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뜻밖의 충돌 (2)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 이벽과 왕수련, 장석두는 장시 외곽의 풍월객잔으로 향했다.
이렇게 장시에 내려올 때면 일행이 저녁을 먹는 장소는 늘 그곳으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북적북적
객잔에 도착하자 다소 이른 시각임에도 안은 만석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일행이 먼저 도착해 자리를 맡고 있었다.
제갈소미와 아이들이 탁자 두 개를 나누어 빙 둘러앉아 있다.
“잘들 놀았어? 근데 수련이랑 석두는 잠깐 사이에 왜 두 배가 됐니?”
“그, 그렇게 쪘어요, 언니?”
왕수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제갈소미가 피식 웃으며 왕수련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그 옆으로 장석두와 이벽이 나란히 앉았다.
“어때? 꼬맹이도 잘 놀았냐?”
이벽은 동전을 내밀었다.
“응? 뭐야 이건?”
“…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앞서 제갈소미가 쥐여준 용돈이었다.
그러나 장석두는 이벽의 돈이 나가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아, 됐어. 이미 준 용돈이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언젠가 가지고 싶은 게 생길지도 모르니까.”
“거봐요, 내 말이 맞죠, 오빠?”
그러나 제갈소미는 흘끗 보더니만 손사래를 쳤고, 왕수련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
앞서 왕수련이 말했었다.
‘그 돈으론 오빠가 가지고 싶은 걸 사야만 한다’고. 하지만 이벽은 스스로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장석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지고 싶은 게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이벽은 동전을 다시 갈무리했다.
곧 점소이가 일행의 식탁으로 다가왔고, 제갈소미가 능숙하게 식사를 주문했다.
그리고 탁자 위로 침묵이 감돌았다.
종일 장시를 돌아다닌 끝에 모두가 기분 좋은 나른함에 빠져든 것이다.
쿠당탕!
“아이고야!”
그러나 나른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객잔의 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고,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쯧, 거 요란하기는.”
점소이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 객잔으로 들어선 듯한 두 명의 사내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손님이 찾아왔거늘 다짜고짜 문전박대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응?”
“아, 아니 그게 말입니다요… 보시다시피! 지금 정말로 자리가 만석인지라!”
“자리가 없으면 만들어 줄 생각을 해야지. 그럼 우리더러 걸식을 하란 말인가?
울상이 되는 점소이.
누가 봐도 사내들은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점소이는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깔끔한 도인의 차림새, 그리고 허리춤에 걸린 검 한 자루. 누가 보아도 무림인이다.
“…….”
눈에 익은 차림새로군.
말을 타고 내달리던 일행이다.
“이보시오들!”
그때, 둘 중 나머지 한 명이 좌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몸은! 대 청성파(靑城派)의 삼대제자인 우진이라 하오! 천하의 안위가 걸린 긴급한 용무로! 사문의 어르신을 모시고 머나먼 사천 땅에서 이 운남까지 오게 되었소!”
쿵! 발을 찧었다.
객잔의 바닥이 꺼질 듯 흔들렸다.
“긴 여독에 지친 우리 제자들을 위해! 오늘 하루! 본 객잔을 좀 양보해줬으면 하오만!”
그리고 사내는 팔짱을 끼었다.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
이내 객잔 내의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민들에게 있어 무림인과는 무조건 얽히지 않는 게 최선책임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쯧.”
제갈소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재수 옴 붙었네. 하여튼 명문이란 새끼들은 어딜 가서도 바가지가 샌다니까.”
드르륵.
제갈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가자, 얘들아.”
제갈소미는 뜻밖의 상황에 얼어붙은 아이들을 한 명씩 추슬렀다.
이벽과 왕수련, 장석두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인파에 섞여 낙검문 일행은 함께 객잔의 문을 나서려 했다.
그때, 두 사내 중 한 명이 문밖으로 나서려던 제갈소미와 눈이 마주쳤다.
“호오, 잠깐.”
슥, 사내의 팔이 앞을 막았다.
그리고 끈적한 시선이 제갈소미의 위아래를 훑었다. 씨익,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리가 충분히 남을 것 같으니 소저와 소저의 일행은 함께 식사하셔도 좋소이다.”
“…아뇨, 사양하지요.”
“아하하,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청성의 제자들과 함께 하룻밤 어울리는 것도 소저에게 나쁠 것은 없지 않겠소?”
“아, 네. 그런데 저는 무지렁이 시골 촌년이라 잘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제갈소미가 일견하며 지나치려 했다.
탁, 그러나 사내의 다리가 다시 앞길을 막았다.
“어허, 소저의 허리에도 목검이 걸려있으니 무림인이 아니오? 우리가 먼저 사문과 이름을 밝혔거늘 어찌 그리 무례하게 구시오?”
