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5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외삼촌 부부가 날 감시하라고 붙여 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연우재였다. 윤부경과 추성희가 우러러보는 한라그룹의 직계 손주, 게다가 국내 사모 펀드사 부동의 1위인 CAM파트너스의 차기 오너. 그런 그에게 돈 몇 푼 쥐여 주고 허드렛일을 시킬 리가 만무하다.
나는 잠시 딴생각에 골몰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The bottom line is…. 보드 앞에 선 강사는 메인 보드 위의 관용어구를 유려하게 설명해 나갔다.
“더 바텀 라인 이즈 다음에 주어 동사로 문장이 뒤를 따르는 건 말이지요, ‘요컨대, 핵심은, 결론은, 요점은 이러이러하다’라는 관용적 표현이랍니다. 가끔은 강조하는 의미로 이 뒤에 명사 단어 하나만 올 수도 있어요.”
잠시 미뤄 두었던 단상이 뇌리 한가운데로 되돌아왔다. 결국 요점은 앞으로 몇 주 더, 연우재와 이렇게 만나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기행 뒤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 하나만은 확실해 보였다.
-정말 쭉 이 반에 있을 거예요?
-그럼 안 되나? 수강료도 다 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그와 마주쳤을 때 조금 놀랐다. 전주 금요일에는 급한 일이 있었는지 수업 중간에 바삐 나가 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되돌아올 리 없다, 제멋대로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듯했다. 연우재는 내 예상을 비웃듯 오늘도 착실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애당초 ‘착실’이란 단어가 걸맞지 않은 상황이긴 했지만.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구석에 앉은 연우재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태블릿 PC 화면에 뭔가를 휘갈기고 있었다. 그때 다시 시선을 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마법에 홀린 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우재가 고갤 들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 창 바깥에 내리는 어스름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속 모를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한 그늘 같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재빨리 고개를 틀었다. 심장이 쿵, 쿵, 미친 듯이 뛰었다. 아주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께가 바짝 조여들기 시작했다.
착각일까. 자꾸만 귓가를 찔러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뒤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 헤쳐 옆얼굴을 가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과 뺨의 열기는 그 후로도 한참을 가라앉을 줄 몰랐다.
* * *
그를 그렇게 훔쳐보는 게 아니었는데.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말거나, 레벨에도 안 맞는 수업을 듣든지 말든지. 처음부터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마침내 강사가 밖으로 나간 뒤 조교가 회화 스터디 조에 대한 가이드를 알려 주고 났을 때였다. 갑자기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 두 명이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수업 혼자 들으시죠? 우리랑 스터디 안 하실래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내 시선은 연우재 쪽으로 향했다. 이미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긴 그럴 거라 예상은 했었다.
“어…. 잠시만요.”
남자들에 둘러싸이는 건 역시 불편해 여자들 쪽을 둘러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굵직한 저음이 들렸다.
“야. 송은효.”
여자들 틈에 자리한 연우재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쪽으로… 아, 아니다. 나가서 얘기하자. 어차피 우리 둘만 할 거.”
우리? 설마 나랑 스터디를 하겠다는 뜻인가? 단둘이서만?
“미안. 난 이미 같이 할 사람이 있어서.”
연우재는 눈 깜짝할 새 여학생 무리를 제치고 이쪽으로 다가와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가서 밥부터 먹자.”
서늘한 시선이 내게 스터디를 청했던 두 남학생을 빠르게 훑었다. 명백히 경계하는 눈빛에, 남자들은 머쓱한 듯 돌아섰다.
“뭐야? 역시 둘이 그거였네.”
“아니, 그러면서 왜 따로 앉고 그러냐. 괜히 기대하게.”
여자들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 사이였어? 근데 왜 내외하고 그랬대?”
“그러게. 좋다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에게 이끌려 강의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어깨를 두른 손을 홱 뿌리치고 가방도 낚아챘다.
“지금 뭐 해요?”
“스터디 우리 둘이 하자, 그냥. 너도 낯선 사람들하고 엮이는 거 싫어하잖아.”
“…….”
“일단 저녁부터 먹으러 갈까.”
기가 막혔다. 7시 30분이 넘은 시간이라 저녁때가 되긴 했지만 그와 단둘이 식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양할게요. 스터디도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애당초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사람과 무슨 스터디란 말인가.
“나 실은 스피킹 꽤 잘해.”
“…….”
“그동안 안 써서 까먹은 줄 알았는데 일주일 들어 보니까 감이 확 돌아오더라고.”
“…….”
“그러니까 내가 큰 도움이 되긴 할 거야. 아예, 이번 여름 오픽 AL까지 따게 해 줄까?”
“연우재 씨.”
“회 좋아해?”
“날생선 잘 못 먹어요.”
대답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지하 주차장 출구를 황망히 찾으려 했지만, 연우재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 그래? 그럼 그냥 한식으로 가자.”
“저기요.”
“저번 주는 내가 바빠서 못 권했지만 오늘은 스케줄이 괜찮아.”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 화법은 대체….
“밥 한번 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밥때 됐으니까 그냥 먹는 건데.”
결국 또다시 그 요란한 스포츠카를 타고 학원 건물 밖으로 나섰다. 도착한 곳은 눈부신 명동 도심 한가운데, 그 밤거리보다 더 휘황찬란한 호텔 앞이었다.
“뭐, 뭐예요, 여기?”
호텔이라니? 미쳤나?
“여기 한정식이 꽤 괜찮아.”
“놀랐잖아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허, 헛웃음을 짓고 핸들에서 손을 뗐다. 발레파킹 담당으로 보이는 호텔 직원이 입구 회전문 쪽에서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남녀가 호텔에 가면 다 그 짓만 할 거라 생각해?”
“…정말 밥만 먹자고요?”
“나랑 자고 싶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움찔 놀랐다. 반면 그는 날씨 얘기라도 하듯 지극히 차분해 보였다.
“뭐…라고요?”
목까지 번지는 열기에 숨이 막혔다. 나랑 떡 치고 싶어? 나 너랑 좆질해도 되냐? 따먹어도 돼? 그런 천박한 표현을 썼다면 차라리 마음껏 화를 내고 경멸을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거 아니면 이상한 억측은 그만둬. 너 아니라도 상대는 많아.”
“네…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연우재는 내 빈정거림을 무시하곤 차에서 내렸다. 키를 직원에게 넘긴 그가 조수석 창으로 다가서자 나는 움찔, 얼굴을 뒤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