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8
〈 빌어먹을 환생 9화 〉 길레이드
유진은 다른 방계의 아이들과 특별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질감이랄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보니 관심을 줄 가치가 없는 놈들뿐이었다.
데콘, 11살.
한센, 14살.
쥬이스, 10살.
순차적으로 도착한 방계의 아이 세 명. 유진은 그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면서, 머릿속으로는 세 명을 하나로 묶었다.
‘떨거지들.’
태도부터 잔뜩 주눅 들어서 요리조리 눈치를 본다. 특히 유진보다 한 살 많은 한센이란 놈. 볼살은 통통하고 몸도 살이 토실토실한데,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다며 대놓고 형 행세를 하려 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도 유진이나 다른 방계의 아이들 앞에서만 그랬다. 형이랍시고 으스대던 한센은, 시엘의 왼쪽가슴에 새겨진 사자문양을 보고서 곧장 태도를 바꿔먹었다.
사실 지적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가세가 약한 방계의 아이들은 본가의 아이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쟤 대체 뭐야?”
그렇기에 세 명의 떨거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힐긋거렸다.
인사만 간단히 나눈 후. 유진은 멈췄던 수행을 재개했다. 오전부터 하던 체력단련의 연장이었다.
유진이 생각하길, 기술은 시간이 흘러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무술도 마찬가지다. 유진이 삼백 년 전에 용사의 동료였다고는 해도, 그 ‘우둔한 하멜’의 무술이 현대의 무술보다 무조건 우월하다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이다.
하지만. 무술이 아무리 발전한단들, 육체의 단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유진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어도. 육체의 단련은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오히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으니까, 더 열중해야지.’
사실 무식하다 지적받아도 할 말 없는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혈계식, 그 빌어먹을 전통 때문에 마나를 수련하지 못하고 있는데.
직계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혈계식. 거기서 본가에 엿을 먹이고 말겠다는 생각은, 그 전통을 묵과했을 베르무트에 대한 반발 심리기도 했다.
“안 힘들어?”
“힘들어.”
도중부터 시엘은 유진의 곁에 앉아서 수련을 구경했다. 그녀는 유진에게 여러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본가에서 자란 시엘은 오빠와 함께 어려서부터 다양한 수련을 해왔다. 하지만 쌍둥이는 유진처럼 무식하고 고된 수련을 해본 적은 없었다.
“누가 왔나 봐.”
유진은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털면서 일어섰다. 멀찍이 보이는 정문이 열리고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 시간이기도 했으니, 저녁쯤에 도착한다는 방계의 두 자제가 도착한 모양이다.
‘너무 부산스러운데?’
본가 쪽에서 시종들이 앞 다투며 뛰어나온다. 본가 뒤편에 머무르던 기사들도 오열을 맞추어 달린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두 꼬마의 가문이 방계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대가문이라는 것은 들었지만, 여태까지 맞이할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랴부랴 뛰는 모습이 의아했다.
“…앗.”
시엘도 똑같은 의문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정문을 보다가, 입구부터 쭉 늘어선 깃발이 높이 들리는 것을 보며 환히 웃었다.
“아버님이 오셨나 봐!”
시엘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유진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유, 유진님.”
니나도 화들짝 놀라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가주님이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마중하러 가셔야… 아, 아니.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혼자 늦게 가는 것보단 땀범벅인 꼴로 가는 편이 좋게 보이겠지.”
유진은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대답했다. 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진의 팔다리를 닦아 주었다. 그래도 진득이 배인 땀 냄새는 가시지 않아서, 향수까지 꺼내 유진에게 뿌려주었다.
“이 정도면 됐어.”
흙과 땀이 뒤석여 떡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누른다.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별채의 시종들과 방계 떨거지들은 죄다 정문 쪽으로 가버렸다. 결국 유진과 니나는 가장 늦게 별채를 나서 정문으로 향했다.
‘오…’
라이언하트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깃발들이 죄다 하늘높이 치솟았다. 백 명은 족히 넘을 기사들이 깃발과 선을 맞춰선다. 본가와 별채의 시종들도 한 곳에 모여, 저택의 입구에서 줄을 맞춘다.
본가의 친척들은 시종들의 앞에 섰다. 시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애니실라의 왼편에 섰고, 오른편에는 창백한 얼굴의 시안이 서있다.
애니실라보다 몇 걸음 앞.
비록 가문의 실권은 빼앗겼다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정실부인인 테오니스가 애니실라보다 앞선 자리에 선다. 그녀는 수 년 만에 돌아 온 남편을 대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담백했다.
유진은 테오니스의 곁에 선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럭저럭 잘 생긴 얼굴인데, 눈빛이 나이답지 않게 칙칙하고 어깨가 축 처져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자 승계서열 1위.
테오니스가 뭐라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자 이오드는 표정을 굳히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활짝 폈다.
‘다들 예쁨만 받고 자란 건 아닌가 봐.’
그니까 성격이 개차반이 되지. 유진은 끌끌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본가의 집사 중 한 명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방계의 아이들이 서야 할 곳은 본가 친척들의 구석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어 선 탓에 확실히 구분이 된다.
ㅡ채앵!
도열한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일백이 넘는 검이 뽑혔는데도 쇳소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기사들은 높이 세운 검을 왼쪽 가슴에 붙이며 정문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흑마를 탄 남자가 두 대의 마차를 이끌며 들어오고 있었다. 우렁찬 함성 같은 것은 없었다. 기사들은 하나 된 침묵으로 수 년 만에 돌아 온 가주를 맞이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유진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베르무트와 닮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혁혁한 안광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놈이 동생인 기온일 테고.’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둘째 동생인 길포드는 혼인까지 했으면서 아직 분가하지 않고 본가에 얹혀살고 있다. 셋째 동생인 기온은 혼인도 하지 않고 길레이드와 함께 본가를 떠났다.
