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66)
68화. 임무 실패 (1)
‘여덟, 아홉…, 아니, 열둘인가.’
이벽은 주변을 둘러싼 인영들의 기척을 헤아려보았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부스럭.
비단 사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위. 양옆으로 어지럽게 설킨 나뭇가지들 사이로 몇 개인가의 기척이 더 느껴지고 있다.
완벽히 둘러싸였다.
그리고…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이렇게 둘러싸이는 것을 얼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곧 적들의 수준을 방증하는 것이다.
저벅.
그때, 정면의 인영이 다가섰다.
훅, 말에서 뛰어내린 공손수가 횃불을 앞세웠다. 이내 불가에 상대의 얼굴이 비추었다.
그 냉막한 중년인의 얼굴은… 일행들 모두에게 있어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네, 역시 그쪽이겠지요.”
공손수가 푸념처럼 말했다.
맹상태.
앞서 흑천방 측 파견인원의 대표로 사패련에서도 본 적이 있으며, 호남에서의 정사간 협상 중에서도 얼굴을 보였었다.
“길 좀 비켜줬으면 좋겠소만.”
침묵 속에서 이벽이 나섰다.
그러고도 맹상태는 잠시 메마른 얼굴로 이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요, 비룡대주.”
“뭐가 말이오?”
“련의 명령이오. 즉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 련으로 귀환하시오.”
“…….”
탓, 타앗
언미희와 파진성이 말에서 내렸다. 조용히 다가와 이벽의 양쪽에 섰다.
“…호남에서 이미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게 하는군.”
그리고 이벽이 답했다.
“당신은 그저 흑천방의 일개 무인일 뿐이지 않소? 호남에서도 그렇고, 왜 자꾸 나한테 명령을 하려 드는 거지?”
“비룡대는 사패련의 무력대이고, 내게는 련의 공문이 내려왔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 공문은 누가 쓴 것이오?”
“…….”
“련에는 의지가 없지. 다만 련주님과 그 아랫사람들의 뜻이 있을 뿐이오. 그런데 련의 뜻이라는 건 대체 무엇이길래 련주님의 뜻보다 우선시되는 것이오?”
앞서 사패련주는 이벽에게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것은 곧 이벽의 권한이 되었다.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해도, 적어도 련 내에서는 그보다 우선하는 명령권자는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 길을 비키시오.”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면 부득이하게 무력을 쓰는 수밖에 없겠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사고가 있다 해도 나를 원망하진 마시오.”
“…….”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이벽은 상대를 가늠해보았다.
눈앞의 사내는 흑천방을 다스리는 맹가의 혈통이지만 이렇다 할 무명을 알린 적은 없으며 별호 또한 없는 모양이다.
실력에 대해 알려진 것도 없다.
이벽이 감각이 느끼기에도, 딱히 이기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집중을 기울이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기운은 뭐지?’
우수수, 살갗이 일어난다.
한켠으로는 친숙하기도 하다.
스윽.
이벽은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명백한 열세. 허나 다른 방법은 달리 없다. 부딪혀야 한다면 눈앞의 사내를 제일 먼저 제압하고, 일행들을 지킨다.
“…하아.”
덥석.
그때였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 속에서, 누군가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벽의 손을 붙들었다.
이벽이 시선을 돌렸다.
공손수가 힘없이 웃고 있었다.
“네, 알겠어요. 맹 대협, 그렇게 할게요! 무림 경험도 쌓을 만큼 쌓았고, 안 그래도 이만 집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 그게 무슨—”
“그렇게 해요~ ‘대주님’. 네?”
다음 순간 공손수의 표정이 변했다. 이벽은 그녀의 눈짓에서 무언가가 있음을 이해했다.
‘…무언가 생각이 있는가?’
이벽은 잠시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긴장한 와중에서도 언미희와 파진성 역시 애매한 얼굴을 했다.
“…….”
슥.
이벽은 검에서 손을 거두었다.
* * *
탓, 탓, 부스럭.
숲길을 헤치며 나아간다.
맹상태를 비롯한 흑천방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일행은 결국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말을 버리고 가던 길을 돌아섰다.
허나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지는 않는다. 맹상태는 일행들을 깊은 숲길로 인도했다.