“…….”
“아니면 혹여 소저에게는 우리 청성이 우스워 보이는 것이오?”
비릿한 미소.
억지 논리를 만들어 아녀자를 희롱한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다.
명문의 제자라는 신분 하에서 이러한 행동들은 치기 어린 잠깐의 유희로 정당화된다.
“하아.”
제갈소미가 이마를 찌푸렸다.
“이벽, 애들 데리고 나가.”
“…사저.”
“얼른. 적당히 있다 갈 테니까.”
“아, 물론 일행은 떠나도 좋소.”
훠이훠이,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사내가 손을 휘저었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군.
청성파라. 이벽은 생각했다.
말로만 듣던 그 위세 높은 구대문파의 일원이다.
당연히 내공을 익혔을 테다.
허나 기세는 갈무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세는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전의 경험이 아예 없거나 많지 않은 듯했다.
이벽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바로 옆에 탁자가 놓여있다.
타악!
“어엇?!”
판단을 마친 순간 이벽은 탁자를 차올렸다. 탁자가 와르르 뒤집히며 사내 한 명에게로 날아들었다.
사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사이, 이벽은 목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청강검식의 발검식은 납검 상태에부터 이미 초식이 시작된다.
쾌의 묘리가 번개같이 쏘아졌다.
뻐억!
“커억!”
이벽의 검이 나머지 사내의 명치 부근을 두드렸다. 타격감은 확실했고 비명이 새어 나왔다.
뻐억!
그리고 뻗어 나간 검이 부드럽게 회수되며 다시 한번 사내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회검식의 곡의 묘리였다.
“…끄.”
털썩.
눈을 까뒤집은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허리에 맨 검을 뽑아보지도 못한 채.
채앵!
“이, 이런 악적 같으니—!”
그때, 탁자를 쳐낸 나머지 사내가 등 뒤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이벽은 얼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겅!
소름 끼치는 소리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벽은 돌아섰다. 박차고 일어서며 목검으로 사내의 사타구니를 올려쳤다.
뻐억!
“억.”
“…….”
“끄, 끄으으, 으으으으…….”
툭, 탱그랑.
사내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리고 사타구니를 부여잡은 채 사내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바닥에 쓰러져 경련한다.
“이, 이런, 이런 짓을, 하고도 네, 네놈이 무사할 것—”
빠악!
목검이 사내의 머리를 쳤다.
사내의 신형이 축 늘어졌다.
마지막 일격은 이벽이 아니라 제갈소미의 검이었다. 그리고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타다다닷!
혹여나 말려 들까 객잔의 손님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쓰러진 점소이는 넋이 나간 듯했다.
저벅저벅.
제갈소미가 이벽에게 다가왔다.
철썩!
손바닥이 이벽의 뺨을 후려쳤다.
“어, 어, 어, 언니……?”
철썩!
반대쪽 뺨을 한 번 더 후려쳤다.
“뭐 하는 짓이야, 이벽. 미쳤어?”
“…….”
이벽은 할 말을 찾았다.
“…사형제란 게 이런 거라고, 사저가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나?”
“…하아.”
털썩, 제갈소미가 근처의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힘 빠진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망했다. 아아아아.”
얼굴을 감싸 쥐는 제갈소미.
그러나 다음 순간,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낙검문의 아이들을 둘러봤다.
“석두야. 수련아.”
“어, 응……?”
“애들 데리고 빨리 도망가, 지금 당장, 최대한 멀리. 마을 어른들을 찾아서… 어떻게든 문주님께 이 일을 전해달라고 말씀드려.”
“누, 누나랑 형님은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 * *
“그냥 오늘 하루 기분 더럽고 끝날 일이었어.”
“…….”
“알아들어? 그냥 내가 밥 한 끼 먹어주고 느끼한 얼굴로 주접떠는 거 맞장구쳐주다 적당히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었다고.”
청성파의 두 제자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객잔의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런데 네가 청성파의 제자를 패버렸어. 거기에 우리가 도망까지 쳐버리면 어떻게 될까?”
“…….”
“이 일을 청성파가 무림세력 간의 다툼이라 생각해버리면? 청성이 우리를 적대세력이라 규정짓는다면?”
이벽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거야. 너도, 나도, 곰탱이도, 마을 사람들도, 심지어는 우리 애들마저도.”
“…그럴 리는.”
“그럴 리가 있어. 너는 소위 명문정파라는 것들이 얼마나 더럽고 치졸하고 무서운 곳인지 몰라.”
하아, 한숨을 내쉬며 제갈소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솔직히, 문주님이 온다 한들 이 상황을 수습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어.”
“…….”
