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31)
237화. 노인과 청년 (2)
탓, 저벅저벅.
이벽과 선우각은 모옥을 나섰다.
잠자코 뒤를 따르는 한편, 이벽은 산길을 앞장서는 노인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자신의 ‘아들’과 ‘아비’의 이야기를 꺼내며 무언가를 털어놓으려던 선우각은 돌연 말을 멈추었다.
“…아니, 되었소.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그보다 우선은 가야 할 곳이 있소. 보아하니 소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대충 알 것 같고.”
그렇게 이야기를 무마했다.
회한에 찬 목소리였다. 그리고.
별안간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고, 이벽은 뒤를 따랐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
이벽은 생각했다.
가주 선우각의 ‘아비’란 즉, 선우세가의 시조이자 초대 가주인 검치 선우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이벽은 과거, 독왕 당평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얼굴이며 몸짓, 말투, 그리고 기세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났던 ‘그분’의 나이가 이십 년 정도만 젊었더라면… 분명 자네와 꼭 같은 모습이셨을 것이네.
“…….”
선우명은 이벽이 태어나기도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만나본 적이 없었다.
허나 어찌되었건.
검치 선우명과 자신은 핏줄을 따지자면 조손관계이므로, 많은 것이 닮았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설령 그것이.
과거 선우벽이 친부인 선우각에게 홀대받았던 ‘진짜 원인’이었다고 해도.
이제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다만 이벽이 알아야만 하는 것은.
검치 선우명의 성명절기가 어째서 이진천에게로 이어졌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장서는 노인은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오문주 월향의 예상대로였다.
“헉, 허억… 컥!”
다만 노인의 걸음은 너무 느렸다.
이내 서서히 체력이 빠지며 무인은커녕 일반인의 속도에조차 못미치기 시작했다. 또한.
부스럭.
이벽은 찜찜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뒤를 밟고 있다.
‘…선우굉.’
이해하지 못할 것까지는 없으나, 성가시고 불쾌했다. 이내 이벽은 노인을 앞지른 뒤 등을 내밀었다.
“업히시오 노인장.”
“…헉, 웃기지 마시오. 나를-!”
“생판 남에게 똥고집 좀 부리지 마시오. 내가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그냥 업히란 말이오.”
“…….”
타앗.
이내 노인을 등에 업은 뒤, 이벽은 경신법을 펼쳤다.
타타탓.
쾌속한 보법이 펼쳐졌다.
일찍이 청강유엽신법과 연엽보의 합일을 이뤄낸 이래 이벽은 여섯 개의 무리를 경신공에도 응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쾌의 묘리와 곡의 묘리를 섞어 주변을 몇 바퀴 돌자 이내 추적자의 기척은 손쉽게 떨어져나갔다.
“어느 방향이오?”
“…이쪽이오.”
그리고 이벽이 물었다.
선우각이 잠자코 손을 뻗었다.
타다닷.
이내 이벽은 노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기슭을 달렸다.
그 몸은 일직선으로 뻗어지는 듯 했으나, 물론 나무나 바위 따위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휘오오오, 탓.
그리고.
채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어느 깊은 협곡의 밑바닥에 도달했다.
“…목적지가 이곳이오?”
“그렇소.”
“…….”
이벽은 침묵했다.
잠자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좌우 양쪽으로 펼쳐진 까마득한 절벽에 둘러싸인 채, 저멀리에 보이는 하늘은 비좁고 길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우협의 칼에 등을 찔리고 절벽으로 뛰어내렸을 때 바라보았던 바로 그 하늘이자.
일찍이 당평세의 만천화우에 쫓겨 추락하며 처음으로 창공비검을 깨우쳤을 때의 그 하늘이기도 했다.
즉.
이 협곡의 위는.
‘바로 그 절벽’이었다.
“…우연치고는 공교롭군.”
이벽은 자신이 왜 자꾸만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인 듯한-
“잘 찾아보시오. 이 절벽 어딘가에 숨겨진 동굴이 있을 테니.”
그때 노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 미치광이가 아비가 남겨둔 ‘유품’이 있지.”
“……!”
* * *
쿠웅.
이벽의 가슴이 요동쳤다.
이 절벽 어딘가에 동굴이 있고.
그 안에는 선우세가의 초대 가주이자 청강유엽공의 창시자인 선우명이 남긴 유품이 있다.
“허나.”
그때 선우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동굴이 정확히 이 절벽의 어디쯤에 있는지는 찾아내지 못했소. 그러니 물론 그 안에 남겨놨다는 ‘유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지.”
“……?”
의문이 이벽을 스쳤다.
“…그렇다면 대체 노인장께선 그러한 동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요? 내 아버지가 생전에 직접 말해줬으니 아는 거지.”
“…….”
초대 가주 선우명은.
오래 전, 마교와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가 서서히 병마로 도져 침상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고 들었다.
허나 그렇다면.
그 목숨이 다하기 전, 대체 어느 시기에 이러한 동굴을 찾아 그 안에 유품을 남겨놓은 건지, 또한 왜 그래야만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크핫, 탐탁지 않은 모양이군.”
노인이 작게 코웃음쳤다.
“허나… 내 아비란 작자는 본래 그런 인간이었소. 말했잖소? 미치광이였다고.”
“…그렇군.”
이내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운남의 곤명에 정착하여 일가를 꾸리기 이전, 세간에 알려진 선우명의 별호는 ‘검치’였다.
천하의 이름 높은 도가문파들을 전전하고 기본 검공의 묘리들을 긁어모아 청강유엽검식을 창안해낸 검의 미치광이.
그가 정말로 광인이었다면.