그야 비룡대를 포위한 입장에서 이벽의 명성이 드높은 악양을 통하는 건 물론 부담스러울 테다.
하지만.
“…돌겠네, 진짜. 이봐 대주,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여차하다 슥삭 당하는 거 아니냐고?”
파진성이 다가와 속삭였다.
말마따나 상황은 좋지 않다.
딱히 제압을 당하거나 무기를 넘겨주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요구를 받았다면 응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은 잠자코 따르지.”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슥, 스슥.
미세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으나 숲속에는 미처 어둠이 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앞장선 맹상태를 제외한 흑천방의 무인들은 그 어둠 속 어딘가에 몸을 감추었다.
일행들과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따라오는 듯하다.
이쪽의 위치는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으나, 상대의 위치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제 와 싸우려고 한들 조금 전보다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물론, 도망치기에도 여의치 않다.
“쳇.”
파진성이 혀를 찼다.
허나 대화를 길게 나누는 것 역시 좋지 않다. 결국은 전부 노출되고 있을 것이다.
이벽은 일행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공손수는 횃불을 든 채 태연한 얼굴로 앞장서고 있다.
호오오오.
먼 곳에서 올빼미가 울었다.
“…….”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쪽을 살려 보내줄 생각 따윈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가능한 한 전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방심을 유도한 뒤 숲속으로 인도하여 처리한다.
‘…여차하면.’
공손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의 준비를 한다. 시선을 마주치자 언미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오오.
다시 올빼미가 울었다.
멈칫.
앞서 달리던 맹상태가 멈추었다.
“…이상하군.”
“뭐가 말이오? 순순히 따라주고 있잖소?”
휙, 맹상태가 뒤를 돌아섰다.
한 명 한 명, 비룡대 일행들을 뜯어본다. 이내 그 시선이 선두의 공손수에게로 스쳤다.
“그 횃불. 그래, 그거로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 네? 뭐, 뭐가요, 대협?”
움찔, 공손수가 물러선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미 동이 텄거늘 올빼미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울어댈 이유는 없지.”
“…….”
“그래, 아마 특수한 훈련을 거쳐야만 맡을 수 있는 향이겠지. 이렇게 된 이상—”
슈슈슉!
바로 그때였다.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덥석, 타앗!
그 순간, 이벽은 공손수를 안고 훌쩍 뒤로 물러섰다. 허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암기는 처음부터 그들을 노리지조차 않았다.
채앵, 챙!
번개같이 뽑아 든 맹상태의 검이 번뜩였다. 파직, 파지직, 번개와 같은 소리를 내며 암기들을 튕겨내었다.
털썩, 털썩.
“컥!”
“커윽!”
그러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다.
사방의 숲속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신음 소리들이 이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흑천방의 무인들이 의문의 무리에게 암습을 당해 쓰러지고 있다.
“…….”
상황이 급변한다.
일순 맹상태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이벽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타앗, 채앵!
이벽은 검을 뽑았다.
공손수를 등 뒤로 물러서게 하며 선천의 힘을 일으켰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삼식(回劍第三式).
유검(柔劍).
스윽, 채앵.
검과 검이 스치듯 부딪혔다.
파지직!
그리고 이벽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졌다. 충격이 이벽의 기혈을 타고 올랐다.
앞서 사패련에서 상대했던 맹우강과 같은 종류의 기공. 그러나… 마찬가지로 선천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스슥, 채애앵!
“미안하지만 상황이 바뀌었군, 그래. 인질이 필요하시겠지만 되어줄 생각은 없소.”
검과 검의 교착상태.
맹상태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초식을 받아내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이벽이 마저 검을 이어가려던 찰나였다.
훅, 털썩.
그때, 무언가가 이벽과 맹상태의 바로 옆에 떨어져 내렸다. 아니,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였다.
“이거 실례했소, 맹 대협.”
착지한 인영이 말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좀 전의 암기를 던진 장본인일 터이다.
그 체구는 퍽 작았다.
다만 그밖에는 복면을 포함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흑의를 뒤집어쓰고 있어 용모를 알 수는 없다.
