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86)
191화. 계속되는 수라의 길 (4)
수라의 길.
그것은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운남에서부터 이곳 귀양에 이르기까지, 이벽은 이미 많은 목숨들을 베었고 손에 피를 묻혔다.
그것은 이벽을 가로막았던 칠독문도들이나 혹은 예의 ‘산적’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인들이기도 했지만.
또한 이벽 스스로 ‘사패련과 전쟁을 치를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즉.
어느 누구든 ‘경지를 넘어선 이’가 아니고서는 자신을 막아서봤자 목숨의 낭비에 불과함을, 이벽은 사파무림에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얄궂게도.
피로써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이벽은 눈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더욱 가차 없이 베었다.
일종의 경고였다. 허나.
“…….”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듯했다.
귀양 시내에서는 다시 일백을 넘어서는 무인들이 질리지도 않고 이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앞선 싸움에서 상처를 입어 ‘사냥하기 쉬워진’ 이벽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윽.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힉.”
적파심공의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눈이 마주친 적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죽일만한 이유는 충분했으나.
피 냄새는 퍽 지긋지긋했다.
또한… 이들 모두가 ‘뿌리부터 썩어버린 악인’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태생이 악하지는 않되, 대세에 휩쓸리면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이’들 또한 섞여 있을 터였다.
후욱, 이벽은 살기를 거두었다.
“…허억, 헉!”
“허억……!”
이내 사방을 둘러싼 무인들 사이로 가쁜 숨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
“나는 맹철극을 죽이러 왔지, 당신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니오. 당신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소.”
철컥, 이벽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이니, 가로막으면 베겠소. 목숨의 낭비를 원치 않으면 지금 비키시오.”
“……!”
적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것은 최후의 경고임과 동시에 목숨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싸움이 시작되면, 뿌리부터 썩었건 아니건 일일이 생살여탈의 판단을 내리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으.”
주춤, 적들이 한발 물러섰다.
훅.
허나 그때, 인파들 속에서 몇 개의 기척이 움직였다. 이벽은 적들이 배후로 접근하는 것을 감지했다.
“…기어코 본보기를 자처하는군.”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이식(回劍第二式).
변검(變劍).
서걱, 서걱.
이벽의 검이 번쩍였다.
현란한 변화를 보이며 회수되었고 접근하던 그림자들의 목이 열매처럼 툭 떨어졌다.
푸확.
한 박자 늦게 피가 튀었다.
털썩, 털썩.
그리고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 세 구가 이벽의 주변에 널브러졌다.
“……!”
이벽의 검신에는 하늘처럼 선명한 강기가 어려있었다. 웅성웅성, 적들 사이로 동요가 번져나갔다.
“머, 멀쩡하지 않소……?”
“이,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허나 그때였다.
“저, 정신들 차리시오! 고작해야 애송이 한 명이 아니오?!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문을 대표하는 무인들이오?! 정신 차리고 진을 유지하시오!”
종인명이 악을 내질렀다.
허나 이벽이 시선을 향하자 흠칫 동요하며 물러섰다. 황급히 무인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
한심한 몰골이었으므로 이벽은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귀, 귀혼강령대법(鬼魂降靈大法)을 발동시켜라! 어서—!!”
종인명이 다시 악을 썼다.
그리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금속의 ‘방울’이었다.
찰랑.
다음 순간, 방울이 흔들렸다.
찰랑.
그러자 요사스러운 소리가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움찔.
일순 이벽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불그스름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실체가 아닌 환영임을 직감했다.
찰랑.
‘…이것은.’
감각이 왜곡되고 있다.
‘진법’의 일종임을 깨달았다.
원리를 이해할 수는 없으나, 미리 준비되어 있던 진법이 방울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술사를 친다.’
낌새가 좋지 않다.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을 마친 이벽은 즉시 종인명을 추적하려 했다. 허나.
“크… 하하핫!”
“흐하하! 뭐, 뭐냐 이 힘은!”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순간 사방에서 기운이 빗발쳤다.
그리고 전의가 꺾였던 적들의 눈빛에 거짓말처럼 흉흉한 기세가 감돌기 시작했다.
훅, 적들이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일제히 이벽을 향했다.
타앗.
“…비룡대주! 죽여주마!”
“크하핫! 아니, 내가 죽인다!”
그 즉시 적들이 달려들었다.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법에 영향을 받은 적들의 위세가 거짓말처럼 당당해졌다. 이벽은 종인명의 추격을 포기하고 검을 휘둘렀다.
채앵.
“……!”
그리고 조금 놀랐다.
일검이 가로막혔다.
