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36)
140화. 천중일검 남궁천승 (1)
저벅.
땅 위로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중년인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웠다.
그림자에 무게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 안에 들어선 일행은 거짓말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사내의 기세는 마치 양어깨를 찍어누르는 듯했다.
“…….”
저벅, 이벽은 앞으로 나섰다.
산개한 일행들을 지나 중년 사내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내에게서는 반백의 머리칼 외에 노화의 흔적 따윈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뵙게 되는군. 이벽이오.”
꾸벅, 이벽은 목례했다.
“헛, 말이 퍽 짧군 그래?”
“말버릇이라서. 나이에 관계없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을 높이거나 낮추지는 않소. 이해해주시오.”
“…푸핫!”
사내가 웃었다.
“푸핫, 푸하핫! 그래, 그렇구만!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개인 내가 이해해줘야지!”
사내, 남궁천승이 크게 웃었다.
그림자와 기세가 함께 흔들렸다.
“…….”
남궁세가주, 천중일검 남궁천승.
이벽은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헌데 무슨 일이시오? 우리의 용무는 내일인 것으로 알고 있소만. 혹, 날짜를 착각하셨소?”
“아, 오해는 말게! 지금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 뒤에 있는 아이를 보러왔을 뿐이니 말일세.”
“…….”
이벽은 생각했다.
일행이 이곳으로 안내되었음을 남궁천승이 정말로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한 사항을 가주에게 보고도 없이 남궁청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또한.
“…재미있군. 여인네를 납치해다 가둬놓고는 이런 늦은 시간에 가주께서 직접 찾아오신단 말이지.”
‘뒤에 있는 아이’란 물론 언미희를 뜻하는 것일 테다. 이벽은 막연한 불쾌감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조금 전 이벽이 별채 안으로 들어섰을 때 등을 돌리고 있던 언미희는 당연하다는 듯 ‘가주님’이라는 호칭을 꺼냈다.
“험! 아무리 그래도 주제넘음이 좀 지나치군 그래. 내가 내 집에서 못 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
훅, 무게가 더욱 어깨를 짓눌렀다. 이벽의 허리가 숙여지기를 강요하는 듯했다.
허나 이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선천의 힘이 무게를 덜어주었다.
“…허헛!”
남궁천승이 재차 웃었다.
퍽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시선이 이벽을 떠나 일행들을 훑었다.
“이보게들, 내 비룡대주와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졌는데 자리 좀 비켜주겠나?”
“…….”
자연스러운 하대가 흘러나왔다. 허나 송영영과 월향은 물론, 양호명조차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걱정은 말게. 지금은 정말로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니. 비무대 위에서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또한.”
남궁천승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령 내가 정말로 무슨 짓을 하려고 든다면 자네들이 있건 없건 달라질 게 있겠나?”
“…무례가 과하시군.”
양호명이 나서려 했다.
허나 이벽이 팔을 뻗었다.
“양 문주, 물러서 주시오.”
“…대주.”
“난 괜찮으니 객실로들 먼저 돌아가 계시오. 집주인께서 내게 할 말이 있으시다지 않소?”
“…….”
잠시 침묵이 어렸다.
쳇, 양호명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송영영도 말없이 자리를 떴다.
흘끗, 월향이 불안한 시선으로 이벽을 돌아보았으나 이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두 사람을 뒤따랐다.
“어때, 조금 걷겠나?”
그리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다시 남궁천승이 말했다. 남궁천승은 여전히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허나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도리어 이벽의 기분이 나빠졌다.
저벅.
이내 뒷짐을 진 남궁천승이 걷기 시작했고 이벽은 말없이 그 옆을 따랐다.
“그래서.”
결국 이벽이 말을 꺼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시오?”
“자네에게는 감사하고 있다네.”
“…….”
“사실은 말일세. 나는 처음부터 자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거든. 그저 맹주의 뜻에 따랐을 뿐이지. 헌데 자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맹주께서 그리도 보고 싶어 하시는 겐가?”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그렇구만. 허헛.”
“…….”
서로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심계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이 노회한 강호를 읽어내리기는 어려울 테다.
이벽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남궁천승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 관심사는 정작 다른 데 있지. 자네가 데리고 있던 저 아이 말일세. 정확히 누군지는 알고 있나?”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의 저의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미희는 언미희일 뿐이다. 허헛, 남궁천승이 다시 웃었다.
