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172
〈 빌어먹을 환생 173화 〉 대항전
본가 숲의 중앙.
이곳에는 몇 주 전에 완공한 인공호수가 있다. 엘프 마을의 근처. 세계수의 묘목과도 가깝다. 유진은 엘프들의 환영을 뒤로하고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어.”
히죽 웃음이 섞인 인사가 날아왔다.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호수 중앙에 앉아서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멜키스는 사흘 전부터 엘프들의 교육을 핑계로 이 숲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진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멜키스를 향해 두눈을 얇게 떴다. 아까 카르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내심 각오를 했는데, 참으로 다행히도 멜키스는 멀쩡히 옷을 입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리 죽상이야? 설마 대항전에서 처발린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응, 그렇겠지. 엘프들이 말해줬거든. 백룡기사단과의 대항전, 너도 참가했다며? 백사자기사단이 패배할 수는 있겠지만, 네가 패배했을 리는 없지.”
멜키스는 히히덕거리면서 호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호수가 멜키스의 걸음마다 자그마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대항전에서도 승리한 것 같고, 라이언하트에 기쁜 일만 가득한데… 잘난 도련님의 표정은 왜 그리 썩어계실…”
“왜 알몸으로 호수에 앉아있던 겁니까?”
불쑥 내뱉은 말.
멜키스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그리곤 잠시 동안 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자그마한 혼란…. 수치심! 그를 드러내지 않았다. 수치심이란 것은 겉으로 드러내어 남에게 알려질 때야말로 머리채를 쥐어뜯을 만큼의 부끄럼이 되는 법이다.
“…수행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수행이 어디 있습니까?”
“얘, 꼬마야. 너는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정령과 보다 깊이 교감하기 위해서는…”
“그거 아무 효과 없는 미신이라고 했잖아요.”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언젠가 아롯의 마법학회에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 출품된 적이 있어.”
“갑자기 뭐라는 겁니까?”
“끝까지 들어 봐. 논문의 내용은 이래. 어떤 연금술사가, 마법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임상실험을 진행했거든? 그는 자신이 만든 신약이 어떤 것인지 상세하게 실험자들에게 전달한 뒤에 약을 투여했어.”
“그래서요?”
“일정 기간 동안 투여가 끝난 후. 실험자들은 마법약물을 통해 분명한 효과를 보았다고 대답했지.”
“뭐 약을 먹었으면 당연히 약빨이 들겠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 연금술사가 투약한 약들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미묘한 맛과 마법약물다운 색만 가진 맹물이었던 거야.”
“…”
“즉,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을 지라도, 여러 가지 심리적인 요인과 믿음이 더해지면 분명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게 바로 플라시보 효과야! 신기하지? 최면마법을 건 것도 아닌데,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가 일어난다니… 너도 몇 번쯤은 강렬한 자기암시의 효과를 본 적이 있지 않아?”
“예… 뭐…”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아무 효과가 없을 지라도, 믿음이 중요한 거야.”
“예…”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멜키스는 그 아무 효과도 없는 미신을… 플라시보니 뭐니 하는 것을 이유삼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인데… 미신이라는 것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도 저 뭐시기 효과가 드는 것인가?
“…그래서 효과는 좀 보셨습니까?”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떠올려줬으면 해. 내 이름은 멜키스 엘하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령사야.”
“예. 백색마탑의 정령공주님.”
“끼아악!”
유진의 대답에 멜키스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한창 젊은 시절의 별명만큼은 수치심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다음에도 알몸으로 명상을 하실 거면… 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신 뒤에 해주세요.”
“겨… 경계는 항상 하고 있거든? 그래서 대체 누가 내 명상을 봤다는 건데?”
“카르멘님이요.”
“하필…!”
“남자한테 보이는 것보단 낫죠.”
“그 여자가 날 비웃었을 것이 분명해…! 날 보고 뭐라고 했어?”
“별 말씀은 안 하셨는데요. 그냥, 굉장히… 어… 난감해 하셨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법을 일으켜 제 몸을 투명한 공기방울로 감쌌다. 그 모습에 멜키스의 눈이 얇아졌다.
“차암,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요?”
“나도 이 숲을 드나들면서, 파릇파릇하던 시절처럼 정령술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이야. 너처럼 세계수의 정령이 깃들진 않더란 말이지.”
그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중얼거림에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유진도 제 몸에 세계수의 정령이 깃든 이유는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백염식이 특별해서? 아니면 유진이 마나를 조작하는데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 이터널서클을 접목시킨 환염식의 의외성? 드래곤하트를 소재로 삼은 아카샤. 그것에서 비롯된 마법에 대한 이해?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와 계약하며 갖게 된 정령적성?
