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ignore the joint again! RAW novel - Chapter 27
27. 끝이 아니다.
“방금 뭐라고···?”
당황한 듯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는 정문의 앞에서 태청궁주 자명이 차분히 찻잔을 들어 올린다.
“안 된다 했느니라.”
“사숙!”
정문의 외침에도 자명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 호르륵.
“어째서입니까!?”
자명의 눈이 가늘게 정문을 후벼판다.
“일수일퇴(一手一退)!”
자명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정문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정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일개 유생들의 입에서나 오를 말이 일수일퇴가 아닌가.
하나를 줬으면 하나를 물려야 한다는 원론적인 정치 개념을 자명이 들먹인 것이다.
“사숙! 바람 타고 파도 넘을 땐 돛을 올려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목을 내놓고 싸우는 정치판에서나 통하는 말이 아니더냐?”
!!
정문의 눈에 자신이 놓친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긴, 황궁이 아니다.
이들은 목숨을 서로 걸고 싸우는 정적도 아니란 말이 된다.
물론, 저쪽 편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정문의 곁에선 이들만큼은 그리 생각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를 얻었다면,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사문 내 정치의 기본이니라. 명심하거라.”
하.
정치를 가르치시네.
정문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간다.
황궁에서 실전 정치를 겪은 정문의 입장에선 지금 자명의 말이 어린아이가 읽는 소학에 나오는 고사로만 들릴 뿐이다.
‘하나를 얻었으니, 하나를 줘야 한다고? 상고시대 정치하시나!’
정문이 직접 겪은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란.
하나를 수월히 빼앗았을 때 남은 것을 마저 빼앗는 것.
하나를 내어주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뺏기고 마는 것이 정치란 것이다.
‘말코놈들이 알리는 없지만.’
“해서, 이번에는 네놈을 도와줄 수가 없느니라. 이번에 마저 우리의 뜻을 관철하거든 저들이 분명 다른 수를 꾸밀 것이 분명하다. 이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갈등을 표면화 시킬 명분이 될 것이야.”
“······.”
“조용히 넘어가거라. 다음 기회에는 꼭 너를 도와줄 것이니.”
사숙인 자명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정문이 더는 보챌 수가 없다.
하늘 같은 사숙과 사질의 관계가 아닌가.
여기서 더 떼를 쓰다간 애써 구축한 자명과의 동맹 관계마저 무너질지 모른다.
“예, 사숙. 사질이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흠, 아니다. 충분히 바랄 수 있는 부분이었느니라. 허나, 앞으로는 꼭 이 또한 생각도록 하거라.”
자명은 진심으로 정문에게 조언한다.
아눼눼눼.
정치를 다 알려주시고 가암사합니다!
정문의 표정이 슬쩍 무너질 뻔했으나 이내 바로 잡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의 위치와 항렬이란 게 있지 않은가.
정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태청궁을 빠져나왔다.
“좆됐네···. 큰소리쳐놨는데···”
잔뜩 신이나 짐을 싸러 가던 사제들의 모습이 정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 기대하라고!
자신 있게 외쳤던 대사가 떠오른다.
붉게 타오르는 정문의 얼굴.
“하.”
조천문을 향하는 정문의 어깨가 유난히 무겁다.
* * *
춘삼월이 오면, 공동산에는 형형색색 산을 채우는 꽃잎이 가득해 운치를 더하곤 한다.
형형색색의 색이 도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일까.
공동은 그런 춘삼월이면 제자들을 속가로 내보내 속가와 소통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곤 했다.
이는 연례행사로 공동에게는 제법 큰,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큰 외부활동이 되겠다.
대부분의 속가가 감숙안에만 있기에 크게 중원이나 강호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항주에 지부를 둔 상단에 파견 갈 수도 있는 것이 춘삼월의 속가행이었다.
2년간 내부적인 사정으로 외부활동이 중단되었었기에 올해 속가 방문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두두두두두.
조천문 바로 앞 중대에 있는 연무장으로 제자들이 모여든다.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속가행을 나서게 되는 명단이 나온 것이다.
태청궁주 자명이 연단에 올라서 제자들을 호명한다.
“일대제자 청익!”
“옙!”
“청익은 같은 항렬의 제자 셋을 동행해 천수(天水)로 향한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일대제자 금모!”
“옙!”
“금모는 난주(兰州)로 가거라. 너를 포함해 넷이면 족할 것이다.”
