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87)
293화. 정도맹의 사자 (2)
“송영영. 그만.”
이벽이 입을 열었다.
“말이 심하군.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대강 알겠지만… 선을 넘지는 마라.”
“…대주.”
이내 송영영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고, 등불 속에서 고운 아미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애당초 너는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송영영이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지?”
“제멋대로 무림을 떴으면서… 왜 이상한 때에 다시 튀어나와서 우리 계획을 성가시게 만들어?”
“…….”
“대주, 너 ‘구 무림맹 소속’이야?”
다시, 그녀가 물었다.
움찔.
그 순간, 등불에 비친 이벽의 그림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것은 이벽으로서도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허나 그때, 이벽은 철면개와 혜공의 고요한 시선을 느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참견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이벽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임을 말이 아닌 눈빛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이내 이벽은 생각했다.
혜공에게서 깨달음을 전수받았고, 또한 사파에 암약하던 혈교에 이어 의혈맹의 마교를 몰아냄으로써 다시 한번 ‘영웅’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또한.
과거, 이벽은 전대 개방주 취풍신개에게서 적잖은 은과 가르침을 받았으며, 제자인 철면개와 ‘친하게 지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뭐, 그런 셈이다.”
이내 이벽이 답했다.
일찍이 독왕 당평세가 해주었던 충고처럼, 정파무림으로 돌아온 이벽은 마침내 스스로 ‘설 자리’를 정했다.
“…흥.”
송영영이 코웃음을 쳤다.
“하오문에 사패련, 이번에는 무림맹이라… 대주는 힘이 세니까 원하는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구나?”
“…….”
“무당에는 한 번도 안 왔으면서.”
흥, 송영영이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이벽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 고개를 훽 꺾어버렸다.
재차 혜공과 철면개를 향했다.
“이제 와서는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천존과 신개가 없는 구 무림맹은 이미 ‘전력 외’예요.”
“…….”
“말이 나온 김에 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애초에… 대주가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무존 할아버지에게 듣지 않았다면 나도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야.”
곤륜의 절대고수, 서천무존 정룡은 부탁한 대로 이벽의 뜻을 무당에 잘 전달해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정도맹주의 제자가 사자로서 찾아오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대주가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소림과 개방이 정도맹의 일부가 될 ‘기회’라도 생긴 거예요.”
“…….”
“이렇게까지 얘기를 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더 할 말은 없어요. 아니면… 혹시 그쪽도 이미 마교에 넘어갔어요?”
타앙, 후두둑.
그리고 그 순간.
조금 전, 이미 금이 갔었던 철면개의 찻잔이 마침내 산산조각이 난 채 탁자 위로 쏟아졌다.
“…송 소저.”
철면개가 말했다.
“왜 거지 아저씨?”
“지금 하신 말씀은… 소저께서 이 몸과 제자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크게 화를 냈을지도 모르오.”
“거지 아저씨. 마교의 씨앗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어. 의혈맹이 그렇게 되었다면, 개방이나 소림이라고 해서 완전히 깨끗할 거라 확신하지 마.”
허나 송영영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우우웅.
이내 허공에서 송영영과 철면개의 기세가 충돌했다. 초절정에 다다른 두 개의 기운이 경합하며 방 안의 공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큭.”
허나 채 두 호흡도 지나지 않아 철면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애당초 내력을 일으킬 만한 몸 상태가 아닌 탓이었다.
사락.
허나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나뭇잎이 일어났고, 마치 먹 묻은 종이를 물에 적시듯 양측의 기세를 모두 지워버렸다.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송영영, 선은 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왜 자꾸 나한테만 뭐라 그래?”
탕.
송영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뭇 신경질이 담긴 동작이었다.
“됐어. 필요 없어. 나 갈 거야.”
드륵.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대로 실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허나 문 앞에 섰을 때, 돌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되었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정파무림은 ‘하나의 도’ 안에서 빈틈없이 통일되어야만 해.”
“…….”
“의혈맹이건 당신네들이건, 더는 어정쩡한 공존은 없어. 그리고 그게 우리 장문인의 뜻이야.”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끼이익.
그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드륵, 그리고 방을 떠났다.
* * *
“…후우.”
송영영이 떠난 이후.
주지승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내 철면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가와의 싸움으로 인한 어수선함이 채 수습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정파무림은 ‘하나의 도’ 안에서 통일이 되어야만 하며, 그것이 곧 정도맹주의 뜻이라고 하였다.
말인즉슨.
결국은 의혈맹 뿐만이 아니라 구 무림맹 역시 정도맹의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지 않소?”
혜공이 웃으며 말했다.
신개와 천존이라는 두 절대자가 종적을 감춘 이래, 무림맹의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던 것은 비단 의혈맹만의 일은 아니었다.
아미의 일전에서는.
당가와 청성이 부딪혔었다.
“…….”
이벽 또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을 ‘하나의 도’에 복속시킨다는 발상이 과연 정말로 ‘정도’이기는 한 건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아니, 허나 그보다도.
당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황보세가에 쳐들어간다.”
어찌 되었건.
송영영이 저렇게까지 말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무당의 검존, 곤륜의 무존.
그리고 어쩌면…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정도맹 내의 나머지 은거고수들마저 움직이게 될지도 모른다.
“두 분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내 이벽이 물었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나는 시주를 믿고서 내 지난 세월을 모두 시주께 맡겼고, 이제는 정말로 아무 힘이 없는 늙은이일 뿐이오.”
