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65)
67화. 낙검신룡 (3)
보그르르.
“…….”
물거품이 일어났다.
이벽은 상황을 파악했다.
발을 헛디뎠고 동정호에 빠졌다.
당연하게도 온몸은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몸과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푸핫.”
이벽은 헛웃음을 흘렸다.
꼴이 제법 우습게 되었군.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으며 이벽은 멍하니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물 밖으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애초에 그리 위험한 수심조차 아니다.
그러나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이 홀가분함의 정체를 깨닫는다.
물에 빠지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앞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이벽은 화정촌의 낙룡폭포에 뛰어들었고, 왕수련과 이진천에 의해 가까스로 구해졌다.
그날, 이벽은 다시 태어났다.
관계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깨달았고, 마음에 박힌 돌을 치워냈다. 낙검진천신공과 더불어 선천의 힘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
이벽은 화정촌을 생각했다.
제갈소미와 혁대웅을 생각했다. 왕수련을 생각했고, 장석두를 생각했다. 문주이자 은인인 이진천을 생각했다.
이대로 물 밖을 뛰쳐나가면 그곳은 화정촌이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고로 돌아가야 할 곳은 명백하다.
여태까지의 모든 여정은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으며, 다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이벽은 무림의 생리 속에 얽혀들었고, 섣불리 돌아갈 수 없는 다른 이유들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벽은 비룡대를 생각했다.
언미희와 공손수, 그리고 파진성.
이 시점에서 자신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라져버리면, 그들 각자의 입장은 퍽 곤란해질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벽은 패왕가와 한데로 엮이게 되었고, 호남의 사파를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었다.
기대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낙검신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어리석었다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행동에 앞서 그 의미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스스로 늘려버리고 말았다.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술을 마셔도 떨쳐낼 수 없다.
—막내야. 뭐가 그리 급했느냐?
허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이벽은 화정촌을 떠나기 전 그에게 ‘심부름’을 맡기던 이진천의 눈빛을 생각했다.
산적을 베었던 때를 생각했고.
마을 소녀의 눈빛을 생각했다.
고 노야와 초연서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겪었던 것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것은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다.
그리고 이벽은 깨달았다.
‘찾아야 하는 것은…, ‘결말’이다.‘
마을을 떠나 관계를 맺고, 사람을 베고, 명성을 얻었다. 원했건 원치 않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러한 자신의 행보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심부름의 결말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 결말이란 무엇일까?
지금으로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인지, 어딜 가야 얻을 수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마음을 졸인들 소용은 없다.
천천히 생각해야 할 문제일 테다.
보그르르.
그리고 그즈음, 이벽은 호흡이 서서히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반대로 머리는 퍽 개운해졌다. 생각이 정리된 이벽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다.
풍덩—!
그러나 그때, 인영 하나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물살을 헤치며 이벽에게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 유려한 모습은 마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동정호의 선녀를 연상케 했다.
‘…수련?’
이벽은 일순 왕수련을 떠올렸다.
허나 물론 그럴 리는 없다. 화정촌은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고 이곳은 낙룡폭포가 아니다.
푸확—!!
다가온 인영이 이벽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 즉시 수면 밖으로 뛰쳐 올랐다.
이내 선착장의 뭍으로 올라섰다.
짝! 짜악, 짝!
“고, 공자! 정신차려요!”
언미희였다.
땅 위에 이벽을 눕힌 언미희는 이벽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사정없이 뺨을 두드렸다.
짝, 짜악, 짜악!
“그, 그만…….”
오히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러나 언미희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벽의 몸을 마구 뒤흔들며 뺨 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그래, 호, 호흡을……!”
다음 순간, 언미희의 입술이 이벽의 얼굴 위로 훅 들이 밀어졌다. 이벽은 황급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빠악!
이마와 이마가 부딪혔다.
“아얏?!”
“…멀쩡하니 진정하시오.”
* * *
“…이상입니다.”
광서, 흑천방.
아랫선에서 올라온 보고를 마친 흑운대(黑雲隊)의 대장 마령기는 연공실의 문 앞에 부복했다.
“…….”
문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돌아오지 않는다. 꿀꺽, 마령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거운 침묵이 길어진다.
불길 속의 강철처럼 단련된 절정고수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무리는 아니었다.
흑천방 내에서도 이 연공실의 문 너머에 머무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흑천방의 주인뿐이기 때문.
