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8)
59화. 호남 정사비무 (2)
웅성웅성.
남궁환의 등장에 일제히 소란이 일었다.
이는 사파 측뿐만이 아니라 정파 측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두 번째 순서로 창천옥룡이 나서는 것은 역시 계획에는 없었던 이야기인 모양이다.
“…골 때리는 녀석이네요.”
공손수가 말했다.
“그만큼 자신이 넘친다는 건지, 하여튼 기재란 것들은 머리 싸매고 계획 짜는 사람들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아, 물론 오라버니한테 하는 말은 아니에요. 알죠?”
“…….”
“뭐, 일단은 지켜보죠. 저 나살문의 소저도 딱히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고.”
말마따나 음서희가 일단 비무대 위에 서 있는 이상 일행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
음서희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앞서 혈투를 펼쳤던 전강준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양손에 철조(鐵爪)를 장착했다.
그녀의 스승인 우진희의 경우 맨손으로 조법을 펼치지만, 경지가 일천한 그녀로서는 병기를 필요로 한다.
훅, 기세를 끌어올렸다.
“으음?”
줄곧 비무대 저편의 이벽을 향하고 있던 남궁환이 그제서야 음서희를 향했다.
남궁환이 피식 웃었다.
“이보시오, 소저.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물러서시지? 제아무리 사도라 할지언정 힘없는 여인을 핍박하고 싶지는 않군.”
“…힘없는 여인이라.”
음서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 역시 묘령에 불과했지만, 자신보다 두세 살이나 어려 보이는 소년에게 무시를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물론, 결국은 힘이 전부인 강호무림에 있어 나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타앗, 채앵!
“핫, 조잡하군.”
다음 순간, 음서희가 움직였다.
양손의 철조가 교차하며 남궁환을 찌르고 들어간다.
그러나 초식이 제대로 펼쳐지기도 전, 두 철조가 교차하는 지점을 검끝이 찌르고 들어왔다.
탕!
음서희가 검끝을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남궁환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펼치기도 전 초식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음서희는 아랑곳 않고 그 즉시 도로 땅을 박찼다.
다시 거리를 좁힌다.
양손의 철조가 성난 암늑대의 발톱처럼 번뜩였다.
채앵, 챙!
몇 번의 부딪힘이 이어졌다.
그러나 접전이 이어질수록 실력의 차이는 더더욱 분명해졌다.
남궁환은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음서희의 철조 사이사이에 검을 찔러넣는 것만으로 공격을 무력화한다.
음서희가 약한 것은 아니다.
일류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은, 천하의 어느 세력에 가도 충분히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전력이다.
평생을 갈고닦아도 이류를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할진대 묘령의 나이로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차고 넘치는 재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재능이란 것에도 격차가 있을 뿐이다.
압도적으로.
“하! 천박하기 짝이 없군, 그래! 짐승의 발톱이라니, 사도의 무에는 인간의 도리조차 없는 것인가?!”
“…….”
남궁환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음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길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저 남궁환의 검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비룡대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 역할이다.
채앵!
“흥! 상대하는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음서희의 신형이 다시 한번 밀려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타앙, 슈우욱!
손끝에서 철조가 발사되었다.
뻗어져 나간 철조에는 가느다란 철사가 연결되어 있었다. 남궁환의 얼굴을 향해 쏘아진다.
“큭?!”
그러한 변칙까지는 미처 예상치 못한 듯, 남궁환이 황급히 고개를 꺾었다.
스윽.
그러나 미세한 차이로 철조의 끄트머리가 남궁환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실선이 그어진다.
철컹, 그리고 곧바로 회수된 철조가 다시 음서희의 손끝에 맞물렸다.
“어머, 안타까워라.”
“…….”
“창천옥룡의 옥안에 티가 생겼군요. 죄송해서 어쩌죠? 하지만 도리도 없고 힘도 없는 여인에게도 손톱 정도는 있답니다.”
주륵.
뺨의 상처에서 피 한 방울이 흘렀다. 남궁환이 손등으로 피를 닦아냈다.
“…하, 기어이 선을 넘는군. 나는 분명 기회를 줬으니, 차후 내 검이 무자비하다 원망은 말라!”