모두가 그럴 듯하기는 했다. 번개불꽃이 세계수의 정령과 하나가 되어, 유진의 마나게 녹아든 것은 저러한 요인들이 맞물려 일어난 특혜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특별한 가호일 수도 있지.’
유진은 그것도 요인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는 사마르 대수림 깊은 곳에 있는 엘프의 영지를 방문했다. 텅 비어버린 엘프의 마을을 보았고, 호수 중앙에 우뚝 선 세계수를 보았으며, 그 내부에 잠들어있을 엘프들과ㅡ 죽어 마땅할 상처를 입고 봉인 된. 세계수와 연결되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세냐를 보았다.
그곳에서 유진은 분명한 기적을 체험했다. 8장의 날개를 펼치고서, 크리스티나와 연결되어 있던 아니스. 그녀가 일으킨 기적 덕에 유진은 의식의 세계에서 세냐와 만났다.
‘…정령의 가호… 아니스가 준 것인지, 아니면 세계수가 준 것인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마나에 번개불꽃이 녹아든 것은 특혜라 할 만 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안 따라가. 괜히 가봤자 내 속만 끓는데 뭐하러 따라가?”
멜키스는 그렇게 쏘아붙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 망토는 내 망토야. 앞으로 6년 남았어. 물에 젖기라도 하면 콱…!”
보란 듯이 두 주먹을 꽉 쥐어흔드는 멜키스를 뒤로했다. 유진은 주변을 살핀 뒤, 성큼성큼 호수로 걸어 나갔다. 수면 위를 걷는 발은 자그마한 파문도 만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호수의 정중앙 쯤에 서게 되었다.
“유진님은 수영을 할 줄 아시나요?”
망토 속에 있던 메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유진은 메르의 심술궂은 표정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피식 웃었다.
-헬무드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아주아주 험난했답니다. 그 바다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차서 태양도 보이지 않았고, 격한 파도와 폭풍이 끊이질 알았어요.
이제 막 동료가 된 하멜은, 용병 중에서도 성격이 고약하고 사납기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멜조차도 그 험난한 바다에서는 성격대로 날뛸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하멜은 수영을 할 줄 몰랐거든요. 매일같이 습격해 오는 마물과의 싸움! 으악! 하멜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다에 떨어졌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그때의 하멜은 도저히 용사의 동료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약하고 무능했거든요!
도와줘, 세냐!
하멜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현명한 세냐의 이름을 불렀어요…
“나 수영 잘해.”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아니 진짜로. 그 동화책의 내용은… 그…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것들이 대부분이야. 바다에 빠졌던 건 내가 아니라 세냐라고.”
“…네?”
메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바다 위를 날아다니면서 깝죽거리다가, 아래에 숨어있던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고 마나가 역류했어. 그렇게 바다에 풍덩 빠져서… 하멜, 하멜! 나 좀 구해줘! 하고 멍청하게 비명을 질러댔지.”
사실 그런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바다에 빠진 순간, 세냐의 의식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만약 근처에 있던 하멜이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세냐의 몸뚱이는 바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진실은 그렇지만, 유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읊었다. 세냐 그 망할 것이 먼저 자기가 당한 망신을 애꿎은 하멜에게 뒤집어씌웠으니, 하멜의 환생인 유진은 세냐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
“잘 생각해 봐. 바다에서 한참 떨어진 숲에서 자란 세냐가 수영을 할 줄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세… 세냐님은 못하는 것이 없으세요.”
“응, 아니야. 세냐 못하는 거 엄청 많았어. 수영도 못하고, 바느질 같은 것도 못하고, 요리에도 별 재주가 없었지. 그거 알아? 그 베르무트조차도 세냐의 요리에는 몇 번인가 정색을 했었다고.”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 제일 못했던 것은 맞지만, 세냐의 요리도 그럭저럭 먹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멜이 없는 동안 세냐가 멋대로 동화책을 써다가 세상에 뿌려놓았으니, 이 모든 것은 세냐가 응당 받아들여야 할 업보였다.
“바다에서 건져냈을 때, 세냐 꼴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온몸이 짠 바닷물에 흠뻑 젖어서…”
“이…”
메르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이인… 인공… 인공호흡을 하셨나욧?”
“얘가 뭐래…”
“바다에 빠졌으니… 무, 물도 먹었을 거고, 숨도 멎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인공호흡을…”
메르의 뺨이 발갛게 물들였다.
