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89
88회
옥탑방의 현관문이 삐걱대며 열리더니 곱게 머리를 땋아 내린 윤설이 밖으로 나왔다.
손에 든 양동이엔 세탁을 마친 옷가지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이라고 해봤자 그녀가 머물던 별당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손바닥만 한 옥상은 윤설에게 어느새 편안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따스한 볕을 웃는 얼굴로 맞이한 그녀가 젖은 옷가지들을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기 시작했다.
몇 년은 입어 물 빠진 청바지 곁으로 티셔츠 서너 개가 나란히 자리 잡자 이번엔 윤설이 빗자루를 들었다.
-쓰윽 쓰윽-
“어머, 청소하는 거야?”
몸을 굽혀 평상 아래를 쓸던 윤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더니 공손히 목례했다.
“오셨습니까?”
주인여자였다.
초반, 숨죽여 지냈던 윤설은 해인이 주인을 위해 일하는 줄 알고 돕기로 작정했었다.
그것이 은인에게 신세를 갚는 길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명문가의 규수라는 허울은 후대로 오면서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해인을 향한 고마움과 돌아가야 하는 절박함은 그녀로 하여금 빗자루를 들게 만들었고 윤설은 주인집 마당은 물론 계단까지 열심히 청소해오고 있었다.
낯선 그녀의 존재는 해인이 고향 친구라고 덮으며 무마되었고 깐깐한 주인 여자는 그날부터 옥탑방을 살뜰히 챙겨주고 있었다.
“윤설이라고 했지? 어쩜 이렇게 요즘 아가씨답지 않은지….호호… 난 윤설 양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니깐?”
“그리 여겨주시어 고맙습니다.”
“세상에…. 그 말투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가 않더라. 가정교육을 아주 잘 받았나봐. 오홍홍….어른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윤설 양 덕분에 우리 집이 빛이 번쩍번쩍 난다니까? 내가 아주 고맙게 생각해.”
윤설이 웃는 낯으로 목례했다.
주인여자가 품에 안고 온 이불을 펼치자 윤설이 서둘러 그것을 잡아주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싹싹하기도 하지. 고마워.”
아가씨들의 빨래 옆으로 주인집의 이불이 햇살 목욕에 합류했다.
그것을 방망이로 탁탁 털던 주인여자는 손뼉을 치더니 다시 올라오겠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계단을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이고, 숨차라. 김치 떨어졌지? 엊그제 열무 좀 담갔어.”
“매번 신세를 지게 되어 어찌하면 좋습니까? 지난번 주신 김치도 맛있게 먹었는데… 이번에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아휴, 이렇게 예쁜 사람은 더 주고 싶다니까? 그래, 맛있게 들어.”
웃음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려던 여자가 다시금 되돌아왔다.
“참, 혹시 말이야. 요즘에 어떤 남자가 집까지 따라온 적 있었어?”
“네에?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요 며칠 전에 말이야. 어떤 놈팡이 같은 녀석이 골목에 숨어서 우리 집 사진을 찍고 있는 거야. 내가 몇 번을 봤거든. 그래서 요절을 내려고 했더니 내빼더라고. 생각해보니 아가씨들이라곤 옥탑 방뿐인데 문득 걱정이 되잖아. 요즘 세상에 하도 정신 나간 것들이 많아서 말이야. 험하기도 하고… 아니면 다행이지만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거야. 알았지? 해인이한테도 꼭 알려줘. 그리고 이상한 놈팡이 어슬렁거리는 거 보면 나한테 말하고. 쯧쯧… 요즘 몰카 찍는 변태들이 많다더니…한번만 더 개수작부리기만 해봐라. 이래서 대문을 잘 걸어 잠거야 한다는 거야. 저 1층 머슴애들이 하도 열어놓고 다녀서…원… 아휴, 말나온 김에 한 마디 해야겠네. 암튼 김치 잘 먹고 문단속 잘해. 알았지? 나 갈게.”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치 통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찰나였다.
익숙한 풍악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입 꼬리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준이 핸드폰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윤설 씨! ]“준이 님….”
[ 미안해요. 어제 전화 많이 기다렸죠? ]“아, 아닙니다. 미리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여기고 있었습니다.”
준으로부터 호탕한 웃음이 흘러나오자 윤설이 따라 웃었다.
원주로 떠난 후, 곧바로 촬영에 돌입한 그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맡은 배역은 낯설었고 줄곧 사극만 하던 톤이라 교정이 필요하기도 했다.
촬영 전까지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만 실전은 또 달랐다.
예민정 작가는 쪽대본이 없기로 유명했고 감독 역시 밤샘은 지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팀 전체의 열기가 대단했고 준 역시 남자 주인공으로서 열심을 내고 있었다.
NG가 없어도 더 나은 신을 위해 나머지 촬영을 자처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 음….윤설 씨가 이해해줘서 고맙긴 한데….너무 담담하시니 조금 서운하기도 한데요? 전, 윤설 씨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아, 저도 실은…. 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 하하… 엎드려 절 받기 같지만….. 가슴 한 편이 행복으로 차오르는군요.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오늘도 집에만 있는 거죠? ]윤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준이 말을 이었다.