* * *
이후 일방적인 승부가 이어졌다.
남궁환은 더 이상 음서희에게 물러설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반격에 임한다.
음서희가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도리어 그녀의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채앵!
“칼끝에 절제가 없고!”
채앵!
“고로, 도리 또한 없으며!”
채앵!
“도리가 없으니 승리 또한 없다!”
일검일검을 내지르며 남궁환은 호통을 내질렀다.
음서희의 갈라진 무복이 피로 젖어 들어간다. 온몸은 검상으로 걸레짝이 되었으나, 중상에 이르는 상처는 없다.
그러나 음서희는 깨달았다.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남궁환이 일부러 결정적인 부상을 입히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훈계가 끝나기 전까지는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 같았다.
피식, 음서희는 내심 웃었다.
약을 좀 올렸다고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검이 강할지라도 결국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남궁환의 검을 꽤 많이 뽑아낼 수 있었다.
‘부디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그러나 음서희는 슬슬 한계를 느꼈다. 마침내 힘이 빠진 음서희가 무릎을 꿇었다.
“—하여 단죄한다!”
뻐억!
그리고 그 즈음, 일장연설을 마무리하며 남궁환의 발이 음서희를 걷어찼다.
훅, 음서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퉁, 털썩!
비무대 바깥으로 튕겨 나간 음서희가 지면을 뒹굴었다. 격통으로 인해 허리가 저절로 휘어졌다.
걷어차인 오른팔은 아예 뼈가 나간 듯했다.
“하아.”
격통 속에서 음서희는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음서희는 의식을 놓았다.
“…두 번째 비무는 남궁 소협께서 승리했소.”
와아아!
이후 철면개의 승리 선언이 이어졌고, 정파 측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궁환의 압도적 승리는 앞선 승부의 찝찝함을 털어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적을 상대하고도 지친 기색조차 없이 비무대에 선 남궁환의 모습은 사도에 빠진 어리석은 계집을 가르침으로 계몽하여 정도로 이끄는 젊은 영웅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공손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남궁환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극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 알았어요. 얼굴이 잘생겼어도 하는 짓이 저러면 정이 뚝 떨어지는 법이네요.”
“케헤! 고럼! 얼굴 같은 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니까! 남자는 자고로 힘이야 힘! 무림인이 잘생겨서 어따 쓰냐고?!”
“뭐, 부정은 안 할게요. 다만 파 소협은 힘으로도 저 녀석을 못 이길 것 같지만…….”
“…케헤.”
파진성은 반박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에게도 보는 눈은 있다.
자신이 나설 경우 음서희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따지고 보면 파진성 역시 사파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지만, 정파의 오룡이라 일컬어지는 이들과는 그 정도의 격차가 있는 것이다.
“뭐, 할 수 없죠. 저쪽이 저렇게 나온 이상 우리도 순서를 바꿔서 이 다음은 언니가—”
“아니, 내가 나가지.”
그때 이벽이 나섰다.
“아뇨, 오라버니. 굳이 놈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는 없어요. 더구나 언니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잖아요?”
“…….”
물론 이벽도 알고 있었다.
점창의 일섬룡과도 붙어보았고, 언미희와도 붙어본바 결코 그녀가 밀릴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벽의 시선이 실신한 채 실려 나가는 음서희를 바라보았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전강준과 음서희에게는 분명 상처를 감안하고서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비룡대는 다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힘이 있다.
“오라버니, 이제와 묻기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일전에 얘기한 문제의 답은 얻으신 건가요?”
공손수가 물었다.
얼마 전, 무적파에서의 일전에서 정검문주 양호명은 이벽의 검로에서 선우세가의 색깔을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양호명 뿐 아니라 점창과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 측의 많은 인물들이 지켜보고 있다.
“당연히 오라버니가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오라버니가 저 녀석을 쓰러뜨린다 해도 저쪽에는 아직 일섬룡을 비롯해 싸울 녀석들이 세 명이나 더 남아있죠.”
“…….”
“그 정도로 반복해서 무공을 펼쳤다간, 결국은 양호명 이외에도 눈치채는 이들이 여럿 나올지도 몰라요.”
그것은 물론 이벽도 우려하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벽에게는 초연서의 무공이 있다.