그러자 혜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정도맹과의 관계가 어찌되건… 이 순간에는 시주의 판단을 따르도록 하겠소.”
“…….”
“선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끌끌!”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허나 이벽이 채 뭐라 답을 하기도 전 철면개가 먼저 말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가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들 중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게 아닌가?”
거지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퍽 인정하고 싶지는 않네만… 송 소저의 말에 딱히 틀린 점은 없었네. 우리는 힘이 없고, 힘이 없는 자는 이 무림에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지.”
탕.
그리고 이벽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니 이쯤 되었으면… 사실상 자네가 당금의 ‘무림맹주’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군.”
“……!”
그것은 물론.
한낱 농담에 불과했다.
의혈맹과 정도맹이 갈라져 나간 이래 무림맹은 해체되었고, 개방과 소림, 아미만이 남아 ‘구 무림맹’의 틀을 유지했을 뿐이다.
고로 맹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가맹과 동시에 맹주라니. 지나치게 파격적인 승진이 아니오?”
“사실상 짬처리라네.”
하핫, 세 사람은 마주 웃었다. 허나 어찌 되었건, 이벽은 두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나는 강하다.’
이벽은.
마침내 자신의 힘을 확인했다.
등천의 깨달음을 지나, 천하십대고수와도 능히 견줄 수 있는 검을 갖게 되었음을 이해했다.
그것은 어떠한 오만함도 섞여들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힘을 손에 넣기까지 많은 이들의 가르침을 거쳐왔고, 그중에는 물론 취풍신개와 혜공이 있었다.
힘에는 의무가 따른다.
고로 이벽은 다시 고민했다.
‘정도맹의 자신감’ 뒤에 무엇이 숨어있건,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이상 이쪽 역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음의 행보를 고려해야만 한다.
‘…씨를 말린다.’
송영영이 남긴 말을 되새겼다.
기실 남궁세가를 비롯해, 맹철극의 손에 죽어간 의혈맹의 무인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등 뒤에 마교가 도사리고 있으리란 사실 따윈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 모두를 살릴 수는 없었다.
또한 앞으로 상대하게 될 적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허나 이벽은 당려옥을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소녀 역시 소협이 살려 보내준 목숨이잖아요?
―그러니까 소협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협행의 결과가 언제나 옳을 수만은 없겠지만… 부디 낙심하지는 마세요.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해도.
목숨은 결코 가벼워선 안 된다.
“저 역시… 선사의 뜻과 마찬가지로 의혈맹 전원의 목을 벤다는 정도맹의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그 행보를 막기는 어렵겠지요. 무엇보다… ‘공공의 적’을 앞에 두고서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꼭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륵.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다시 한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는 않았겠지요.”
“…그렇소이까?”
“하지만… 그런 게 과연 의미가 있겠소, 대주? 송 소저는 이미 우리가 함께했던 그때와는 퍽 많이 달라져 버린 것 같더군.”
두 사람이 되물었다.
“…물론 괜찮습니다.”
이벽은 송영영을 생각했다.
그녀는 분명히 달라졌다. 하지만.
“이만 편히 쉬십시오.”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즉시 승방을 나섰다.
저녁을 지나 밤으로 향하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송영영은 이미 소림의 산문 바깥으로 떠나버린 듯했다.
타앗.
고로 이벽 또한 즉시 산문을 나섰다. 어두운 산길을 따라 아래를 향했다.
경신공을 펼치는 한편.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그리고 다행히도, 채 일각이 지나지도 않아 송영영의 그림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송영영.”
움찔.
송영영의 등이 흔들렸다.
휙, 그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왔어, 대주? 죽고 싶어?”
“…대주라.”
이벽은 쓰게 웃었다.
투명한 표정 너머로, 송영영은 여전히 벽을 세우고 있었다. 허나 묘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마치.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해 ‘억지로 세워놓은 벽’과 같았다.
“하나만 묻지. 송영영, 나는 네게 있어… 아직도 ‘대주’인 건가?”
“……!”
그리고 이벽은.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
그리고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이벽은 생각했다.
철면개와 마찬가지로,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이벽을 ‘대주’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물론, 더는 비룡대는 없으며.
당장에 처한 입장 또한 다르다.
허나 어느 한쪽이 팽개쳐버리지 않는 한, 쌓아온 관계는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벽은 과거의 그녀를 생각했다.
혈교의 강시와 처음 맞닥뜨렸었던 개방의 어느 지하 분타 아래에서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때.
그리고 납치된 언미희를 구하고자 남궁세가를 칠 무렵, 정검문주 양호명을 데리고서 기어코 다시 나타나 주었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의 그녀는.
분명 이벽의 ‘벗’이었다.
“…입에 익은 호칭일 뿐이야.”
이내 송영영이 답했다.
“그런가?”
이벽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린 산길은 퍽 눈에 익었다. 아직 소림이 위치한 소실봉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헌데 네가 소림을 떠난 지 반 시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못 왔나?”
“…….”
그녀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일각 안에 숭산 일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어렵지 않은 일일 터였다.
허나 그녀는 경신공을 펼치기는커녕, 그저 산보를 하듯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
그 순간.
이벽은 송영영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심을 읽기 어려운 그녀였으나, 어째서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헛소리.”
철컥.
송영영이 검을 잡았다.
“자꾸 헛소리하면 죽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