘게 움직였고 눈 역시 갈망하는 무언가를 다급히 찾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헛수고일 뿐이었다.
제작 발표회 소식 이후,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 기사대로라면 준은 지금 원주에서 열심히 촬영 중이며 그 말은 더 이상 가십에 오를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지가 흥분한 얼굴로 기사를 꺼버리더니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제보는 제대로 한 거야? 그런데 왜 기사 한 줄이 없어? 벌써 며칠 째냐고!”
상대의 말을 듣던 이지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기어이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야! 미친…. 너 그따위로 할 거야?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
거친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자 앞자리에 있던 장 실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얘기야? 누군데? 제보는 뭐고, 기사는 또 뭐야?”
“몰라도 돼.”
“뭐? 휴우….”
입을 다문 장 실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지가 까칠해질 때마다 욱하는 심정이 금세 목구멍까지 도달하곤 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곧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시청률 상승은 그녀의 인지도는 물론 잠시 뜸했던 CF와 차기작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히 던진 한 마디가 싸움이 될 수도 있었고 그 때문에 감정이 상해진 이지가 촬영을 망치게 된다면 결국 깨지는 건 그였다.
마음을 추스른 장 실장이 팔짱을 낀 채 정면을 응시하는 동안 이지가 뿌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있는 걸 포착 못하다니! 말이 돼? 쳇, 내가 해도 그보단 낫겠네. 사귀는 거 맞잖아. 영은이가 확실하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다. 이 대리가 처음 찍은 그 사진….그래, 거기에서도 단둘이 가까이에 있는 건 아니었어. 그저 창밖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뭐지? 그 정도는 친구 사이에서도 해줄 수 있는 행동이잖아. 두 사람…. 정말로 보도 자료처럼…. 그저 동료일 뿐인 건가? 하아…나만의 상상이었단 말이야? 아닌데…. 아니야. 내 촉은 살아있다고! 그럼… 민준 씨를 직접 만나볼까? 속 시원히 얘길 들어보는 거야. 차라리 사귀는 게 아니라면 나에게 좋은 일이잖아? 그래!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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