바꿔서 말하자면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벽은 환호성 속에 우뚝 선 남궁환을 바라보았다.
쓰러뜨리고 싶다. 자신의 손으로.
“공자.”
그때, 언미희가 다가섰다.
“…부탁할게요, 공자. 저로서는 녀석을 어찌어찌 상대는 하겠지만 제대로 콧대를 무너뜨리긴 힘들 것 같네요.”
“…….”
“혼내주세요. 엉망진창으로요.”
언미희는 퍽 격앙된 모양이었다.
애써 침착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남궁환에 대해, 그리고 그에 환호하는 정파의 행태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이벽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다.
“…하아. 뭐, 두 분이서 그렇다면야 저도 더 이상 생각 안 할래요. 하기로 결심한 이상 화끈하게 저질러버리죠, 뭐.”
공손수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사이 비무대는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한 정파 측의 환호성 속에서 남궁환이 이벽을 찾아 큰 소리를 떵떵 치고 있다.
저벅.
이벽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흥! 그래도 곧바로 나오는 걸 보니 부끄러움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구나!”
“…….”
이벽은 굳이 응대하지 않았다.
이윽고 비무 개시가 선언되었고, 이벽은 검을 꺼내 들었다.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걸음을 좁힌다.
“사파제일이라,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데. 우선은 가볍게 시험이나 해볼까?”
그리고 남궁환의 손에서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연검법(大然劍法).
남궁세가의 뿌리에 해당하는 검이자, 조금 전 음서희를 철저하게 농락했던 검결이기도 했다.
차라락!
촘촘한 검결이 이벽의 전방위를 노리고 뻗어졌다. 그 안에는 감히 거스르기 어려운 우직함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빈틈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순간, 이벽의 검이 사라졌다.
그리고 구름 뒤에 가려진 달빛 한 줄기가 스미듯, 휘어짐 속에서 선 하나가 번뜩였다.
쿡, 탱그랑!
선이 남궁환의 손목을 찔렀다.
남궁환의 아귀에 힘이 풀렸다.
“…어?”
남궁환은 당황했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의 검이 비무대 위에 떨어져 있다.
“누가 누굴 시험한다는 거지?”
“…….”
“다시 주워라. 허락해주겠다.”
60. 호남 정사비무 (3)
“…….”
무거운 정적이 금강회의 비무대를 감쌌다.
정파 측도, 사파 측도.
양측을 합해 근 이백을 넘기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음에도 이 순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일검(一劍).
이벽의 검이 휘둘러진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그리고 창천옥룡 남궁환이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검수가 검을 떨어뜨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전이었다면 이미 목이 달아난 것과 진배없으며, 이 시점에서 패배가 선언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
그때, 남궁환이 입을 열었다.
“하하! 하하하! 크하하하하!”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런, 한 방 먹었군, 그래! 하하하!”
“…….”
“과연! 사도제일 후기지수란 이름은 허명이 아니로군! 이거 실례했네! 내 사과하지! 혹여 좀 전의 소저처럼 과하게 손을 쓸까 두려웠지만 쓸데없는 기우였던 모양이야!”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것은 마치 눈앞의 이벽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이들 모두를 의식한 듯한 과장된 목소리였다.
“하하! 암! 주워야지! 주워야 하고말고! 모처럼 서로에게 걸맞는 맞수를 만났는데 이런 ‘장난 같은 실수’로 승부가 끝나서야 아까운 일이 아니겠나?!”
남궁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성큼성큼 비무대 위를 걸었다.
떨어진 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벽을 마주한 채 다시 중단세를 취했다.
“하하! 자, 이번에는 제대로 가겠네! 그대 역시 꽤 실력이 있지만 그래도 주의해야 할 걸세!”
이벽은 남궁환을 바라보았다.
짐짓 호탕한 척 떵떵거리고 있으나, 시뻘게진 두 눈을 숨길 수는 없다.
분노, 그리고 수치심.
아마도 그러한 감정에는 익숙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검을 통해 다시 이벽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타앗!
“자, 가겠네! 어디 한 번 대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받아보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남궁환이 땅을 박찼다.
“일 초식, 응취섬(鷹取閃)!”
