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97)
203화. 여지없는 선택
드륵.
이벽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바깥에는 해가 저물었고, 어둠은 무르익어 새벽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 마을 바깥 저 너머의 숲속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기척을 쫓으려 했다.
허나 그때.
이벽은 발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밥상이었다.
이벽의 방문 앞에 차려진 밥상은 식지 않도록 천으로 덮어져 있었으며, 그 꼼꼼함에서는 정성이 느껴졌다.
이벽은 문득 허기를 느꼈다.
돌이켜보면 사형제들과의 점심 식사 도중 멋대로 자리를 떴고, 그대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허나.
“…….”
제갈소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연 이 밥상을, 이러한 배려를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떠나야 하는 입장이므로 더는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욱씬.
찰나의 아픔이 스쳤다.
허나 이내 밥상을 지나쳤다.
탓.
그리고 가볍게 땅을 박찼다.
후욱.
이내 이벽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세 호흡만에 이미 마을의 울타리 위를 지나쳤고.
부스럭, 탁.
다시 세 호흡만에 멈춰 섰다.
인근의 숲속에 자리한 공터였다.
타닥, 탁.
그리고 그곳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으며, 생선 두 마리가 꼬챙이에 꿰인 채 구워지고 있었다.
“어, 왔냐 막내야?”
“…문주님.”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이진천이 그 앞에 앉아있었다. 덥석, 꼬챙이 하나를 집어 든 이진천이 내밀었다.
“마침 잘 익었구나. 받아라.”
“…….”
불가에 비치는 이진천의 미소에서는 어떠한 의도도 읽어내기 어려웠다.
이벽은 꼬챙이를 받아들었다.
이진천의 옆에 나란히 주저앉은 뒤 잠자코 생선을 뜯었다.
이내 이진천도 나머지 꼬챙이를 들고서 뜯기 시작했다. 먹는 데에 집중했으므로 사제지간에 침묵이 흘렀다.
한편 이벽은 생각했다.
이 공터는… 과거 이진천이 이벽에게 ‘심부름’을 맡겼던 바로 그곳이었으며.
또한 당시에는 그 정체를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창공비검’이 이진천의 손끝에서 펼쳐졌던 장소이기도 했다.
—막내야. 뭐가 그리 급했느냐?
—네 사형제들처럼 말이다. 마음의 돌 따윈 적당히 모른 척하고, 외면도 하고, 또래들과 함께 천천히 네 나이의 즐거움을 찾아보아도 되었을 것을.
기억들이 빠르게 스쳤다.
일각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 막내야. 마을로 다시 돌아오니 기분이 어떻든?”
그리고 두 마리의 생선이 앙상한 뼈가 되었을 무렵,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
이벽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저 서서히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표정이 왜 그러냐…? 네가 그토록 좋아하고 아끼는 마을이 아니더냐?”
이진천의 말마따나.
무림을 주유하는 내내 화정촌과 낙검문은 줄곧 이벽의 이정표였으며, 버팀목이기도 했다.
또한.
그 공기는 여전히 따뜻하고 정겨웠다. 허나… 이벽은 사패련이 자리한 귀주, 귀양을 생각했다.
무림과 비(非) 무림의 경계는 엄격히 구분되어있어야 하며.
그 경계가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여러 번 겪어보았다.
평화는… 너무 쉽게 찢겨졌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무림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고로 이벽은 두려웠다.
자기 자신이, 혹은 자기 자신으로 인한 ‘피 냄새’가 이곳까지 불어닥칠 것이 못내 두려웠다.
가만히 있기도 어려울 만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핫, 똥 씹은 얼굴하고는.”
피식, 이진천이 웃었다.
그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벽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패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따라서 이벽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 또한 응당 이벽이 해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허나.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무성의했다.
“뭐, 네가 기억하는 대로 맹철극은 죽었고, 혈마도 죽었고, 반면 죽은 줄 알았던 패왕 혁군악은 알고 보니 살아있었다.”