“크하! 고, 고작 이거냐—!!”
“이런 애송이를 두려워했다고?! 푸하하! 어처구니가 없구만! 잘게 찢어주마!”
적의 힘은 퍽 무겁게 느껴졌다.
추측건대 진법이 어떤 식으로든 적들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진법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발은 물에 젖은 듯 흔들렸으며, 내력의 흐름은 마치 산공독에 당한듯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즉, 원리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진법 안에 있음에도 적들에게는 힘을 안겨 주는 반면, 자신에게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챙, 서걱.
“크하하! 크하… 커윽!”
“…….”
허나 그럼에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검으로 베어내지 못한다면 두세 번 잘라내면 그만이며, 적이 많다면 서서히 줄이면 그만이다.
적들과 이벽의 수준 차이는 이미 이따위 ‘장난’으로 메꿔질 만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있었다.
챙, 서걱.
다만.
손속에 사정을 둘 순 없었다.
어느덧 사패련의 앞마당이었다.
고작해야 이 정도의 적들을 상대로 목천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만 한다.
서걱, 챙, 서걱.
“크하, 커헉… 크하하핫!”
이벽은 착실하게 적들을 베었다.
거죽을 찢고 사지를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적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짓밟고서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그 얼굴 위로는 치명상을 입은 채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서걱, 푸확.
“…커억.”
이내 목숨 몇 개가 떨어졌다.
그리고 이미 넝마와 같은 이벽의 무복 위로 새로운 피 얼룩이 튀었다. 으득,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흘리지 않을 수도 있었던 피였다.
찰랑.
“……!”
허나 그때였다.
이벽이 분노한 순간 다시 방울 소리가 울렸고, 소리가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질, 이벽은 현기증을 느꼈다.
휘익.
“지금이오, 여러분—!!”
“크핫, 죽어라 애송이 노옴—!!”
이벽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적의 무기 몇 자루가 이벽의 빈틈을 노리고 뻗어졌다.
* * *
훅. 타다닥.
이벽은 경신법을 펼쳤다.
눈먼 검 따위에 맞지는 않는다.
이벽의 몸이 곡의 묘리로 휘어지며 무기들은 빈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핫, 아깝구나! 아까워! 자, 힘내시오들! 마침내 애송이가 궁지에 몰리고 있으니!”
“…….”
어딘가에서 종인명이 외쳤다.
그리고 이벽은 마침내 이해했다.
이 방울 소리는… 과거 겪었던 제갈성의 진법과 마찬가지로, 적들과 자신의 마음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충동’을 불어넣고 있다.
때문에… 평정심을 근간으로 한 청강유엽공의 내력 운용이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적들의 경우에는 물론 사파의 내공을 익혔기에 오히려 위세가 당당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훅.
이벽은 내력을 휘었다.
그리고 적파심공을 일으켰다.
콰콰콰콰!
“……!”
그 순간, 이번에는 오히려 내력이 평소보다도 거칠게 내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했다.
불쑥, 살심이 치솟았다.
서걱, 서걱.
“…컥, 커억!”
“그르륵… 크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이벽은 도살지도를 펼쳤다.
마침내 검이 다시 가벼워졌다.
자잘한 적들은 일초식 난과 이초식 륙의 연계초식 속에서 썰리고 깎여나갔으며.
그보다 강한 적들은 삼초식 참으로 목이나 허리를 베었고, 사초식 압으로 찍어눌렀다.
“…크핫!”
이벽은 웃었다.
불현듯 유쾌해졌다.
역한 피 냄새가 달콤해졌고, 검에 와닿는 살육의 감각은 이벽을 몽롱하게 했다. 허나.
다음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또다시 혈기가 이성을 잠식하려 드는 것을 직감한 순간, 이벽은 화영지정을 떠올렸다.
휘이이.
기억 속에 각인된 피리 소리가 방울 소리를 상쇄했으며, 적파심공의 기세가 주춤했다.
그리고.
‘그렇군.’
적의 의도를 헤아렸다.
예상대로 청강유엽공의 운용을 방해하던 진법의 힘은, 적파심공의 경우 오히려 ‘과하게’ 활성화시켰다.
허나.
그 또한 적의 의도인 것이다.
즉, 이 진법은… 피아를 가릴 것 없이 어느 한쪽이 죽어 없어질 때까지 스스로를 쥐어짜도록 설계된 모양이었다.
찰랑.
또한… 방향감각을 왜곡시켜 ‘술자’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크하핫, 크핫!”
“죽어라, 비룡대주우우!”
말하자면.
