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85)
190화. 계속되는 수라의 길 (3)
공손욱은 잠시 고민했다.
그것은 사실 진즉부터 결론을 내려놓은 문제였다.
다만 자신이 내린 결론을 각주와 뭇 촌장들 앞에서 입으로 꺼내기가 망설여졌을 뿐이다. 허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내 공손욱이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저로서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흘흘,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각주 천막심이 답했다.
“천하의 남촌장께서 그따위 흐리멍덩한 말을 꺼내다니, 이거 꽤 실망이 큰걸. 흘흘흘!”
“…….”
“그래, 설명이라도 함이 어떤가?”
공손욱은 쓰게 웃었다.
이내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비룡대주는… 성장했더군요. 아니, 그것을 단순히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안휘에서 다시 만난 비룡대주는… 저로서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더군요.”
“자, 잠깐, 매형! 그게 무슨?”
서촌장 천소진이 즉각 반응했다.
“애송이가 그렇게까지 강해졌다구요? 고작해야 몇 개월 만에?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공손욱은 암영각의 2호다.
말인즉슨 암영각 전체를 통틀어 각주 바로 다음가는 실력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 바로 다음가는 실력자인 3호는 천소진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신 역시도 감히 공손욱에게 도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절정과 초절정.
그 벽은 엄중했다. 헌데.
“뭐가 말이 안 되나? 흘흘.”
그때였다.
답한 것은 각주 천막심이었다.
“우리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완숙에 이른 절정의 수준이었네. 그리고 살아온 나이를 생각하면, 고작해야 몇 년 만에 거기까지 다다랐단 뜻이지.”
“…….”
“헌데 거기서 반년이란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그 이상이 될 가능성 또한 충분한 게 아닌가?”
“…말씀대로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공손욱이 말을 받았다.
“그 이후로 한 달여가 지난 지금이라면… 다시 무언가를 이뤘을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그 성장 속도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
천소진은 침묵했다.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적어도 그의 판단은 그랬다.
무공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허나 문제는 그러한 헛소리를 그의 머리 위에 위치한 암영각의 주인과 2호가 나란히 늘어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욱이 말을 이었다.
“단신으로 모든 판도를 뒤집어 엎을만한 ‘패왕’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보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겠지요.”
흑천방주 맹철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선천의 힘을 다루는 강자였으며, 지난 몇 년간의 폐관을 통해 더욱 강해졌다고 했다.
물론,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맹철극이 순수한 무력으로 패왕가주 혁군악을 쓰러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패왕’의 위용을 기억하는 암영각의 구성원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허나.
“양쪽 다 힘을 가늠하기 어렵다면, 현재로서는 맹철극 쪽이 더 강하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물론, 뒤따르는 세력의 유무 또한 무시할 수 없겠지요.”
이내 공손욱이 말을 맺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말이 꽤 기네만, 결국은 자네 생각에 맹철극이 이길 것 같단 얘기가 아닌감?”
“…….”
“그럼에도 신 사패련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기권’을 택했단 말이지. 흘흘!”
천막심의 주름이 짙어졌다.
“어째서지? 정 때문인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공손욱이 다시 쓰게 웃었다.
딸과의 연으로 비룡대주와는 퍽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또한 무사히 자라 혁군악의 유지를 잘 이어받기를 바랐다.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가급적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물론.
그가 판단을 보류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왕가의 적통이 살아있으며.
둘은 사형제지간이라 하였다.
어쩌면… 비룡대주의 뒤에는 아직까지도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일찍이 안휘에서 비룡대주를 돕기 위해 모인 이들과 나누었던 흑천방과 녹림, 그리고 혈교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패련을 점령한 저들은 어떤 식으로든 혈교와 엮여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나중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지금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막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흘흘흘!”
물론, 그와 같은 이야기는 이미 안휘에서 귀환한 직후 각주에게 모두 전달했다.
허나 각주는 그와 같은 사실을 다른 촌장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지금 이 순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
판단력을 시험받는다.