“역시 잘 모르나 보군. 헌데 말일세. 나는 저 아이가 아마도 내 ‘옛 친구’의 딸이리라는 확신이 드네.”
“……!”
“오랫동안 종적을 감춰서 잊고 있었네만. 설마 그 귀한 핏줄이 하오문 따위에 팔렸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이벽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궁천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 결과적으로는 자네 덕에 귀한 옛 인연을 다시 되찾은 것이니 내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다시 정적이 스쳤다.
해가 저물자 여기저기에서 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벽은 불빛에 비치는 남궁천승의 헌앙한 얼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 아이는 내가 데리고 살겠네.”
“…뭐라고?”
“안타깝게도 몸은 망가져 버렸지만, 그렇다 해도 핏줄이나 가진바 재능이 망가진 것은 아니니 말일세.”
“…….”
“대 남궁가의 핏줄 속에서 대대손손 이어지도록 해주는 것이 옛 친구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울컥.
이벽은 욕지기가 치솟았다.
불쾌함의 정체를 이해했다.
여태껏 이런 중늙은이를 상대해야만 했다면… 부쩍 메마른 언미희의 등이 떠올랐다.
“아, 그리 화내지는 말게. ‘아직은’ 아무 짓도 안 했으니 말일세. 내 저잣거리의 파락호도 아닌데 어찌 힘으로 여인을 겁박하는 무도한 짓을 하겠나? 허헛!”
“…가주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부류인지는 잘 알겠소. 헌데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뭐요?”
이벽이 말했다.
퍽 힘겹게 가다듬은 말이었다.
꿈틀, 그러자 남궁천승이 눈썹이 흔들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렇군. 사실은 말일세. 삶이 무료하다네.”
“…….”
“남궁세가의 가주씩이나 되고 나면, 가지고 싶은 것은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 가질 수 있거든. 하지만 그렇게 가진 건 금방 싫증이 나서 말일세.”
마침내 남궁천승이 이벽을 돌아보았다. 헌앙한 얼굴 뒤로 자리한 뒤틀린 표정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말일세, 나는 자네가 최선을 다해줬으면 하네. 가진 모든 걸 걸고 말일세. 그래야 빼앗는 것이 보람차지 않겠나?”
“…….”
이벽은 참으려 했다.
허나 입이 먼저 움직였다.
“미친 중늙은이로군.”
“…푸하하하! 으하핫!”
허나 남궁천승은 여전히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손뼉을 치며 대소를 터뜨렸다.
“흠! 고맙네. 이런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로구만! 하기야 틀린 말도 아니지. 강호인이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가길 바라겠나? 응?”
“…….”
“뭐, 너무 걱정은 말게. 결과가 어떻게 되건, 자네와 저 아이 모두 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 그 말을 하고 싶었네. 그럼 푹 쉬시게.”
툭, 남궁천승이 이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덧 저만치에 일행이 머무르고 있을 객실이 보였다.
“혹 식사건 술이건 달리 필요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말하시게. 뭐든 구해다 줄 것이니.”
“…메스꺼워서 입맛이 없군. 돌아가시오. 남궁세가의 밥은 가급적 축내지 않을 테니.”
“으허헛, 으헛!”
다시 웃음을 흘리며 남궁천승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잠시 그 뒤를 바라보다가 이벽은 객실로 향했다.
조용한 감정이 차올랐다.
불처럼 번지는 분노는 아니었다. 마음은 오히려 차가워서 심법으로 다스릴 필요조차 없었다.
객실로 다가서자, 문 앞에는 송영영이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벽을 보자 대뜸 말을 건넸다.
“괜찮아? 안 맞았어?”
“…맞지는 않았지만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군.”
“어땠어?”
질문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허나 이벽이 알아듣기에 무리는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남궁천승의 기세를 떠올렸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굉장해.”
* * *
하룻밤이 지났다.
묘시 무렵의 이른 아침, 객실의 마당에서 이벽은 가볍게 몸을 푼 뒤 시종에게 물을 부탁해 씻었다.
언제나의 아침 일과를 마치자 그때 즈음 일행들이 하나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월향과 양호명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어수선해 보였다. 허나 이벽의 마음은 고요했다.
이내 해가 중천을 향하며 서서히 바깥이 부산해졌다. 공개 비무인 만큼 드디어 남궁세가의 대문을 연 모양이었다.
저벅.
“비룡대주, 준비는 되었소?”