[ 음… 그렇군요. 혼자 남아있을 윤설 씨를 생각하면 안쓰러워요. 여기 오니까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 싶더군요. 물론,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요. ]“병….원….이라 하셨습니까?”
[ 네. 혹시 의원이라고 하면 아실까요? ]윤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면, 의관이 되신 것입니까?”
[ 아….하하… 실제는 아니고 배역으로 맡았습니다. 음, 그러니까 저번 “반상”에선 도령 역할이었고, 이번엔 의관 역할이에요. ]‘역할이라…. 배우란 것은 이렇게도 변하고…..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를 준이 다정히 불렀다.
[ 윤설 씨, 무슨 생각을 진지하게 하나요? ]“그것이…. 배우란 참으로 다양하게 변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하고….표현해야 하는 님의 고충이 느껴집니다.”
윤설의 진지한 눈빛에 준이 감동하고 말았다.
[ 당신은 언제나 제게 큰 힘이 되어주는군요. 지금까지는 온통 결과를 원했던 사람들뿐이었는데…. 윤설 씨는 정말 특별해요. 고마워요. ]정인의 달콤한 칭찬에 윤설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말은 본심이었다.
매번 다양하게 변신을 한다면 하나씩 맞춰가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윤설에게 그런 일을 하는 준이 대단하게 여겨진 건 당연했다.
설렘을 유발하던 통화는 그의 촬영 재개로 중단되었고 연인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통화를 기약했다.
“뭐? 놈팡이? 정말?”
야간 알바를 마치고 돌아와 늦은 아침까지 자고 일어난 해인이 부스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설이 전날 주인여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중이었다.
“아 놔…. 어떤 인간이 겁도 없이 그런 짓을? 우리 아줌마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그 다음부터는 안 보인대?”
“응, 그 이후론 말씀이 없으시니 아마도 그런 듯하구나.”
“참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상하네. 아니, 별 볼일 없는 다세대 주택을 왜 찍는대? 무슨 연예인 집도 아니고 말이야. 칫, 웃긴다. 진짜. 윤설아, 내가 드나들며 대문은 잘 잠그겠지만 혼자 있을 땐 저기 현관문 꼭 잠그고 있어. 알았지?”
“응.”
해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새장같이 좁은 집에 친구를 혼자 가둬두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윤설은 아니라고 손사래 쳤지만 예의상 하는 말인 걸 해인이 모를 리 없었다.
친구를 생각한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는 게 옳았지만 그나마 줄이고 줄인 것까지 접기엔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하던 해인이 친구를 바라보았다.
“윤설아, 내가 상황을 봐서 휴가라도 좀 내볼게.”
“휴….가?”
“응, 널 매일 작은 방에 가둬두는 것만 같아서 항상 미안했거든. 제대로 구경도 못 시켜주고….히잉….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둔 건 아닌가 싶어. 미안….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알지?”
벗의 얼굴을 응시하던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근이지.”
“뭐? 푸핫. 지금 뭐라고 했어?”
“당근….이라고….”
해인이 박장대소를 하자 윤설이 벗을 따라 웃었다.
늦은 아침, 스무 살의 달뜬 웃음소리가 옥탑 방을 수놓기 시작했다.
수술복 차임에 고글을 낀 준의 두 눈이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손에 매스를 든 채 곧 이어질 “슛”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을 개시하는 장면은 짧은 컷이었지만 주인공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었다.
환자게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유능한 의사로서의 자신감이 동시에 드러나야만 했다.
작가와 감독은 이에 관해 중요성을 언급했었고 준 역시 연습에 매진했었다.
하지만 실전은 또 달랐다.
“자아, 준이 씨 긴장 조금 풀고 힘냅시다! 하이, 큐!”
재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윤 매니저가 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다. 휴우… 아깐 정말 숨도 못 쉬겠더라. 긴장 많이 했냐?”
“네. 신경이 많이 쓰여서 그랬나 봐요.”
“당연하지. 얼마나 갖오를 많이 한 부분이냐? 게다가 더미? 어휴, 그건 뭐 멀리서 봐도 소름이 확 끼치더만…. 너 진짜 강심장이더라.”
준이 싱긋 웃었다.
“실은… 저도 좀 그랬어요.”
“그치? 하아…. 배우도 은근 3D 직업이라니까? 다음엔 청심환 하나 먹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매니저의 너스레에 준의 긴장이 스르륵 녹아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 윤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신은 2시간 후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 사이 영상통화로 그리움을 달랠 생각이었다.
윤설이 조선에서 온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부쩍 그녀에 대한 애잔함이 커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더욱 마음을 써주고 싶은 최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분주했고 더군다나 원주에까지 오게 되어 그의 마음은 애가 탈 지경이었다.
준은 윤설을 향한 뜨거움이 어쩌면 시한부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지를 생각했다.
떠올릴수록 괴로웠지만 완전히 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생수 몇 모금은 삼킨 그가 때마침 울리는 전화에 반색했다.
하지만 윤설에게만 반응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폰을 잡았다.
낯선 번호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민준 씨…. 저….심이지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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