“…인공호흡은 안했고… 철철 쏟던 쌍코피는 닦아줬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인공호흡이라니…! 그것까지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해서 대체 무슨 이득을 얻는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유진은 세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냐. 난 널 좋아했어.
왜 동화책의 말미에 그딴 개구라를 적어 놓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대사를 적은 것은 아니스일 지도 모른다. 유진은 그 빌어먹을 동화책이 세냐와 아니스의 공동 집필작이라 확신했다.
메르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꺄꺄거리는 동안. 유진을 휘감은 공기방울이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진은 호수 아래로 잠수했다.
이 호수는 멜키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본래 있던 호수를 더 넓게, 더 깊게 만들었다. 호수 공사는 예전부터 기획되던 본가 숲의 개발계획에 더해져 있던 것인데, 땅의 정령왕과 계약한 멜키스의 도움 덕에 숲의 개발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끝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호수. 유진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여러 물고기들을 지나, 계속해서 아래로 잠수했다.
호수의 밑바닥.
그곳에는 어디론가 이어진 자그마한 수중동굴이 있다. 멜키스가 만든 동굴은 아니다. 땅의 정령왕의 도움으로 호수 밑바닥을 파 내리고, 땅을 다져 호수를 완공했을 때.
ㅡ숲의 지하까지 파고 내려온 ‘뿌리’가 호수바닥과 맞닿았다.
유진은 얽혀있는 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직! 공기방울 안에서 유진의 마나가 불씨를 일으켰다. 유진이 의도할 것 없이, 마나에 스며든 번개불꽃이 공기방울 밖으로 흘러나갔다.
…뿌리가 꿈틀거리며 열렸다. 사람이 통과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입구가 열렸다.
이곳의 존재는 본가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이 동굴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유진뿐이었다. 동굴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멜키스였지만, 그녀조차도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벌써 여러 번 왔지만. 참 신비로운 곳이에요.”
메르는 망토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위를 쳐다보았다. 물이 가득 찬 통로. 바로 위의 천장은 흙이나 바위가 아닌 나무뿌리로 이뤄져 있다. 그렇게 계속 이동하다 보면, 호수 아래를 완전히 지나 ‘숲’으 아래에 도착하게 된다.
지면에 올라선 후, 공기방울을 터트렸다. 여러 종류의 뿌리와 흙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간. 숲의 밑바닥까지 내려 온 세계수의 뿌리가 만든 장소.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영맥과도 닿아있다. 언젠가 템페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수의 뿌리가 베르무트가 만든 인조영맥과도 연결되었다. 덕분에 라이언하트의 영맥은 이전보다 거대한 마나를 품게 되었고, 숲 전체에도 영맥처럼 느껴질 만큼 짙은 마나가 떠돌고 있다.
이 지하 동굴은 숲이나 라이언하트의 영맥보다 짙고 순수한 마나가 가득 차있다. 동시에 세계수의 정령들이 마나와 어우러져 있다. 유진이 뿌리를 열고, 이 동굴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그의 마나에 녹은 번개불꽃, 세계수의 정령이 다른 정령들과 호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될 것 같으세요?”
“아마 안 될 걸.”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동굴의 중앙에 앉았다. 백염식을 운용한 것도 아닌데, 마나와 어우러진 세계수의 정령들이 유진에게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숲을 떠도는 녀석들처럼 짓궂고 고약한 정령들. 다가오라고 손을 뻗고 불러대도 오지 않는 주제에, 마치 어느 정도 여지를 두는 것처럼 항상 주변을 기웃댄다.
‘세계수의 정령이라 해 봤자 자아는 없을 원시정령인데 말이야.’
즉, 저 정령들의 움직임은 장난기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뜻대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지.’
전생부터 마나를 조작하는 것에 크게 막혔던 적은 없다.
정령은 마나의 또 다른 형태라 여겨진다. 그 중에서도 세계수는 엘프가 신앙할 만큼 영적으로 강력한 존재이며, 그런 세계수에 깃든 정령은 다른 정령왕들조차 지배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들이다.
정령왕조차 지배할 수 없는 정령들을 유진이 지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단 말이다. 하지만 지배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다면?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과 융화를 바란다면.
화륵.
은은한 불꽃이 유진을 휘감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세계수의 정령과 마나를 함께 느꼈다. 베르무트가 만든 영맥…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숲에 뿌리내린 세계수에 깃든 정령들.
현재 유진의 백염식은 5성이다.
‘오늘은 안 되겠지만.’
유진은 조만간 5성을 넘어, 6성에 도달할 것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