자명은 황성각에서 내려온 서찰을 토대로 차례, 차례 제자들을 호명해갔다.
호명의 방식은 단순했다.
그간 수련의 성과와 사문 내의 사무를 잘 처리한 제자들에게 동행할 이들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방식이었다.
‘혹시··· 마지막에 내 이름을 딱!’
정문이 어림도 없는 기대를 얼굴에 띄운다.
이런 속을 알 리도 없는 명화는 언제 대사형의 이름이 나오나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어느덧 자명의 눈이 서찰의 끝에 닿는다.
“마지막으로······”
제발.
제바알!
“일대제자 진사풍!”
하.
“사풍은 자신을 포함해 다섯의 인원으로 무위로 향하거라.”
모여든 일대제자들 중 가장 뒤에 조용히 몸을 기대있던 사풍이 앞으로 나선다.
“옙!”
조금은 풍기는 분위기가 변한 사풍이다.
예상과 같이.
속가행을 떠나는 제자들은 모두 사풍의 파벌에 속한 제자들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이들을 데려갈 권한이 있다곤 하나 그 역시 사풍의 파벌일 것이 분명했다.
“뭐에요! 사형! 방법이 다 있다면서요!”
“이럴 줄 알았습니다.”
“지, 짐을 풀어야 하나요?”
명화와 진명, 묵환이 차례로 정문에게 따져댄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 아직! 끝이 아니다! 기, 기다려 보거라!”
정문은 얼른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잽싸게 몸을 숨겼다.
이름이 호명된 다른 일대제자들이 잔뜩 신이나 서로 떠들어대는 풍경이 퍽 기분 나쁘다.
“이번엔 내가 제일 멀리 가는 건가? 하하하! 돌아올 때 다들 항주의 명물을 사 올 테니 기다리시게!”
일대제자 중 사풍과 어울려 다니는 자삼이라는 사제가 잔뜩 배를 내밀며 말했다.
그는 감숙을 벗어나 저 멀리 항주의 상단으로 속가행을 나가게 된 것이다.
이번 속가행에서 유일하게 감숙을 벗어나는 이가 자삼이었다.
“자삼 사형! 저! 저! 저를 꼭 데려가 주셔야 합니다!”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이보게 자삼이! 내 비록 사형이지만 늘 자네를 보며······”
호명된 제자들에게 저마다 잘 보이려 한마디씩을 건네는 사제들.
‘지랄들 한다···’
정문이 그들에게 다가선다.
“어···! 대사형을 뵙습니다!”
사풍과의 일전, 산화사괴에 대한 토벌 이후 다른 제자들이 정문을 조금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있다더니 사실인 것 같다.
특히나 지금 자삼과 함께한 이들은 모두 사풍의 파벌이기에 더욱 정문을 어려워한다.
대충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를 비워주는 둘.
자삼과 정문이 둘만의 대화를 나눈다.
“흠, 자삼 사제. 항주로 속가행을 간다지?”
“예, 사형. 제자가 깨달음이 더뎌 어른들께서 멀리 보내시나 봅니다.”
그저 겸양의 말일 수도 있으나, 왜인지 정문에게는 비릿하게 들려온다.
‘새꺄, 난 항주 가지롱.
넌 감숙에서 집이나 봐라. 에베벱베.’
정도?
이미 정문의 머릿속에선 자삼이 괴상한 표정과 손짓까지 곁들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젓는 정문.
“그래, 먼 길이 되겠군. 아주 험난할 테고.”
“글쎄요? 항주까지 거리는 멀어도 관도가 잘 닦여서···”
“아냐, 아냐. 얼마나 먼 길인데? 산적도 있고 사파인들도 있고! 아주 위험한 길일 테지.”
“······? 그런가요···?”
이해되지 않는 정문의 행동과 말에 자삼이 고개를 갸웃한다.
항주까지야 대도시를 거쳐 가며 관도만 타고 가도 되는 곳이 아닌가.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그다지 위험한 길은 아닌데 말이다.
거기에.
대사형이 자신을 걱정할 이유가 있을지 고민도 되는 자삼이다.
얼마 전 산화사괴와 관련된 일이 있었을 때 정문과 사풍이 힘을 합쳐 일을 해결했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각별한 화해가 있었던 걸로 보이진 않았기에 일시적 동맹이란 예상이 사문 내 정설이었다.
이번 속가행에 정문을 지지하거나 중립적인 태도의 제자들이 선정되지 않은 것만 봐도 여전히 둘이 대립 중인 것은 알 수 있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 자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자삼의 옆으로 정문이 스윽 달라붙는다.
