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0)
206화. 잘못된 생각 (1)
슥.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난 오빠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이벽은 왕수련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등 위로 포개어진 왕수련의 손은 따뜻했으며, 눈빛은 계곡처럼 투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벽은 지난밤 이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잘못된 생각’이 무엇이었나를 마침내 깨우쳤다.
손에 묻힌 적들의 피.
몸 안에 스며든 혈기.
은원을 포함한 무림의 논리들.
자신이 이곳 화정촌에 머물러선 안 될 이유는 분명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저 ‘머무르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만으로 마을에 불어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방치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혼자서 멋대로 판단을 내릴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관계 속에 머무른다.
과거, 선우세가의 소가주 선우벽은 스스로를 잃어버린 뒤 텅 비어버렸으나.
이내 이벽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진천에 의해 화정촌의 주민이 되었고, 또한 낙검문의 일대제자, 그리고 장석두와 왕수련의 형이자 오빠가 되었다.
다시 채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벽이 무림을 종횡하는 내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했다.
허나 동시에 관계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하며.
또한 상호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낙검문의 의미가 그러했듯, 사형제들의 삶 속에서 스스로가 그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하다못해.
설명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끊어내는 것은.
‘책임회피’에 불과할지도 모르다.
“왜, 예전에도 그랬잖아요?”
다시 왕수련이 말했다.
“오빠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이것저것 전부 다 엄청 어색해하고… 사실 그 모습도 뭔가 지체 높은 집 공자 같아서 좋았지만요. 하하.”
“…….”
“아무튼 간에요. 너무 성급히 결정하지는 말아요. 다시 처음부터 적응해봐요. 네?”
왕수련이 작게 웃었다. 허나 동시에 이벽의 손을 덮은 그녀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야 한동안은 적응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지내다 보면 의외로 괜찮아질 수도 있잖아요?”
허나 이벽은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고, 이내 왕수련의 표정이 서서히 쓴웃음으로 번져갔다.
‘쓴웃음.’
어느새 그녀는 그런 표정을 지을만큼 어른이 되어있었다. 훅, 왕수련이 시선을 돌렸다.
쏴아아.
쏟아지는 폭포를 향했다.
“힘들다구요, 진짜. 그냥저냥 살다가도 혹시나 오빠가 어디서 칼 맞고 쓰러져있지나 않을지, 불쑥불쑥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기다려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돌이켜보면.
왕수련은 줄곧 기다려주었다.
열병에 쓰러져 몇 개월을 누워있어도 기다려주었고, 얼음같은 한겨울의 계곡을 해치고서 자신을 붙잡아주었다.
그러한 그녀를.
그리고 사형제들을.
아무 말도 없이 끊어내려 했다.
이벽은 이제와 미안함을 느꼈다.
허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쏴아아아.
이벽도 시선을 돌렸다.
낙룡폭포를 바라보았다.
계곡의 밑바닥에 가라앉고 나서야 선천의 힘은 처음으로 이벽에게 내력을 안겨주었고.
이벽은 그 힘으로 왕수련을 수면 위로 밀어보냈다. 그것만으로 나쁘지 않은 최후라고 생각했었다.
쏴아아아.
거듭해서 부서지는 폭포를 보고 있자, 그날의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비룡대주니 낙검신룡이니 하는, 무림에서 통용되던 이름들이 점점 먼일처럼 느껴졌다.
불안이 잠잠해졌다. 허나 물론.
이벽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스쳐가는 잠깐의 기분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을 물에 몸을 담가도.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벽은 평화를 받아들였다.
손과 손이 포개어진 채, 이 각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계곡물과 함께 조용히 흘러갔다.
푸드득.
머리 위로 새떼가 날았다.
문득 왕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어렸을 때는요. 저 새들이 막 부럽고 나도 날개가 달려서 마을 바깥으로 날아가고 싶었는데… 이젠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침묵을 깨었다.
분위기를 달리하듯 목소리는 퍽 경쾌했다.