“이벽, 네 과거나 출신 사문 같은 건 묻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지금의 우리에겐 충동적인 혈기를 뒷수습해줄만한 배경이 없어.”
충동적인 혈기인가.
“그렇군.”
이벽은 대답했다.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깊게 헤아리지 못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제갈소미의 분노 안쪽에는 이벽 자신을 향한 걱정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벽은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객잔 바깥에서 일련의 무리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열리고, 사내들이 들어섰다.
앞선 두 사내와 같은 차림을 한 일행들이 왁자한 모습으로 들어서다 말고 흠칫, 멈춰섰다.
엉망이 된 객잔 내부를 둘러본다.
“…우, 우진?! 우명?!”
새로 들어선 사내들이 쓰러진 제자들에게 다가섰다. 황급히 추스른 뒤, 내부를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이벽과 제갈소미에게 그 시선이 닿았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한 명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는데?”
“우선 대 청성파의 제자분들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녀는 이소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남동생이지요.”
“그래, 그쪽 이름 같은 건 됐고.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그저 작은 오해가 있었지요.”
“작은 오해라…….”
“두 소협께선 제게 식사를 권하며 청성과 함께할 기회를 주셨습니다만, 제게는 너무 과분한지라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하지만 두 소협께선 거듭해서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
“그런데 마침 이 광경을 본 제 남동생이 두 분 소협을 ‘여인네한테 억지 추파나 던지는 불한당’으로 오해하여 그만 충돌을 일으키고 말았지요.”
사내의 시선이 이벽을 훑었다.
이내 표정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
청년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이 비록 게을러터지긴 했어도, 대 청성파의 제자들이 그쪽 남동생한테 일 대 이로 터져서 쓰러졌단 말?”
“무슨 일이냐, 우학?”
그때, 수염을 늘어뜨린 초로의 노인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장로님, 보시는 대로입니다. 저쪽의 소저께서 ‘작은 오해’가 있었다고 하시는군요.”
“…….”
청성파의 장로, 공명자(空名子)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미색이 빼어난 여아와 널브러져 있는 어린 제자들.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무림에 처음 나온 제자들이 여염집 여인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퍽 자주 있는 일이다.
물론, 크게 흠 잡힐 것은 아니다.
건강한 사내의 젊은 혈기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가 보통의 여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공명자는 빙긋 웃었다.
“그래, 오해란 말이지. 실례지만, 소저와 소저의 동생분께선 어떤 문파에 적을 두고 계신지?”
“문파라니요? 저희는 그저 근방의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양민일 뿐입니다만.”
“하핫! 재미있는 농이로군. 말인즉슨 촌동네 소년이 청성의 제자들을 때려 눕혔다고? 소저께선 우리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그럴 리가요. 마을의 무관에서 몇 수 정도는 배웠습니다만, 대 청성파의 도장들께서 굳이 기억하실만한 곳은 아니라서요.”
“이보게 소저, 그 작은 무관으로 인해 대 청성파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네. 그런데 그런 설명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공명자는 생각했다.
상대에게 이해할 만한 세력이 있다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상대는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보는 눈들 앞에서, 청성의 제자를 해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실추된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수상하구만. 껄껄껄!”
“…….”
“뭐얼, 사문을 밝히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하지만 보아하니 소저의 동생이 혈기가 과한 모양인데, 우리 청성에서 ‘약간의 지도’를 해줘야겠군.”
“…무릎을 꿇어도 안 될까요?”
“안 된다네.”
제갈소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이름이 사실 제갈소미라고 해도요?”
멈칫
공명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제갈소미의 위아래를 살펴봤다.
분명히 빼어난 여아임에는 틀림없지만, 차림새는 초라하다. 그리고 이렇다 할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패가 있나? 아니면 제갈가의 비전무공을 펼쳐 보일 수 있나?”
“본가는 여식에게 비전을 전수하지 않는지라. 그 대신 허락하신다면 진법을 펼쳐 보이지요.”
“미안하네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네. 또 내가 견식이 짧아서 그런 것까지 알아볼 눈은 없어서 말일세.”
“…정녕 괜찮으시겠어요?”
“껄껄껄, 애시당초 섬서도 호북도 아닌 이 머나먼 운남 땅에 제갈가의 여식이 왜 나타난단 말인가? 설령 진짜라 한들 그저 끈 떨어진 방계에 불과하겠지.”
공명자는 수염을 쓸며 웃었다.
“너무 걱정 말게. 우리가 무슨 악적들도 아닌데 설마 목숨을 빼앗기야 하겠는가?”
“…….”
“뭘 기다리는지 모르겠네만, 이 이상 객잔에 피해를 끼치기도 뭐 하니, 딴소리 말고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