계속해서 쓴웃음이 감돌았다.
타앙.
그때였다.
찻잔으로 탁자가 두드려졌다.
“저는… 비룡대주를 믿습니다.”
그리고 공손욱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동촌장 목일령이었다.
“호오, 우리 동촌장께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퍽 오랜만이로구먼!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천막심이 되물었다.
거구의 사내가 잠시 침묵했다.
“…저는 무인이기 이전에 의원입니다. 그리고 일전에는 서촌장과 전(前) 북촌장의 연이은 습격으로 상처 입은 그 소협의 몸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지요.”
움찔, 천소진이 동요했다.
목일령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뭘 보았는지 아십니까? 그 소협의 몸 안에는… 내력이 ‘한 톨’도 없었습니다.”
“…뭐, 뭐라구요? 아니, 잠깐.”
천소진이 다시 끼어들려 했다.
허나 목일령은 멈추지 않았다.
“각주님, 송구합니다만… 말재주가 미천하여 제가 느낀 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소협을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런 직감이 들었습니다.”
타앙, 다시 탁자가 두드려졌다.
“아니, 대체 그 애송이가 뭐길래 다들… 정신 좀 차려요! 목가 아저씨까지 왜 그래요?”
기어코 천소진이 다시 나섰다.
주변을 돌아보며 목청을 높였다.
“지금 이게… 사사로운 정이나 직감 따위로 움직일 문제입니까? 대세는 명백히 기울었어요. 해남검파까지 움직였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게 대체 왜—”
“…‘얻을 게 없다’라.”
목일령이 천소진을 향했다.
“서촌장은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만, 불과 며칠 전 비룡대주가 홀로 광서의 칠독문을 멸문시켰다고 하오.”
“……!”
천소진의 안색이 흔들렸다.
칠독문이라면 물론 암영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암기와 독으로서 이름이 난 집단이었다.
최소한 암기 몇 자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애송이가 홀로 무너뜨릴 수 있는 세력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 어쩌면 지금 당장은 맹철극이 우세를 점할 수도 있겠지. 허나 만에 하나 비룡대주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그 재능을 품은 채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힘을 쌓아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
“그때는… ‘얻을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잃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거요. 어쩌면… 칠독문이 우리 암영각의 미래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타앙.
천소진이 다시 탁자를 두드렸다.
“…거 아저씨 오늘따라 말이 과하시네? 각주님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
3호 천소진과 4호 목일령.
두 사람의 눈이 팽팽히 부딪혔다.
서서히 무거운 기운이 장내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허나 그때, 짝, 천막심이 손뼉을 쳤다.
“자, 거기까지들 하게. 흘흘!”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쳇.”
천소진이 훽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듣는들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것은 암영각의 수많은 목숨들이 걸린 일이다.
그리고 뭐가 어찌 되었건, 애송이 따위가 이미 뒤집힌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허나.
‘…뭐, 걱정할 것 없겠지.’
흘끗, 천소진은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은 여인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암영각의 6호이자 북촌장 대리인 백리영이었다.
일찍이 북촌장이자 암영각의 3호였던 백룡강과 그의 아들인 백룡일이 나란히 재기불능의 부상을 입으며, 그다음 서열인 그녀가 사실상 북촌장의 지위를 떠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前) 북촌장 부자를 그 꼴로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비룡대주였다.
즉, 북촌 백가는 비룡대주와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따라서 그녀는 당연히 신 사패련측을 택할 것이다.
남촌장 공손욱이 기권이고.
서촌장인 자신과 동촌장인 목일령이 대립한다면, 북촌장 대리인 그녀가 자신의 편에 섬으로써 결과는—
“저희도 기권입니다.”
그때 백리영이 말했다.
타앙.
“아, 왜요! 이런 미친……!”
* * *
이벽은 길을 재촉했다.
귀주를 가로지르며 노숙과 걸식을 이어갔다.