“…그래, 그대들이 누군지는 대강 알겠군. 허나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본 방의 무인들을 해치고도 돌이킬 수 있을 거라—”
“아니, 어느 쪽이건 오늘 죽을 이는 아무도 없소. 그러니 부디 검을 거두어주시길 바라오.”
맹상태의 말을 끊으며 흑의인이 말을 이었다.
‘…말인즉슨 흑천방의 무인들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부스럭.
그리고 다음 순간, 수풀 속에서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머리까지 옷을 뒤집어쓴 흑의인들이 암기에 당한 흑천방의 무인들을 하나둘씩 들쳐메고 있다.
“…….”
맹상태의 눈빛이 붉어졌다.
“뭐, 부하들을 너무 질책하진 마시오. 천하의 흑천방이라 한들 암습으로 먹고사는 게 우리 암영각인데 이런 상황에서야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슥.
살기 어린 맹상태의 눈빛을 일견한 흑의인이 이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웃음?’
그 눈매에서 웃음을 보았다.
허나 시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벅저벅.
인영이 이벽을 지나쳤다.
“…뭐, 뭐야? 어떻게 해?”
“적…은 아닌 거죠?”
공손수의 양옆을 지키듯 무기를 꺼내든 파진성과 언미희가 애매한 목소리를 내었다.
흑의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확히 공손수를 마주하고 섰다.
“59호, 임무 보고는?”
그리고 잠시 정적이 일었다.
비룡대의 일행들을 한 바퀴 돌아본 공손수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실패입니다.”
“알겠다. 귀환하도록 하지.”
“…암영각이라. 현 상황을 내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그때, 다시 맹상태가 말했다.
“맹 대협,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디 지금은 물러서 주시오. 암영각은 ‘아직’ 당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훅.
다음 순간, 이벽과 대치 중이던 맹상태가 떨쳐내듯 검을 내뻗으며 물러섰다.
이벽은 굳이 뒤를 쫓지 않았다.
상대의 전의는 꺾였으나,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군. 말뜻은 잘 알겠소.”
“이해해주어 감사하오, 맹 대협.”
“…허나 오늘 일을 잊지는 않겠소. 부디 암영각이 현명한 선택을 내리길 바라도록 하지.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말이오.”
* * *
맹상태와 흑천방의 무인들을 남겨둔 채, 일행들은 숲을 벗어나 다시금 길로 들어섰다.
일단 위기는 넘겼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만.
“…상황이 딱히 나아진 것 같지는 않군.”
“아, 아하하, 그러게요. 그래도 최소한 적은 아니잖아요?”
이번에는 암영각의 무인들이 일행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그 머릿수는 흑천방의 배 이상이었다.
“헹, 모르는 일이지.”
파진성이 콧방귀를 뀌었다.
무엇보다 공손수는 당연하다는 듯 일행을 벗어나 암영각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저 앞에서 예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의인과 나란히 걷고 있다.
흘끗흘끗 이쪽을 돌아보지만, 그녀로서도 달리 어쩔 방법은 없는 듯했다.
“대주, 아까 저 쥐방울이 한 말 못 들었어? 암영각이라고 해서 꼭 아군은 아니라고 했다니깐?”
“…침착해라, 파진성. 다 듣고 있지 않나?”
“헹, 들으라고 해! 뭐 어쩔 건데? 흑천방이건 암영각이건, 이쪽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면 해남의 별이 가만있지 않는다 이거야!”
“…….”
공손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파진성은 묘하게 고양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공손수는 ‘이쪽’에 속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해 못 할 건 없다. 다만.
‘…어쩌면 상황은 조금 전보다 더 나빠진 것일 수도.’
뻐억!
그때였다.
우두머리의 흑의인이 난데없이 함께 걷던 공손수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비틀.
공손수의 신형이 흔들렸다.
“이, 이런 씨발! 무슨 짓—!”
“잠깐, 파진성! 침착해라!”
파진성이 검을 잡았다.
허나 도저히 중과부적이다.
이벽은 그 앞을 가로막았—
“아! 왜 때리냐고, 엄마!”
공손수가 앙칼지게 외쳤다.
“야, 이년아, 너 술 처먹었지? 술 냄새가 천 리 바깥에서 진동한다 이년아.”
“…어.”
철컹.
파진성이 반쯤 뽑힌 검을 황급히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