일반적인 범주 내에선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게 당연하며, 어쩌면 그에게는 나름대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벽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그 존재는 세가를 이루는 혈족들 중에서도 오직 단 한 명, 장자이자 후계였던 선우각에게만 전해진 비밀인 모양이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러한 비밀은 더는 선우세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벽에게 전해졌다.
“언제까지 업고 있을 생각이오?”
그때 다시 노인이 말했다.
이내 이벽은 등에 업은 노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한 마디를 꺼냈다.
“…고맙소, 노인장.”
“크핫.”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소협.”
“…또 뭐요?”
“거듭 말하지만… 내 아버지는 검과 무공에 미친 자였소.”
“…….”
“그렇기 때문에… 유품이랍시고 남겨둔 게 정말로 터무니없는 무언가일 수도 있소. 어쩌면… 소협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지.”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말 그대로 노파심이었다.
허나 역시 아무 상관없는 노인이 자신에게 그러한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버지’라 할 만한 사람이 자신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노인은 아니었다.
“노인장, 본인 걱정이나 하시오. 그 몸으로 혼자서 집까지 돌아갈 수나 있겠소?”
“쉰 소리하지 마시오. 애송이가.”
푸핫, 선우각이 다시 웃었다.
이내 이벽은 돌아섰다. 저벅저벅, 저만치 절벽의 한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내 집에 다시 한번 들르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할 말이 조금 남아있으니.”
등 뒤에서 다시 노인이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이벽은 마지못해 답했다.
그리고 선천의 힘을 일으킨 뒤,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한쪽 발을 들어 절벽의 표면에 가져다 대었다.
콰악.
쾌보를 일으키자, 이내 발바닥이 절벽의 표면에 흡착되는 느낌이 일었다.
타아앙.
이벽은 그대로 몸을 밀어 올렸다.
* * *
타앙, 타앙.
이벽은 거듭 쾌보를 펼쳤다.
깎아 내지른 듯한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이리저리 활보하며, 동굴의 입구를 찾아 사방을 수색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일찍이 소림 인근의 절벽을 앞마당처럼 거닐던 취풍신개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어느덧 이벽이 목천의 기예를 다루는 실력은 그 정도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타앙, 타앙.
한편 이벽은 생각했다.
선우명과 이진천이 대체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검치라 불리던 이가 오직 단 한 명의 장자에게만 남겨준 비밀이라면… 필시 무공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성명절기인 창공비검, 혹은 더 나아가 ‘등천의 경지’에 해당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쿵, 쿵.
다시 가슴이 뛰었다.
타앙, 탕.
허나 그 상태로 한 시진 즈음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벽은 마침내 깨달았다.
절벽은 드넓고 황량했으며.
심지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처럼 막무가내식으로 헤매며 동굴의 입구를 찾아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몹시 막막한 일이었다.
또한 쾌보를 반복해서 펼치자 이내 육체와 내력의 뻐근함이 서서히 와닿기 시작했다.
탓.
이벽은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절벽의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조금 전, 선우각은 말했다.
이 절벽 어딘가에 동굴과 선우명의 유품이 있되, 스스로도 ‘찾아내지 못했노라’고 하였다.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선우각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끝끝내 동굴의 입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애당초.
검치 선우명은 후계인 선우각에게 동굴과 유품의 존재를 알려주되 그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한 기행에 의미가 있다면.
애초에 ‘찾아내는’ 단계에서부터 후계의 자격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타다닷.
다음 순간, 이벽은 다시 발을 박찼다. 더는 헤매지 않았으며, 일직선으로 절벽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이 각 정도가 지나자 이내 이벽의 눈앞에 절벽이 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앙.
이내 이벽은 정상에 이르렀다.
허나 그와 동시에 절벽을 박찼다.
휘릭.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를 회전한 이벽의 신형이 당연하게도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 순간.
우우웅.
이벽은 창공비검을 일으켰다.
허나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다.
창공비검이란, 선우세가의 모든 무공의 총아이며 검공임과 동시에 경신공이기도 하다.
둥실.
이내 이벽의 몸이 추락하는 속도가 급격히 감소했다. 몸과 발이 절벽에 부는 바람의 흐름을 탔다.
바람에 노니는 나뭇잎처럼.
이벽의 신형이 갈지(之)자로 절벽의 좌우를 크게 가로지르며 너풀너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대로.
좌우 양옆의 절벽을 구석구석 살피기에 아주 적절한 움직임과 속도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이벽은 주변을 살폈다.
그저 눈뿐만이 아닌, 목천의 영역 속에서 한껏 끌어올린 모든 감각들이 사방을 두루 살폈다.
물론 그럼에도 동굴은 쉬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허나 이벽은 인내심을 가지고 탐색을 이었다.
후우욱.
그리고 서서히 해가 저물 무렵, 이벽의 몸이 다시 절벽의 중턱 부근까지 추락했다.
그때였다.
저만치 절벽에 돋아난 나무와 잎들 사이로, 저무는 햇빛 한 줄기가 스며드는 것이 이벽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 삼켜졌다.
빛이 닿았음에도, 보이지 않는다.
“……!”
그것은 목천의 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위화감이었다. 허나.
훅.
그 순간, 이벽의 몸이 쏘아졌다.
스스스.
신형이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들자 마치 나뭇잎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일었다. 그리고.
“…….”
이벽은 발견했다.
나무 사이로 감춰진 절벽의 표면에, 시커먼 틈새가 마치 흉터처럼 벌어져 있었다.
허나 그것은.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작았으며, 고작해야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시에.
‘감각’이 속삭이고 있다.
‘…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
타앗.
이내 이벽은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