이내 신 사패련의 개파식이 예정된 날로부터 사흘 전, 사패련 본단이 자리한 귀양의 거리에 접어들었다.
저벅.
대낮의 거리는 스산했다.
사실상 인적은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는 듯했다.
곳곳에 파괴의 흔적들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으며, 채 지워지지 않은 피 냄새가 맡아졌다.
“…….”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리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과거 술에 취한 파진성이 난동을 부렸을 때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그곳과는 이미 전혀 다른 장소가 되었다.
또한 그 분위기는.
이벽에게 있어 낯설지 않았다.
무림과 비(非) 무림의 경계가 무너지고, 마침내 칼끝이 보통의 민초들에게로 향한다.
사패련은.
더는 ‘울타리’가 아니게 되었다.
“…….”
저벅.
이벽은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걸음걸음마다 사방에서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저벅.
저벅저벅.
이내 시선은 발소리가 되었다.
민초들이 있어야 할 생활공간에서 병장기를 찬 무인들이 걸어 나왔고, 머릿수는 하나둘 점점 늘어났다.
저벅.
무인들은 이벽을 둘러쌌다.
불과 반 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어느새 이벽은 도합 백 명에 달하는 무인들에게 둘러싸였다.
탁.
그리고 걸음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졌을 때, 마침내 이벽은 걸음을 멈추었다.
“내게 무슨 용건들이오?”
“…비룡대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면의 무리 속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인사 올리겠소. 나는 광서 귀혼파(鬼魂派)의 장문인 종인명이라 하오. 클클클!”
“…….”
초로의 깡마른 사내였다.
목소리는 가래가 끓는 듯했다.
씩,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벽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우선은 존경을 표하오. 스스로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제발로 걸어들어오다니, 과연 기개가 대단하시오!”
“큭큭.”
“크하핫!”
사방에서 웃음이 흘렀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러싼 무인들은 흑천방을 지지하는 중견 이하 세력들에서 대표로 파견된 고수들인 듯했다.
걔중에서도.
련내에 머무르지 않은 채 굳이 민초들의 공간을 차지하고 앉은 이들의 생각은… 불 보듯 뻔했다.
“뭐, 별다른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제부터는 우리가 길을 안내할 테니 부디 잘 따라오시길 바라겠소.”
클클, 스스로를 종인명이라 소개한 사내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아마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딴 길로 새거나 도망치려 든다면 별로 재미있는 꼴은 못 볼 것이오.”
“…길이라면 알고 있소. 그러니 저리 비키시오. 내가 내 발로 가는 것이지 당신들 따위와 동행할 생각은 없으니.”
“뭐라? 와하하!”
다시 왁자한 웃음이 번졌다.
“…….”
이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자신 있게 만드는지, 자신들의 목숨이 안전하다고 믿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여기까지 오는데 그 정도 기개는 있겠지! 허나 우리도 맡은 바 소임이 있어서 말이오!”
“…….”
“그대의 목을 베는 건 우리의 역할이 아니지만… 그 입에서 죽여달란 말이 나오게 만들어놓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종인명이 입술을 핥았다.
이벽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헌데 보아하니 이미 반쯤은 죽어가는 모양인데… 정말로 죽어버리면 곤란하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마시오.”
“…그렇군.”
이벽은 이해했다.
요컨대 자신이 지치고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말마따나 이벽의 몰골은 노숙으로 인해 엉망이었으며, 넝마가 된 무복의 곳곳에는 피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허나.
단 한 방울도.
이벽의 피는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듯하오만, 나는 죽으러 온 게 아니오.”
“하핫! 그렇다면 뭐요?!”
“크하하하!”
“와하핫!”
사방에서 웃음이 번졌다.
후욱.
“크하하… 헉!”
“허억!”
그 순간 이벽에게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피 안개와 같은 기운이 장내를 내리누르며 웃음이 뚝 끊겼다.
“나는… 맹철극을 죽이러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