그리고 한 무리의 무인들이 객실 앞으로 다가섰다. 남궁청을 비롯한 창검대의 무인들이었다.
“또 당신이군. 아무래도 상관은 없소만, 남궁세가에는 인력이 많이 모자란 모양이오?”
“하핫, 혹시라도 비룡대주께서 이제 와 겁을 먹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오.”
남궁청이 씩 웃었다.
일행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창검대에 의해 둘러싸여 이동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남궁세가의 중심인 대연무장이었다.
웅성웅성.
인파는 거짓말처럼 빽빽했다.
주변에 마련된 자리는 물론, 대연무장을 둘러싼 전체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일행들은 연무장 가까운 곳 한켠에 마련된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군중의 시선과 열기로 인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이벽은 문득 호남무림에서의 비무를 떠올렸다.
그때에는 남궁환과 창성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을 상대했다. 허나 이제는 남궁세가의 가주를 상대하게 되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새삼 멀리까지 왔음을 실감했다.
와아아아!!
그때, 함성이 일었다.
이벽은 비무대 위를 보았다. 그곳에 어느새 남궁천승이 올라와 있음을 확인했다.
정확히 이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 다녀오지.”
“…부디 조심해요. 소협.”
“죽지 마.”
“핫, 어디 실력 구경 좀 하겠네.”
이벽은 일행들을 일견했다.
저벅, 그리고 비무대 위로 올랐다. 그 위에 서자 환호성은 지나치게 시끄러워서 오히려 조용하게 느껴졌다.
“대주, 간밤에는 편안히 보냈나?”
남궁천승이 말했다.
내력이 실린 그 웅혼한 목소리는 주변의 소란을 압도하며 연무장 전체를 쩌렁하게 울렸다.
“내 그대와 같은 후배와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네! 오늘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래!”
와아아아아!!
“…….”
태양 아래 선 남궁세가주의 모습은 과연 한 성의 무림에 군림하는 일대종사다운 기백이 감돌았다.
어젯밤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부전자전이로군.”
이벽은 혼잣말을 했다.
저벅저벅, 그리고 남궁천승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몇 발을 떼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절정’이란 모든 무인이 꿈꾸는 경지이지만 때로는 그러한 선마저도 초월해버린 강자들이 있다.
천하십대고수로 대표되는 이들이 바로 그러했으며, 혹은 그 외에도 거대세력의 수장을 맡고 있는 이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강자들을 가리킬 말이 마땅치 않으므로, 범인들은 절정을 넘어섰다는 뜻을 담아 ‘초절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벽 역시 취풍신개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목천의 경지를 깨우쳤고, 절정을 넘어선 그 영역에 첫발을 디뎠다.
허나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사패련주 혁군악이나 개방의 취풍신개, 무당의 태허진인, 소림의 혜능선사와 같은 경지에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취풍신개는 하늘을 보았으니, 그 위를 향해 나아가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즉, 목천(目天)이라 함은 이제 겨우 하늘을 ‘보았고’ 그로 나아가기 위한 길 위에 섰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밤, 이벽은 남궁천승의 기세를 몸으로 받아보았다. 분명히 가늠하기 힘든 힘이었으나.
그 역시 아직 하늘로 나아가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벽은 일말의 찜찜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설령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자, 언제라도 편하게 들어오게. 내가 선공을 양보하지 않으면 비웃음을 살 테지!”
“…….”
이벽은 남궁천승을 바라보았다.
어찌되었건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가주, 어떤 검을 쓸 생각이오?”
“…허어? 그건 무슨 말인가?”
“남궁세가의 검이라면 이미 많이 겪어봤소. 당신의 아들 남궁환도 쓰러뜨렸고, 숭무관주 남궁천수도 쓰러뜨렸으니.”
“헛, 듣고보니 그렇군. 허헛!”
남궁천승이 웃음을 흘렸다.
“혹 구체적으로 어떤 검을 겪어보았는가 기억하고 있나?”
“대연검법과 창궁무애검법이오.”
“흠.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가전무공의 명예회복을 해야겠지. 우선은 본가의 뿌리에 해당하는 대연검법으로 하겠네.”
“…한 수 배우겠소.”
탓, 이벽이 쇄도했다.
그 순간, 남궁천승의 검이 흔들렸다. 전방위를 휩쓸며 거대한 그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채앵!
검신이 부딪혔다.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