매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드넓은 창공을 향해 활강하듯 사선으로 쏘아진 검이 이벽에게로 짓쳐 들었다.
채앵!
“하핫, 이제 시작일세! 이 초식, 응조탈명(鷹爪奪命)!”
“…….”
과연, 명문의 검이다.
이벽은 이어지는 창궁무애검법을 막아내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강호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가들 중에서도 천하제일검가의 수식어를 지닌 남궁세가는 과거 선우세가에게 있어 하나의 도달점이었다.
그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검이다.
하지만. 그러나.
챙, 채앵!
이어지는 초식들을 거듭 막아내며, 이벽은 지금 현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단숨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철저하게 꺾어야 한다.
언미희는 이벽에게 남궁환의 콧대를 꺾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
이벽은 스스로 분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고민해보았다.
남궁환은 음서희를 쓰러뜨렸다.
물론 그녀를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음서희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그녀는 무인으로서 싸웠고 패배했다. 그뿐이다.
오히려 실력차를 명백히 느끼고도 물러서지 않았으니 남궁환의 검에 목숨을 잃었어도 할 말이 없다.
다만.
[—하여 단죄한다!]남궁환은 단죄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대체 무엇이 죄인가?
힘이 있다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럴 리 없다. 힘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며, 강한 것과 옳은 것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정(正)이라 함은 힘의 경중이나 사용하는 무공 따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마음의 문제였다.
정(正)이란 스스로 떳떳한 것이다.
그렇기에 매사에 있어 나 자신의 옳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정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자는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정이라 규정하고, 상대에게 죄를 물었다.
정파.
이벽은 아직까지도 스스로가 정에 속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해 함부로 들먹여진 정은 이벽을 분노케 했다.
“육 초식, 천하—!”
“지도 비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초식 이름은 왜 자꾸 가르쳐주나?”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이벽의 검이 달을 그렸다.
남궁환의 검끝이 흔들렸다.
그 순간, 비무를 지켜보는 모두의 눈에는 마치 매 한 마리가 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환영이 스쳤다.
“크윽!”
남궁환이 대경했다.
다음 순간 달이 사라졌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이벽의 검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구름 뒤에 숨은 달빛 한 줄기가 남궁환의 손목을 향한다.
쐐액!
“하! 이 몸이 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할 줄 아는가!!”
빠득, 남궁환이 이를 갈았다.
남궁환의 검이 급격하게 방향을 꺾었다.
타앗.
호수 위를 낮게 날 듯 바닥 위로 깊이 내려간 검이 뒤로 물러서며 가까스로 추적을 벗어난다.
과연 기재는 기재인가.
삭월의 초식에 대해 내심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차창!
그리고 다시 남궁환의 검이 내뻗어졌다. 더 이상 초식 이름을 외치지는 않는다.
마침내 조급함이 깃들었다.
진짜 실력을 털어내도 전혀 제압이 되지 않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성난 듯이 몰아치는 매의 발톱과 부리 속에서 이벽은 마음껏 팔절구궁필법을 펼쳤다.
만월과 삭월.
끌어당기고, 찔러 들어가는 것이 반복된다. 실전으로밖에 배울 수 없는 감각들을 흡수한다.
“크윽, 크아악!!”
반면 남궁환은 미칠 노릇이었다.
이따위 검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마치 자신과 상대 사이의 검이 부딪히는 공간을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하는 것만 같다.
“흥! 사이하기 짝이 없구나!! 사파제일이건 뭐건 결국 가진 재주는 그딴 것뿐인가!!”
남궁환은 호통을 쳤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음서희에게 늘어놓았던 것과는 의미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자꾸만 위축되려는 마음을 애써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벽은 그러한 마음을 읽어내었다.
남궁환의 검은 어느새 이벽을 밀쳐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거리를 확보하여 무언가 큰 초식을 시도할 생각인가.
“…….”
이벽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물론 의도된 동작이었다. 그러나 남궁환에겐 이미 그런 걸 읽어낼 여유 따윈 없었다.
타앗, 쐐애애액!
“받아봐라! 창천만개(蒼天滿開)!”
그 즉시 남궁환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벽을 향해 쏘아지는 검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내 새의 깃털 같은 무수한 검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이벽에게로 쏘아졌다. 그러나.