그리고 지금 자신이 올린 보고는 빈말로라도 결코 유쾌한 내용이라 할 수는 없었다.
“…….”
흑천뇌왕(黑天雷王) 맹철극.
절정의 경지마저 넘어선 초인.
천하십대고수인 패왕가의 철탑패왕 혁군악이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사파의 지존이 되었을 몸이었다.
허나 뿐만이 아니다.
약 이 년 전, 방주 맹철극은 불현듯 폐관수련에 들었다. 그리고 이렇듯 연공실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 근방에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스산한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
피 냄새, 혹은…….
절정고수인 마령기의 기감으로도 이 문 너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두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두려움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라는 점이다.
“큭!”
그때였다.
“크크, 큭, 크하하! 우하하핫!”
비틀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쿵!
마령기는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물론 닫힌 문 너머로 자신의 모습이 주인에게 보일 리는 없다. 허나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비룡대주에 낙검신룡이라, 혁군악 이 친구 아주 재밌어? 응?”
“…소, 송구합니다!”
“응? 송구하긴 뭐가? 흑운대장이 송구할 게 뭐가 있나? 대장이 수고가 많아. 이만 물러가도록.”
“조, 존명!”
일순 작은 위화감이 스쳤다.
그러나 마령기는 곧 잊어버렸다. 다행히도 문 너머의 목소리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음에 내심 안도했다.
슈슉.
마령기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크큭, 크하하핫!”
그러고도 한동안 연공실 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훅, 핏빛과 같은 냄새가 맴돌았다.
문 안에는 반라의 사내가 있었다.
희끗희끗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물론 흑천방주 맹철극이었다.
허나 침상에 걸터앉은 그의 몸은 노년에 접어든 이의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고 탄탄했다.
“으, 으으…….”
그때, 작은 신음이 침상 한켠에서 새어 나왔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반라의 여인이 눕혀져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었으나, 붉게 충혈된 여인의 눈빛에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작은 동물처럼 두려움에 젖어있다.
“크크, 맹우강을 쓰러뜨리고 정파 오룡 중 두 마리를 꺾었다라?”
흐음, 사내가 수염을 어루만졌다.
“하기사 놈이 정말로 녹괴천웅을 죽였다면야 그깟 애새끼들로 뭘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겠지.”
애당초 맹우강은 그저 혁군악의 손에 남은 패를 확인하기 위해 찔러본 미끼였을 뿐이다. 헌데.
“크하하! 한심하구나, 혁군악!”
패왕가를 무너뜨렸다.
놈의 외아들을 죽게 만들고, 놈의 식솔들을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 헌데 무언가가 잘못되어 놈이 살아남고 말았다.
헐레벌떡 달아난 놈은 사패련에 틀어박혔고, 그렇게 지금의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역시 놈에게 남은 마지막 수는 하오문 뿐이었군.”
오히려 나쁘지 않다.
하오문의 수호대. 그 지긋지긋한 버러지들이 어디서 새끼 용을 주워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놀랍지만, 그뿐이다.
분명 그것은 몇 년만 더 품고 있었다면 정말로 귀찮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헌데 아직 다 크지도 못한 것을 ‘보호자’조차 없이 부랴부랴 밖으로 내보냈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크크, 이제 끝낼 때가 되었지.”
먼저 목을 내민 쪽이 잘린다.
그리고 그것은 놈이 될 것이다.
“궁금하구만. 어디, 친아들에 이어 양아들까지 같은 꼴을 당해도 계속 고구마밭에 틀어박혀 있을지 두고 보자고.”
고작 혁군악 따위에게 대계를 틀어박혀 사파무림에 갇힌 채 삼 년씩이나 허비하고 말았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사내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훅, 사내의 고개가 움직였다.
먹이를 탐하는 포식자의 시선이 침상 위를 향한 순간 움찔, 여인이 동요하며 몸을 떨었다.
허나 그뿐이다.
슥, 사내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훅, 덥석.
“컥……!”
다음 순간, 사내의 섬전 같은 손이 여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여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컥, 크흑!”
“쩝, 먹기에는 아직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즐길 만큼 즐겼으니 되었다. 가거라.”
화륵.
다음 순간, 여인의 목을 쥔 사내의 손에서 핏빛 기운이 솟구쳤다.
“끅, 아아악……!”
여인이 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는다.