“아마 저는요. 우리 부모님이나 마을 어른들이랑 마찬가지로 평생 이 마을에서 살다가 묻힐 팔자인가 봐요~”
“…….”
“그래도… 예전에 오라버니가 업고서 회택으로 데려가준 거 생각하면요. 진짜 하늘을 나는 것 같아서…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왕수련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벽은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과거 낙검진천신공의 깨달음을 얻고 눈을 뜬 뒤, 이벽은 왕수련을 업고 경신법을 펼쳐 산 아래로 내려갔었던 적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채 완성되지도 않은 경신법으로 ‘빨리 달린 것’일 뿐, 결코 ‘날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 왕수련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 듯했다. 불현듯 이벽은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수련, 날고 싶나?”
“…네?”
“물론 정말로 날 수는 없지만… 그 비슷한 것 정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어, 진짜요?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괘, 괜찮아요. 괜히 힘들게시리—”
왕수련이 손사래를 쳤다.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수련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라.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그럼… 실례할게요.”
슥, 이내 못 이긴 척 왕수련이 조심스레 업혀 왔다. 맞닿은 몸이 살며시 떨렸고 두 팔이 이벽의 목덜미를 감았다.
그리고.
이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창공비검(蒼空飛劍).
탓, 후우욱.
이벽의 몸이 솟구쳤다.
여섯 개의 묘리가 이벽의 발과 몸을 관통했고, 이내 나뭇잎처럼 춤을 추며 표홀하게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한정 나는 것은 아니었으되, 추락하는 속도는 나뭇잎처럼 느렸으며 이벽의 몸은 한껏 자유로웠다.
창공은 고요했다. 또한.
바로 직전까지 머물고 있던 계곡을 포함한 산 전체의 야트막한 정경이 까마득한 발아래에 펼쳐졌다.
푸드득.
새들은 손에 잡힐 듯 옆을 날았고.
저만치에는 화정촌의 모습마저 눈에 훤했다.
“…으, 으아.”
반각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왕수련이 입을 열었다.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꽈아악.
“…컥.”
왕수련의 두 팔이 이벽의 목을 힘껏 조여들었다. 숨통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사람 살려! 진짜 날면 어떡해! 빠, 빨리! 내려가요, 이 미친놈아!”
* * *
이벽은 마을을 떠나는 것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왕수련은 ‘적응’을 이야기했다.
허나 그런 문제만은 아니었다.
마음속의 불안은 허상에 불과할지언정, 은원은 분명한 실체였다. 때문에 결국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벽은 고민 속을 침잠했다.
한편, 낙검문의 일과는 여전했다.
마을 아이들은 아침마다 제갈소미와 혁대웅에게 검술이나 글 따위를 배우고 공놀이를 하기도 했다.
또한.
훙, 후웅.
“핫! 핫!”
장석두는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청강수련검식은 퍽 숙달되었으며, 내력의 존재감은 분명했다. 진즉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을 수준이었다.
허나.
이벽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무엇에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해가 저물고 뜨기를 반복했다.
드륵.
“야, 절정고수. 이리 나와.”
허나 이틀이 지났을 즈음.
제갈소미가 처소의 문을 열었다.
“흥, 더는 못 참아. 어딜 심각한 고민에 빠진 척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계속 놀고먹으려고?”
“…사저.”
“빨랑 나오라고! 검술 지도 안 할 거면 딴 일이라도 해! 절정이고 나발이고 이 망할 놈의 시골 무관에 놈팽이는 문주 하나로도 벅차단 말이다!”
이벽은 질질 끌려 나왔다.
그리고 부려 먹어지기 시작했다.
보를 수리하고 부서진 지붕들을 채우고 새 축사를 짓는 등, 마을의 온갖 노동에 동원되었다.
콰아앙.
“세, 세상에…….”
“바, 바위를 한 주먹에…? 여, 역시 사람의 힘이 아니구먼……!”
“호홋, 우리 막내 통뼈가 제법이죠? 앞으로 힘쓸 일 있으면 언제건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탁탁, 제갈소미가 이벽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짤그랑.