종인명을 제외한 나머지 무인들은 그저 이벽을 지치게 하기 위한 소모품이자 고기방패에 불과하며.
어쩌면.
진짜 싸움에 앞서 이벽의 ‘힘’을 가늠해보기 위한 보다 윗선의 명령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스쳤다.
“…….”
찌이익.
적의 뜻을 파악한 순간, 이벽은 결국 선천의 힘을 찢었다.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우웅.
검신에 붉은 강기가 일었다.
“크… 크아앗!”
채앵.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적과 검을 부딪쳤고, 그 순간 이벽의 검에 맺힌 강기가 산산조각 났다.
화악.
그리고 강기는 꽃이 되었다.
화영검무의 꽃잎이 흩날렸다.
“…헛?”
꽃잎에 닿은 적의 눈빛이 일순 맑아지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벽은 추격하지 않았다.
화아아.
꽃잎은 안개를 닦아내듯 사방으로 산개했다. 이내 다시 시야가 걷혔고, 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허억!”
“이, 이게 어떻게 된……!”
이내 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화영검무의 힘이 진법의 영향을 약화시킨 것이다.
“…대, 대법이!”
“보, 복구해라, 얼른!”
찰랑.
그때 다급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타앗.
허나 방향감각은 이미 돌아왔다.
이벽은 그 즉시 땅을 박찼다. 방울 소리를 따라 멍하니 선 적들을 밀치며 이내 술자의 앞까지 도달했다.
“허, 허억, 잠깐—!”
서걱.
즉시 목을 쳐내었다. 허나.
“…….”
이벽은 다시 당혹감을 느꼈다.
방울을 들고있던 상대는… 종인명이 아닌 젊은 사내였기 때문이다.
“사, 사형이—!!”
“뭘 하느냐! 신경 쓰지 말고 대법에 집중해라! 대법이 깨어지고 있질 않느냐—!!”
찰랑.
찰랑.
그때, 인파 속 어딘가에서 종인명의 악다구니가 울렸고 사방에서 다시 다급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스으으.
붉은 안개가 다시 내려앉았다.
“크… 크아아악!”
“…….”
진법이 재활성화된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이성이 돌아왔던 적들의 눈빛이 다시 희번뜩해졌다.
‘…한 명이 아니었나.’
진법을 유지하는 술자는… 처음부터 종인명 혼자가 아닌 여럿이었던 모양이었다.
챙, 서걱.
재차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술자들만을 골라 죽이는 것은 무리한 일임을 이해했다.
적의 목숨을 아끼기 위해 목천의 힘이나 화영검무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펼칠 만큼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마침내.
이벽은 분별을 포기했다.
사패련의 코앞까지 당도했음에도 수라의 길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서걱, 서걱.
“커…헉!”
명확한 살의를 담아 검을 뻗었다.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 있건, 뿌리 깊은 악인이건 아니건, 적들은 빠르게 시신이 되었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서걱.
“크… 꺼억.”
적들을 죽이면서, 이벽은 오히려 분함을 느꼈다. 칠독문주 모간의 말마따나 목숨은 가벼웠으며.
어쩌면.
정말로 그들과 자신이 다를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퍼억.
퍼억.
허나 그즈음이었다.
전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벽을 둘러싼 적들의 외곽 여기저기에서 충돌음이 일어나며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적이 또—!”
“누, 누구냐!”
“뒤, 뒤를 조심… 커억!”
퍼어억.
방울 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이내 이벽은 ‘작은 인영’ 하나가 외곽을 종횡무진하며 술사들만을 골라 제거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몸놀림은 민첩했으며.
움직임은 눈에 익었다.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크… 크아아앗!”
그때였다.
등 뒤에서 적이 달려들었다.
휙, 퍼억.
“꺼… 억!”
허나 이벽이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누군가’가 날아들며 이벽을 대신하여 칼날을 몸으로 막았다.
“이, 이런 개… 개 같은…….”
풀썩.
그것은 종인명이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에 이르기까지, 도신이 깊이 틀어박힌 종인명이 욕지기와 함께 땅에 널브러졌다.
퍼어억.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 도를 휘두른 장본인 역시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으깨졌다.
“…….”
이벽은 상황을 이해했다.
예의 ‘작은 인영’이 종인명을 집어던져 공격을 대신 막게 하고 동시에 등 뒤에서 적을 처리한 것이다.
풀썩.
이내 머리가 깨진 시신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작은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뒤를 조심해야죠, 공자.”
“…….”
“…괜한 참견이었나요? 아하하.”
오후의 햇살 속에서 권갑을 낀 인영이 다가왔다. 머쓱한 듯 뺨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