“…오시기 전에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가주인 내가 내 집에 돌아오는 것인데, 알릴 이유가 어디 있소?”
길레이드는 말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이오드. 키가 제법 자랐구나. 실력도 그만큼 늘었느냐?”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코자 노력했습니다.”
이오드는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길레이드는 잠시 장남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안과 시엘? 알아보지 못할 뻔 했어. 아이들은 정말 빨리 크는 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보고 싶었어요, 아버님.”
시엘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쌍둥이에게서 흙먼지와 땀 냄새를 느꼈다. 이오드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냄새였다.
“길포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축복해야 할 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형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길포드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곁에는 부인인 네리아가 곤히 잠든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길레이드는 잠시 동안 아기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번뜩이는 시선이 방계의 아이들을 훑는다. 몇몇 아이들은 놀람을 삼키며 허리를 세웠다. 유진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뿐인데 뭐 하러 몸을 떠나.
“…거창히 준비할 것 없고. 그냥 밥이나 함께 먹지.”
길레이드의 입이 열렸다.
“혈계식에 대해서도 논할 겸.”
*
널따란 사각식탁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방계의 아이들은 식탁의 끄트머리부터 자리를 채웠다.
길레이드와 함께 온 두 대의 마차에는 디자이라와 가르기스가 타고 있었다.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계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앉았다.
유진은 가르기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
가르기스는 의아하단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런 자리는 가문의 서열대로 앉는 것이 불문율이다. 본래 가르기스의 옆에 앉아야 할 것은 저 뚱뚱한 한센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센은 아무 불만도 내색하지 못하고 유진의 옆에 앉았다.
정오쯤에 도착한 한센은 유진이 얼마나 무식하게 수련하는지를 보았다. 본가의 악명 높은 쌍둥이, 시엘이 유진에게 친근히 대하는 것도 보았다. 한센은 저 정체모를 친척과 괜한 투닥거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저번에도 보았고. 같이 오기도 했으니 얼굴을 아는데…”
방계 아이들의 맞은편 중앙. 가주인 길레이드의 자리다. 그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방계 아이들을 면면히 살펴보았다.
“나머지 네 명은 누군지 모르겠구나.”
“기돌에서 온 유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제하드 라이언하트 되십니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방계의 아이들도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매끄럽게 말한 것은 유진 뿐. 다른 아이들은 목소리를 떨고 말을 더듬거렸다. 바로 맞은편에 본가의 가주가 앉아있다는 것이 아이들을 긴장시켰다.
“…음.”
모든 소개를 들은 길레이드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길레이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서 턱을 괴었다.
침묵.
방계의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디자이라. 그녀는 길레이드의 바로 앞자리였기에, 시선을 가만 두지 못하고 애꿎은 허벅지만 쥐어뜯었다.
‘배고픈데.’
식사 준비라도 끝나고 부르던가. 유진은 초라한 식탁을 노려보았다. 빵 몇 조각과 차가 나와 있기는 했지만 저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저 새끼는 또 누구야?’
이오드의 옆에는 금발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디자이라, 가르기스와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놈이다. 대충 보건데 라이언하트의 가계는 아닌 것 같다. 바로 옆에 앉은 이오드도 남자가 누군지 모른단 눈치였다.
“아버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시엘이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길레이드를 빤히 보았다.
“3년 만에 돌아오신 거잖아요. 제 선물은 없나요?”
“미처 생각을 못했구나.”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길레이드 역시 딸을 아꼈다. 하물며 시엘은 장남과는 달리 애교도 많지 않은가.
“에이… 전 매일 아버님이 보고 싶었는데. 아버님은 안 그러셨어요?”
“보고 싶었지.”
“거짓말. 선물도 안 가져 오셨잖아요.”
“하하, 혈계식을 치른 뒤에 따로 선물을 주면 되지 않느냐. 이 아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오가는 대화에 이오드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시안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시선을 내리 깔았다. 본래라면 그 또한 시엘과 함께 아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안의 명치에는 아직 어제의 멍이 남아 있었다. 결투, 패배. 시안은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아버님. 저 손님은 누구신가요?”
시엘은 유진과 한 번 눈을 맞추고서, 이오드의 곁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유진이 저 남자를 계속 힐긋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누군지 모를 남자의 정체가 궁금한 것은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식탁에는 애니실라와 테오니스는 물론이고, 길레이드의 두 동생들도 합석하지 못했다.
혈계식을 관장하는 라이언하트의 가주.
혈계식에 참석하는 아이들.
그 뿐이어야 할 자리에 정체모를 외인이 앉아있는 것이다.
“…음. 조금 뒤에 소개하려 했는데…”
“전 상관없습니다.”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 아직 요리도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아이들이 침묵을 버거워하니, 이야기로 환기시키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확실히. 마음이 급해 일찍 불러 모은 것을 후회하던 차였소.”
“하하, 길레이드님의 잘못은 아니지요. 먼 친척들과의 첫 만남은 누구나 어색함을 느낄 겁니다.”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을 들었다. 배가 고프니 뭐라도 목구멍에 밀어넣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린이 여러분. 아롯의 적색 탑에서 온 로베리안이라고 합니다.”
“…어?”
디자이라가 놀란 소리를 냈다. 로베리안? 몇몇 아이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적색 마탑주.”
이오드가 경악한 표정을 하고서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푸웁.”
유진의 입에서 차가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