어느새 정문의 팔이 자삼의 목을 감고는 볼마저 맞닿을 정도로 밀착하기 시작했다.
“우리 자삼이··· 형이랑 좀 긴밀해져 볼까?”
“왜, 왜 이러십니까! 형이라뇨! 나이는 제가 더···”
기겁하는 자삼.
마치 괴력난신이라도 본 듯 표정이 심오하다.
“아니··· 우리 자삼이가 그 위험한 길을 간다니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니? 너도 알다시피 ‘사’형이 조금 강하잖니? 지켜줄게! 응? 같이 가자! 속가행!”
정문의 눈에는 이미 광기가 어려있다.
자삼의 온몸이 직감적으로 피하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십쇼!”
두어 걸음 물러서 얼른 손을 뻗는 자삼.
그런 자삼에게 광기 어린 정문이 계속해 달려든다.
“히익!”
– 탁!
자신도 모르게 비봉수(飛鳳手)를 펼쳐 정문의 손을 뿌리친 자삼.
“어어어어? 어어어어어어!”
분명 가볍게 쳐냈을 뿐인데도 정문의 반응이 심각하다.
“무고오오오옹? 지켜주겠다는 사형에게 무고오오옹을 써어어?”
정문의 등 뒤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정문의 머리마저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에는 이미 시뻘건 기운이 가득하다.
“팔다리가 부러진 사제는 내가 지켜줘야겠지!”
“안 부러졌는데요!”
“곧 부러질 거야!”
마지막 말과 함께 정문이 땅을 박찬다.
양손을 얼굴 옆으로 올려 든 모습이 고양이와 같았다.
“히익!”
잔뜩 몸을 웅크리는 자삼.
눈마저 질끈 감아버렸다.
– 꾸에엑!
자삼이 천천히 눈을 뜬다.
다행히도 정문의 마수가 그에게 닿지는 않았다.
“냋갘닺햌결한드긐!”
정문의 태도에 불안함을 느낀 진명과 명화, 묵환이 몰래 따라붙은 덕이었다.
그들은 자삼을 향해 마수를 뻗으려는 정문을 공중에서 낚아채 눌러 놓고 있었다.
정문의 팔 아래로 집어넣은 묵환의 팔뚝에 핏줄이 잔뜩 섰다.
진명은 검갑으로 감히 ‘대사형’의 목을 누른다.
명화는 손을 뻗어 정문의 고개를 땅에다 눌려버렸다.
“뭘 봐요!? 자삼 사형! 얼른 도망쳐요!”
“이,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욕망에 잠식된, 복마(伏魔)에 실패한 공동의 도인이다. 반면교사로 삼아 정진하거라. 얼른 가거라!”
“사···형! 더는 못 버팁니다! 얼른 도망을!”
어버버하며 갈피를 못 잡던 자삼이 얼른 발을 움직인다.
부리나케 도망간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래도 문득 사형제의 따스함이 자삼의 등을 감싼다.
‘아, 오늘 저들에게 목숨을 빚졌구나.’
자삼은 진명과 명화, 묵환의 그 늠름하고도 패륜적인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어쩌면 패도의 공동이 한 글자를 잘못 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자삼은 애써 부정하기로 했다.
자삼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정문이 사제들을 겨우 떨쳐낸다.
“아 왜! 왜! 왜! 내가 다 해결한다니까!”
“적당히 하셔야죠! 이게 다 뭐에요!”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하시다니. 도리에 어긋납니다.”
“추, 추합니다!”
다 누굴 위한 건데 이것들이!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 이것들아!
정문의 속이 터져만 나간다.
“이번 속가행은 포기하시죠. 후일을 도모하심이··· 곧 검문···”
“포기하면! 하나를 내주면 모든 걸 줘야 하는 걸 왜 모르냐, 이 젊은 말코들아!”
저기, 당신이 젊은 말코 대장인데요…
라는 말이 명화의 목에 걸렸으나, 선은 지키고 보는 명화다.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정문이 진정할 수 있었다.
방법이 없지 않은가.
자신의 뒷배로 삼은 자명도, 제법 복안이 있어 보이는 스승도 이번 일에는 손을 떼는 것처럼 보인다.
고작 일대제자인 자신이 태상장로의 입김을 온전히 막아낼 방법은 없는 것이다.
하아.
정문의 속만 터져나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