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58)
162화. 심, 기, 체 (1)
째앵.
적파심공의 강기가 으깨졌다.
그와 동시에 혈기가 이성을 잠식하려 들었으나 목천의 영역에 점어든 이벽의 의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상단전에 깃든 선천의 힘이 이성을 보호한다. 그리고 이벽은 화영지정의 가락을 떠올렸다.
후욱.
이벽의 몸 안에 들어찬 적파심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리고 조각 난 강기들이 모두 꽃이 되어 흩날렸다.
화영검무였다.
“각오하게. 우선은 패서라도 제정신을… 에엥?”
취풍신개의 말끝이 흐려졌다.
살기등등했던 강기가 꽃잎이 되는 일은 취풍신개로서도 물론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허나 뿐만이 아니다.
그 순간, 나뭇가지에 실린 자신의 강기가 함께 흩어진 것이다. 마치 ‘양분을 빨리는 듯’했다. 그리고.
서걱, 툭.
“……!”
나뭇가지가 베어졌다.
양쪽 다 강기가 사라졌으므로 나뭇가지는 검을 상대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그때, 이벽은 이미 다시 내력의 흐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만월무변심공의 내력이 달빛처럼 이벽의 혈로를 비추었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그 순간 이벽의 검이 움직였다.
구름 뒤에 숨듯, 검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강기도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강기’가 취풍신개를 향해 쏘아졌다.
푸욱.
취풍신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허나 손에 와닿는 감각은 없었다.
이내 가슴을 관통당한 취풍신개의 모습이 서서히 흐트러진다. 잔상, 혹은 이형환위였다.
무엇이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취풍신개를 제자리에서 물러서게 했다는 것이다. 이벽이 그 즉시 눈앞의 선을 넘으려 했다.
뻐억.
“에라, 어림도 없다, 요놈아!”
허나 그때, 좌측 옆구리에 격통이 일며 이벽의 몸이 우측으로 훅 날아갔다.
“푸헐, 허허헐! 내 살다살다 별 기교를 다 보는구나! 살기로 승화하는 꽃이라, 술 한 잔 생각나게 하는 검공이로다!”
“…….”
몸이 허공을 가르며 밀려난다.
허나 이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선천의 힘을 찢었고,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그 순간 와락, 현기증이 일었다.
‘쓰러지겠군.’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다.
치이익.
이벽은 발로써 땅을 긁었다.
붕 뜬 몸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헐헐, 아쉽게 되었구나! 뭐, 그래도 그 정도면—”
“…그러고보니 내 걸개에게서 배운 게 하나 있는데 아직 보여드리질 않았군.”
“앙?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이벽은 용천혈을 비웠다. 발바닥을 땅에 붙이고 나아가려는 힘을 한껏 응축한 뒤.
타앙.
일거에 쏟아내었다.
‘취풍신개의 일보’를 밟았다.
쐐애액.
이벽의 몸이 쏘아졌다.
그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조차 없는 속도였으나, 확실히 속도만큼은 취풍신개에 못지 않았다.
후욱.
“…허어!”
허나 찰나의 순간, 이벽은 취풍신개의 나뭇가지가 휘둘러지는 것을 보았다.
휙.
이벽은 몸을 기울였다.
반토막 난 나뭇가지는 길이가 충분치 않았고, 이내 가지는 몸을 가볍게 스치고서 지나갔다.
비틀.
허나 그것만으로 몸은 균형을 잃었고 자세는 엉망이 되었다. 제대로 된 착지는 글렀으나 속도에 문제는 없다.
퍽 볼썽사납다고 해도.
‘어떻게든 선만 넘는다면.’
후우웅.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벽은 작게 웃었다. 이내 이벽의 몸이 선 위를 지나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뻐어억.
“…커억.”
취풍신개의 무릎이 이벽의 배에 꽂혀 들었다.
와장창, 쿵쾅!
그리고 날아왔던 속도에 비례하는 속도로 이벽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쿨럭, 커헉!”
쓰러진 이벽이 다시 피를 토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사지에 힘이 빠졌다. 이벽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취풍신개를 확인했다.
“…가지만 쓰겠다고 했잖소.”
“…이번 건 진짜 실수였네.”
늙은 거지는 스스로도 본인이 무릎 차기를 시전한 것이 황당한 듯 꺼벙한 표정을 지고 있었다.
“아니, 미안하네… 진짜로. 당연히 선을 못 넘을 줄 알고 이후에 늘어놓을 훈수를 생각해놨건만… 진짜 넘어버릴 것 같으니 나도 모르게 그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풀썩.
마침내 이벽의 의식이 끊겼다.
* * *
촤아악.
“허억!”
얼굴 위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이벽은 눈을 떴다. 벌떡,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본인이 맨땅에 널브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뭘 하나? 어서 안 일어나고.”
“…….”
눈앞에는 취풍신개의 능글맞은 얼굴이 있었다. 손에 든 동냥 바가지에는 물이 반쯤 담겨져 있다.
물론 끼얹어지고 남은 물일 테다.