“…….”
이벽이 보기에는 오히려 남궁환의 실책이었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이벽은 다시 원을 그렸다.
떨어지는 깃털들이 일제히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펼쳐졌던 그림자들이 빠르게 하나로 모여든다.
“큭!?”
결국 남궁환의 검이 이벽의 지척까지 도달할 즈음에는 다시 한 자루만이 남아버렸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쿡, 탱그랑!
“…….”
그리고 섬광이 쏘아졌다.
착지한 남궁환이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검은 없었다. 남궁환의 검은 다시 한번 비무대 위를 구르고 있다.
“한 번 더 주울 텐가?”
“크—”
남궁환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으아아악!! 이 무도한 놈이!!!”
뭉개진 자존심이 마침내 겉으로 새어 나왔다. 덥석, 검을 주워든 남궁환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온 힘을 짜내는 것이다.
“크윽, 으으윽!!”
우웅.
검신 위로 내력이 중첩된다.
단전에 남은 마지막 한 줄기 내력까지 끌어내어 검 안에 불어넣고, 또 불어넣는다.
터질 것 같이 뭉쳐진 검 끝의 내력이 이내 하나의 검로를 밟기 시작했다.
후우웅.
“하! 어디 한 번 이것도 받아 보거라!! 네까짓 사도 나부랭이에겐 과분한 검이지만 말이다!!”
남궁환의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크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거암조차 쪼개버릴 듯한 무거움이 자리하고 있다.
이벽은 직감했다.
대연검법도, 창궁무애검법도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말로만 들어보았던 남궁세가 직계 비전의 제왕검형(帝王劍形).
“…….”
그러나 어딘가가 어설펐다.
완성된 검식이라기보단 흉내에 가깝다. 애초에 일류의 수준에서 익힐 수 있는 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왕은 흔들리지 않는다. 팔절구궁필법으로는 이 검이 지닌 무게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초연서라면 모를까, 지금의 이벽이 지닌 팔절구궁필법의 수준으로는 역부족일 테다.
탓, 이벽은 일 보 물러섰다.
후우웅!
“허억, 결국, 헉, 도망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느냐!! 흡, 사파제일이란 이름이, 허억, 부끄럽지 않은가!!”
남궁환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리숙한 도발이었다. 검 안에 모든 내력을 불어넣었기에 물러서는 이벽을 추적할 힘조차 모자란 것이다.
이벽으로서는 이대로 작정하고 피하기만 해도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콧대를 뭉개달라고 부탁받았다.
훅.
만월무변심공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벽의 몸 안으로 가장 익숙한 내력의 흐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청강유엽공이었다.
탓.
이벽은 땅을 박찼다.
마주 달려 나가며 납검했다.
그리고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헉, 그래, 그래야지!! 허억!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헉, 이 창천옥룡이 네 놈의 패기 하나만큼은, 허억, 인정하겠다!!”
“…헉헉대면서 말이 많군.”
이벽은 다시 검을 뽑았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삼식(拔劍第三式).
강검(强劍).
카앙—!!
강과 강이 부딪혔다.
강호무림의 무수한 검들 중에서도 가히 제일의 무거움을 지녔다 알려진 검과 부딪혔다. 이벽은 어깨에 뻐근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으극.”
“…….”
“으극, 으그그그극!”
맞부딪힌 검이 바르르 흔들렸다.
이벽의 검이 아니다. 남궁환의 검이 경련하면서 덩달아 함께 떨리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하는 듯, 이를 악문 남궁환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앞서 팔절구궁필법에 두 번이나 가격당한 충격이 손목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득!
“끄아아아!”
순간, 남궁환의 손목이 꺾였다.
휘리릭, 태앵!
손에서 빠져나간 검이 또다시 저만치로 날아가 버렸다. 이벽의 검 끝이 남궁환의 미간을 겨누었다.
“한 번 더 주울 텐가?”
“크아아아악!! 개애새애끼야아!!!”
“이젠 힘든가 보군. 쉬어라.”
빠악!
이벽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남궁환의 옆을 스쳐지나며, 이벽의 검 손잡이가 남궁환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컥, 끄륵!”
남궁환의 눈이 돌아갔다.
대번에 신형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