품삯은 몽땅 제갈소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이벽이 말없이 바라보자 제갈소미의 눈이 뾰족해졌다.
“뭐? 뭐? 불만 있어? 네 밥이며 옷이 어디 땅 파서 거저 나오는 줄 알아?”
“…아니, 없다.”
이벽은 문득 빈털터리에 금전 감각도 없는 비룡대원들을 사실상 홀로 먹여 살려주던 공손수를 생각했다.
콱, 콱.
좌우간 이벽은 노동을 이었다.
검 대신 낫을 잡고서 논밭의 잡초를 뽑았고, 때로는 산나물이나 죽순을 캐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이건 손발을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잠깐이나마 마음 속의 불안감이 흐릿해졌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 해가 저물었다.
“수고했어, 절정고수.”
어김없이 잡초를 캐던 이벽에게 제갈소미가 다가왔다.
“…그놈의 절정고수 소리는 그만하면 안 되나?”
“왜? 부러워서 그러는 건데? 아, 하기는 이 못난 사저가 주제 파악을 너무 못했나요? 이제부턴 존경을 담아 경어를 쓸까요?”
“…내 생각이 짧았다.”
이벽은 문득 제갈소미 앞에서는 절대로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제갈소미가 웃었다.
“잔말 말고 손 내밀어. 얼른.”
그리고 이벽의 손에 동전 몇 푼이 쥐어졌다.
“이건……?”
“뭐긴, 용돈이지. 며칠 수고했으니 조만간 시내에 나가서 수련이랑 놀다오던가 해.”
“…괜찮다. 이런 건.”
이벽은 다시 돌려주려 했다.
허나 제갈소미가 싱긋 웃었다.
“놀다오라고 이 절정 대가리야.”
“…….”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한나절 내내 제갈소미는 이벽에게 온갖 잡일을 떠맡겼고, 덕분에 이벽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더는 이벽에게 고민할 틈조차 허락지 않은 채 마을의 일원으로 녹여버리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실제로 효과가 없지 않았다. 며칠 사이 무림에 대한 기억은 눈에 띄게 잠잠해지는 듯했다. 허나.
“…허억!”
어느날 새벽.
이벽은 악몽을 꾸었다.
—대체 비룡대주께선 왜 ‘목숨이 그렇게 귀하다’고 생각하시오?
칠독문주 모간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이벽의 칼끝에서 죽어간 얼굴들이 일거에 들이닥쳤다.
벌떡, 이벽은 몸을 일으켰다. 지난 며칠 간 손도 대지 않았던 검을 잡은 뒤 처소를 박찼다.
부스럭.
다급한 발길이 숲속의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벽은 검을 꺼냈다.
후욱, 훅.
검술이 펼쳐졌다.
이벽은 청강유엽검을 휘둘렀고, 도살지도를 펼쳤으며, 팔절구궁필법을 쏘았다.
보이지 않는 적들을 베어내듯 검로는 다급했으며 또한 격정적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다시 눈을 뜬 불안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역시 ‘잃어버릴 것들’이 너무 많다.
끝끝내 떠나지 않는다면.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스럭.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타앗.
이벽은 그 즉시 땅을 박찼다. 시퍼런 강기를 두른 검이 인기척을 향해 쏘아졌다.
타앙.
“…으, 으허억!”
“……!”
허나.
쏘아진 이벽의 검은 나타난 상대의 코앞에서 가까스로 멈추었다.
“…아, 아이고 깜짝이야. 십년감수했네. 아하, 아하하……!”
“…혁대웅.”
인영의 정체는 혁대웅이었다.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으며, 그 불빛에 비치는 얼굴에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렸다.
“여긴 왜 왔나?”
“그, 그야 나무하러 왔지.”
“…이 새벽에?”
“아하하, 그야 새벽부터 칼 휘두르는 사람도 있는데… 나무를 못 할 이유라도 있니?”
“…….”
“저기… 벽아? 갑자기 튀어나온 건 내가 잘못했으니까… 우선은 칼 좀 치워줄래?”
혁대웅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