이진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면 된 거 아니냐?”
말마따나 패왕이 살아있다면.
절대자의 군림 아래 사패련의 질서는 다시 바로잡힐 것이며, 그 빈자리를 메우고자 했던 비룡대주 이벽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자신은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모든 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언 소저.’
문득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살아남는다면…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허나 맹철극과의 비무에 나선 이래, 이벽은 화정촌으로 옮겨졌고 다시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막내야.”
그때 이진천이 손을 뻗었다.
슥슥, 이벽의 머리를 쓸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진심이야.”
이진천은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허나 장난기가 사라진 눈빛은 서늘했다.
“이제 ‘심부름’은 끝났다. 그리고.”
“……!”
“내가 절벽에서 건진 너를 데리고 한동안 약을 팔며 데리고 다닐 때, 나를 계속 따라온다면 칼 쓰는 법과 사는 법을 가르쳐주되,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었지.”
그것은.
이벽이 아직 선우벽이었던 시절의 일로, 퍽 오래된 이야기였으나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가도 이젠 치른 셈 치자.”
이진천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
‘심부름’은 뭐였고 ‘대가’는 뭐였는지, 이벽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이진천은 청산이 끝났노라 했다.
“그러니 이제 너는 자유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고, 더는 네게 이래라 저래라 할 생각도 없다. 허나.”
슥, 이진천의 손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너의 뜻을 묻고자 한다.”
철컥.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풀었다.
푸욱.
그리고 검집에 담긴 검이 땅에 꽂혔다. 움찔, 검을 바라보는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낙검문의 검. 낙천(落天).
그것은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이벽의 손에 쥐어져 있거나 혹은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이었다.
수많은 적들을 베었고.
적들로부터 이벽을 지켰다.
또한 특징 없는 외관과 달리.
결코 흔해 빠진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궁천승의 제왕검형, 황보혁의 일권, 당평세의 암기, 맹철극의 흑천뇌도를 버텨낸 검이었다.
“선택하거라.”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다시 무림으로 나가고 싶으냐? 그렇다면 이 검을 뽑거라. 말해두지만 이번엔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낙검문주로서 내 후계에게 정식으로 하사하는 거다.”
“……!”
“다만 그런 선택을 하면… 두 번 다시는 이 마을로 돌아와선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문주님.”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쌓은 업만으로도 마음은 불안에 떨었다. 더 많은 은원과 피 냄새를 달고서 화정촌에 다시 발을 들일 생각은 물론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반대로.”
이진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면… 아직 늦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거라. 그리고 다시는 무림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말거라.”
“……!”
“천하도 잊고, 무림도 잊고, 목숨의 무게도 잊고, 가능하면 검조차도 잊고.”
씩, 이진천이 웃었다.
“촌부가 되어 하루하루 늙어가다 언젠가 이 산언저리에 뼈를 묻는 거다.”
* * *
이벽은 잠시 망설였다.
물론,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평화는 위태로웠고, 수라의 길을 선택한 그때 이미 선택지는 없어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뜸을 들인 것은.
막상 다시 만난 얼굴들이 정겨웠으며, 이것으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아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벽은 마음을 정리했다.
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벽은 검을 잡았다. 그리고.
철컹.
서늘한 소리와 함께 검신이 뽑혀져 나왔다. 그 순간, 익숙한 감각이 등을 타고 흘렀다.
짜르르.
마치 아직도 맹철극의 뇌기가 감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검수 이벽의 눈빛이 명징해졌다.
“…후회는 안 하겠느냐?”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다만… 어쩌면 이 또한 네 마음에 달린 일이 아니겠느냐? 조금은 시간을 두고서—”
“…….”
이벽은 답하지 않았다.
이내 이진천이 쓰게 웃었다.
“낙검문 일대제자, 이벽.”