“벌써 해가 중천일세. 자고로 일찍 일어나는 거지가 동냥밥을 얻어먹는 법일세.”
이벽은 상황을 이해했다.
비무 중에 탈진하여 쓰러진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된 채 지난밤을 보낸 듯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푸헐, 그렇게 말하기에는 네놈 몰골이 나보다 더 거지 같은데? 푸헐헐!”
그제야 이벽은 스스로를 살폈다.
찢어지고 헤어진 옷가지에는 피를 토한 얼룩과 더불어 땅 위를 뒹군 흙먼지가 고스란히 덮여있었다.
의복이 망가지는 건 이미 일상이 되었지만… 다짜고짜 뜀박질을 시작해 온종일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마을 한 번을 거치지 않았다.
즉, 갈아입을 옷 따위는 없다.
이벽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걸개, 나한테 뭘 했소?”
“하긴 뭘 해? 설마 이 거지가 네놈 잘난 몸뚱아리에 무슨 짓이라도 댔을까 봐?”
“…그런 의미는 아니었소만.”
몰골과는 별개로 몸은 가벼웠다.
외상은 물론 내상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려 두 번이나 피를 토했다.
선천의 힘이 지닌 회복력을 감안한다 해도 하룻밤 사이에 회복될 만한 내상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나.’
돌이켜보면… 일전의 남궁세가 때부터 이미 심신의 회복이 빨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헐헐, 뭐가 어쨌건 밥 먹을 준비나 하게. 아침밥이라면 내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으니!”
취풍신개가 한켠을 턱짓했다. 늙은 거지의 얼굴에 기대에 찬 눈빛이 흘렀다.
이벽이 시선을 돌리자 저만치에 죽은 멧돼지가 통째로 손질까지 마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가? 푸헐헐헐!”
“아침부터 육식을 하시오?”
“헐! 그게 무슨 말인가? 다 자넬 생각해서 한 일일세. 그만큼 피를 흘렸으면 고기를 먹어줘야지!”
취풍신개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내 본래는 개방주의 체면상 남는 밥 외에는 가급적 손대지 않네만… 어제 일로 자네에게 미안하기도 하니 어쩔 수 없이 살계를 연 게 아닌가? 흠흠!”
뚝, 멧돼지를 바라보는 늙은 거지의 입가로 침방울이 흘렀다. 훅, 소매가 번개같이 입가를 훔쳤다.
“…….”
이벽은 돌아섰다.
저벅저벅,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 어딜 가나 자네?”
“우선은 좀 씻어야 할 것 같소. 소리를 들으니 이쪽에 냇물이 있는 것 같은데… 맞소?”
“아, 그, 그렇구만…. 헐헐!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그래, 나도 오랜만에 등목이나 해야겠군!”
“…….”
바스락.
두 사람은 수풀을 헤쳤다.
이내 멀지 않은 곳에 개울물이 나타났다. 풍덩, 취풍신개가 그 즉시 물로 뛰어들었다.
“어푸! 좋다! 헐헐!”
물에 젖은 늙은 거지의 몰골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저 작고 움츠러든 몸 안에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고수가 들어있음은 새삼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벽은 웃옷을 벗었다.
물에 들어서는 한편 동시에 몸 곳곳을 살폈다. 옆구리에도, 어깨에도 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상하군.”
“헐헐, 뭐가 말인가?”
“그렇게나 두들겨 맞고 피를 토했는데 내상은 거의 다 회복되었고, 외상은커녕 멍조차 없소.”
“그야 멍이 없는 건 내가 요령껏 잘 때려서 그렇지! 이 취풍신개가 사람 한두 번 패본 줄 아나?”
“…하긴 그런 것 같군. 여기에만 흔적이 남은 걸 보니 몽둥이로 패는 데에는 참으로 도가 트신 것 같소.”
이벽이 허리를 폈다.
배 한복판에는 커다란 피멍이 들어있었다. 마지막에 이벽을 쓰러뜨렸던 무릎차기의 흔적이었다.
“어흠. 커흐흠!”
철면개가 헛기침을 했다.
“그건 내가 힘 조절을 실패해서… 아니, 자네가 그렇게 성장이 빠를 거라곤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푸헐헐!”
“…….”
“…아, 그래. 갈 길이 바쁘니 지금 이 자리에서 못다한 훈수를 계속하겠네. 어디 보자—”
첨벙, 타앗.
취풍신개의 입에서 ‘훈수’란 말이 나온 순간, 이벽은 튀어 올랐다. 황급히 거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아니, 경기 일으키지 말게. 말로 할 테니 편하게 씻으면서 듣게. 안 때리네.”
* * *
“그래, 자네는 심(心), 기(技), 체(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나?”
퍽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허나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었으므로 이벽은 말없이 취풍신개를 쳐다보았다.
“심이란 물론 마음이네. 동시에 내력을 뜻하기도 하지. 선천이건 후천이건 뭐건, 내력이란 건 결국 마음에서 비롯되는 힘이기 때문이네.”