꿀럭꿀럭, 이내 무언가가 여인에게서 사내에게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하여 여인은 급속도로 초췌해졌다. 꽃 같던 용모는 온데간데없이, 이내 목내이처럼 비쩍 말라버렸다.
툭.
사내는 시신을 바닥에 던졌다.
푸스스.
이내 여인이었던 것은 형체를 잃고 한 줌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스산하고 퀘퀘한 냄새가 연공실 주변을 감돌았다.
* * *
다그닥, 다그닥.
말 네 마리가 새벽길을 달린다.
호남을 뜨는 비룡대 일행이었다.
호남 사파의 후기지수들과 함께 배 위에서 술을 마신 그날 밤 새벽, 일행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금강회를 나섰다.
“으으, 정신나갈 것 같아…….”
공손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채 저물지 않은 새벽 달빛에 비친 얼굴은 유난히도 하얗다. 아니,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케헤헤! 한심하구만! 무인이 숙취라니, 우리 해남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말머리를 나란히 한 파진성이 방정맞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젠장맞을, 오라버니 술이 그렇게 세다곤 말 안 했잖아요!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케헤헤! 에헤헤헤! 으헤헤!”
“파진성… 죽일 테다. 으으,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야지. 꼭 그렇게 해야지…….”
“아하하… 괜찮아요, 소저? 물 마실래요?”
일행들은 도란도란 말을 나눈다.
“…….”
이벽은 머쓱함을 느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다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때문에 일행들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신경을 쓰게 하고 말았군.’
그렇다고 한들 ‘이제는 괜찮다’라고 대놓고 말을 꺼내기에도 조금 어색했다.
다그닥 다그닥.
그저 바쁘게 말을 달린다.
행여 붙을지도 모를 추적을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기에, 이른 새벽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금강회를 뜬 것이다.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그런데 말야. 호남 바로 옆 강서성이면 너희 암영각의 앞마당이잖아? 왜 굳이 광동으로 힘들게 돌아가는 거야?”
그때 파진성이 다시 말했다.
말마따나 현재 일행이 향하고 있는 것은 광동이었다.
광동을 지나 복건과 절강의 사파무림을 섭렵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하아.”
공손수가 작게 한숨 쉬었다.
“설명하려면 길어요. 다만 대충 말하자면… 암영각이 꼭 우리 편은 아니거든요.”
“잉? 그게 무슨?”
“파 소협, 파 소협이 여기 있다고 해서 해남검파가 우리 편인 것은 아니잖아요? 이해력이 딸려요?”
“…아, 뭐. 그런 거라면 대강—”
“우웁!”
그때 공손수가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나?”
“아, 안 돼요!”
보다못해 이벽이 말을 꺼낸 그 순간, 공손수가 완강하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쪽 보지 마요! 안 돼, 나의 청순하고 귀여운 환상을 깨버릴 수는, 우웁, 커헉!”
결국 어느 풀숲 속에서 일행은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토닥토닥, 따라나선 언미희가 공손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일행은 다시 말을 나섰다.
“하아… 죽겠네요, 진짜. 움직일 때마다 추적을 신경 쓰는 것도 신물이 나고… 그래도 일단 광동 땅에 들어서면 그때는 한숨 돌릴 수 있겠죠?”
더욱 창백해진 공손수가 말했다.
언미희를 향해 힘없이 웃는다.
“아무쪼록… 언니만 믿을게요.”
“…에? 뭐가요?”
“아니 그야… 광동은 하오문 본단이잖아요? 언니나 공자가 있으니 여차하면 힘을 빌려서—”
“아.”
잠깐의 침묵이 스쳤다.
“그, 그러네요… 본단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요. 어떻게든 되겠죠?”
“…….”
대화가 잠시 끊겼다.
이후로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한편, 일행들은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그닥.
어느 순간,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어느 틈엔가 길의 양쪽을 둘러싼 숲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멎어있었다.
“케헤. 어떤 쥐새끼들이야?”
“하아, 이래서야 해장도 못 하고 부랴부랴 밤중에 기어 나온 보람이 없네요, 정말.”
“…….”
둘러싸였다.
주의를 기울여 흔적을 지우고 이동했건만 그마저도 뒤를 따르는 자들의 예측 범위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쪽일까요? 그냥 산적? 아니면 원한을 품은 정파? 그것도 아니면…….”
부스럭.
그리고 마침내 양쪽에서 몇몇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