문득 익숙한 표정이란 생각이 스쳤으나,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 검은 이제부터 너의 것이며, 또한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 그러니 원하는 어디로든 떠나거라.”
“…알겠습니다.”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말을 더 짜내려 했으나 이내 이진천의 표정으로부터 그것이 불필요한 짓임을 이해했다.
이벽은 검과 검집을 허리에 갈무리한 뒤 훅, 날아올랐다.
몇 걸음 만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고, 처소에 도착했다. 밥상을 재차 외면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간소하게 짐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탓, 마을의 정문을 향해 조용히 몸을 날렸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고, 하물며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오늘의 일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재회이며, 그저 기억 속에서 꿈처럼 남게 될 것이었다.
탓.
허나 마을의 문을 나선 그때였다.
“…….”
이벽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들키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것은 이미 글렀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저벅.
“야, 꼬맹이.”
그리고.
어둠에 싸인 저만치의 수풀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태연한 기색으로 걸어 나왔다.
“오밤중에 또 어딜 튀어 나가냐?”
“…….”
“하핫. 벽이 너, 밥 안 먹고 뻗대더니 나가서 혼자 군것질이라도 하고 오려고?”
제갈소미와 혁대웅이었다.
표정은 마찬가지로 태연했으며.
또한 당연하다는 듯 그 손에는 각각 목검과 봉이 들려있었다.
“…난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이벽이 말했다. 허나.
“아, 그러셔? 이유가 뭔데?”
다시 제갈소미가 반문했다.
“…….”
그리고 이벽은 침묵했다.
손에 묻힌 피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벽아.”
다시 혁대웅이 말했다.
“우리는 너를 묶어둬야겠어.”
“…왜지?”
이번에는 이벽이 물었다.
“그야 물론 우리는 네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아. 하지만 네가 정말로 가길 원한다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야.”
“…….”
“하지만 진짜 문제는… 너도 진심으로 떠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거야. 그치?”
혁대웅은 웃고 있었다.
허나 그 눈빛은 날카로웠다.
“네 마음은… 대충 짐작이 가. 불안하기 짝이 없겠지. 이제 와서는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나도 사파 출신이고 나름대로 험한 꼴도 제법 겪어봤거든.”
“…….”
“네가 무림에서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 얼마나 힘든 상황에 놓였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떻게든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거야.”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표정과 눈빛 속에서, 이내 사형제들은 아무리 온갖 이야기들을 늘어놓은들 서로가 말로써 설득이 되지는 않을 것임을 이해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시 혁대웅이 말했다.
“딱 한 대.”
슥, 봉 끝이 이벽을 향했다.
“우리들 중 딱 한 대라도 너에게 유효한 공격을 먹인다면… 그때는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겠니?”
“……!”
이벽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래그래, 설마 내력도 뭣도 없는 이 폐급 사형제들이 무서워서 꼬리 내릴 생각은 아니겠지?”
그리고 제갈소미가 말을 받았다.
“…정말로 괜찮겠나?”
“빡치게 하지 마, 이벽. 내력이 있건 없건 우리도 명색이 무림인이고, 네 사저와 사형들이야.”
“…알겠다.”
이내 이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내력을 쓰지 않고 상대하도록 하지.”
사형제들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이벽이 바라는 바가 아니며, 다만 사형제들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다.
“…흥.”
제갈소미가 콧방귀를 꼈다.
“뭘 당연한 걸 대단한 것처럼 생색을 내니? 그럼 우리 절정고수께서 이 못난이들을 상대로 강기라도 휘두를 생각이었니? 뭐,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지만 말야.”
“…….”
훙훙훙.
그리고.
혁대웅의 봉이 회전을 시작했다.
“들어와, 이벽.”
그것은.
내력의 기척이 없다 해도.
패왕의 뒤를 잇는 수레바퀴였다.
탓, 이벽은 땅을 박찼다. 혁대웅에게 나아가며 검집째로 검을 휘둘렀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