그것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이벽은 문득 언제였던가 이진천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음으로 힘을 다루기에 심법(心法)이며, 따라서 마음이 갈피를 잃고 심마(心魔)에 빠지면 내력을 다루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한 체라는 건 물론 몸뚱아리네. 내력의 힘이 깊어질수록 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일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의 본질은 뼈와 살이지.”
“…그렇구려.”
이벽은 대답했다.
그 또한 어려운 얘기는 아니었다.
무공은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되, 신체 그 자체를 초월할 수는 없다.
“그리고 기란 기예를 뜻하네. 다시 말해 모든 무공과 초식을 일컫는 말이지. 이 세 가지가 모여 무(武)를 이루는 것이네.”
“…….”
“헌데 여기에는 사실 비밀이 있네. 그것은 즉, 이 세 가지가 본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칼같이 자를 수가 없다는 뜻이네.”
헐헐, 취풍신개가 웃었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이 단련되면, 다른 쪽도 함께 성장하지. 바꿔 말하자면 심, 기, 체의 조화로운 성장 없이는 성취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네.”
“…….”
이벽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허나 깨달음과 신체의 숙련, 그리고 내력의 깊이가 서로 비례한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꼬집어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무공을 익히는 입장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사실이었다.
“잘 알겠소.”
“퍽 시시하단 얼굴이로군? 헐헐!”
취풍신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잘난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눈앞에 두고서 너무 뻔한 얘길 늘어놨구먼. 자, 그럼 이제 자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봅세!”
첨벙.
문득 취풍신개가 냇물을 한 바가지 퍼 올렸다.
“이것이 자네의 심(心)일세.”
“…바가지가 말이오?”
“아니, 이 냇물이 말일세.”
촤악.
취풍신개가 바가지의 물을 풀숲에 뿌렸다.
“어때? 냇물이 줄었나?”
“…….”
“아니지, 한 바가지 퍼 올린들 티도 안 나지. 마치 자네의 내력과 같네. 어디서 그런 신공절학을 배웠는지는 모르겠네만, 참으로 놀라울 따름일세.”
낙검진천신공.
선천의 힘에 의해 내력의 흐름은 끊임없이 유지된다. 그 사실을 취풍신개가 눈치챘음은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천하에는 참으로 기인이 많아. 헐헐! 아마 그 가르침을 창안하신 일대종사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 거지로서도 감히 승부를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네.”
“…….”
문득 취풍신개의 눈이 빛났다.
일찍이 이벽의 상식을 부정했던 이진천의 존재는 마침내 천하십대고수인 취풍신개마저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뭐, 자네에게 무리한 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은 말게. 어찌 되었건, 그 이상의 심(心)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네.”
취풍신개가 다시 웃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심은, 적어도 심법의 측면에서는 이미 ‘완성’되어있네.”
“……!”
완성.
그것은 무의 길을 걷는 이에게 있어 어떤 의미에서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뭐, 미심쩍은 데가 없지는 않네만… 그리고 다음은 자네의 체(體) 말일세.”
문득 취풍신개가 자신의 젖은 옷자락을 쥐어짰다. 뗏국물이 주르륵 흘렀다.
“몸뚱아리에는 다른 게 없지. 단련과 실전, 즉 성실함 뿐일세. 그리고 자네는 그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네. 아마 몇 번이고 스스로를 쥐어짜고 한계로 밀어붙였겠지.”
“…….”
“그러니까… 지금 자네의 몸뚱아리는 저 멀리 까마득히 앞서있는 심(心)을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첨벙.
취풍신개가 다가왔다. 쿡, 손가락으로 이벽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리고 자네의 마음 역시 그런 몸을 이끌어주고 있네. 근래에 회복력이나 혈로의 탄력성 따위가 눈에 띄게 늘었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네.”
“…그렇군. 대강 알겠소.”
마침내.
의도를 알기 어려웠던 취풍신개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현재의 이벽에게까지 이르렀다.
말인즉슨, 신체가 성장했기에 낙검진천신공이 ‘이제서야’ 제힘을 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
아니, 그러나.
이것이 낙검진천신공이 지닌 ‘제힘’의 전부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벽은 새삼 낙검진천신공에 대해 감탄했고,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다음은 기, 즉 기예 혹은 무공의 이야기인데 말일세.”
취풍신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혹 내가 ‘사다리’ 운운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나?”
“…물론 기억하고 있소.”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황보세가를 향한 행보를 제안하기 위해 이벽의 객실에 찾아왔던 취풍신개는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맥락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허나 어째서 ‘사다리’인지, 그 의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때였다.
휙, 문득 취풍신개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머무르고 있던 방향을 향했다.
“…쯧, 안 되겠군.”
눈빛이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오, 걸개?”
이벽은 같은 방향을 향했다.
훅, 황급히 기감을 끌어올렸다.
허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이벽은 긴장했다.
취풍신개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기감을 뛰어넘은 채 오직 취풍신개에게만 느껴지는 누군가가 이 자리에 나타난 거라면… 그 정체는 범상치 않을—
“더 이상은 못 참겠네. 배고프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고기 구우면서 하지.”
“…아, 좋을 대로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