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436)
내가 지금까지 마신의 챔피언이냐는 질문은 종종 받아도 마신이 점지한 용사라는 질문을 받지 않았던 것은, 그 두 개가 이음동의어라거나 내가 인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격이 다르기 때문이지.
이세계의 챔피언은 피조물이 섬길 신을 선택하는 거고, 용사는 신께서 피조물을 선택한 거라고 보면 된다.
물론 챔피언, 대전사들 역시 신의 부름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자진해서 신을 섬기고자 위업을 쌓은 끝에 신들께서 응하고 약간의 가호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딱히 뭘 하라고 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용사는 다르다. 지크프리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는 가호와 능력과 함께 신도를, 나아가 한 종족을 구원할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네란이 말한 내용은 더럽게 심각한 내용이었다.
“신께서 그걸 방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방치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는 게 파문당한 성직자의 의견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막지 못할 가능성은 0이 아니라더라.”
어째서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신들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
당장 나만 하더라도 세계수의 목소리 좀 들었다고 의식이 날아가버리지 않았는가?
신성을 직접적으로 행사한 게 아니라 대화하는 시늉만 했음에도 그 꼴이다. 그런데 직접 신이 모습을 드러내 힘을 행사한다? 마침 그런 역사가 아예 없는 게 아니라서 열심히 책을 읽어온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악신을 추종하고 파란을 일으켜 기어이 신을 모욕하려든 기념비적인 사교도를 천칭의 뤼비스카께서 직접 단죄하고자 펼친 단 한 번의 기적으로 인해 서부지대 아래의 대륙이 날아가며 바닷물이 들어찼다는 건 전설이 아니라 역사다.
너무 오래된 터라 많은 기록들이 소실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볼타베이가 해상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허무맹랑한 전설로 취급하는 이는 없다. 신들이 직접 개입할 경우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난다고 가정하면 세네란의 말대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미처 막지 못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너와 같이 가서 확인 좀 해 봐야겠다.”
“갑자기 이야기가 확 넘어갔는데요? 그래서라뇨? 어디에 제가 개입할 만한 내용이 있는 겁니까?”
세네란은 대답대신 멀뚱히 나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위아래로 부딪쳤다. 대체 뭔 짓인가 싶어 바라보니, 그녀는 팬터마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요리조리 주먹을 움직였다.
그 동작이 내가 검을 뽑아 사과를 쪼갰던 것을 묘사한 거라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네 고향 인근의 마신전, 마력과 신성을 지닌 인족. 이 모든 게 아무런 연관도 없을 가능성보다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마력을 쓰지 못했었는데요. 마신 숭배도 하지 않았고.”
전형적인 이티스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조차. 하지만 세네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더욱 중요한 거야. 특별한 재능엔 보통 이유가 없지만 거기에 신성이 엮이면 이유가 있거든. 신앙도 없는 이에게 그 힘이 깃들었다면 더더욱.”
그러니 확인해 볼 수밖에.
그리 말하며 커피를 홀짝이는 세네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
마신전이 있는 곳까지 비룡을 타고 날아갈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세네란이 인부들과 함께 한시적으로 대여한 말을 빌리기로 했다.
어차피 급하게 달리거나 전투를 치르게 될 일도 없을 터라 아실리에와 같은 말에 오른 나는 앞장서는 세네란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비룡에서처럼 편하게 내게 안겨 가려고 했던 라이카가 조금은 아쉬운 소리를 내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그렇게 낯선 경비병들에게 적당히 인사하며 오그웬을 벗어나, 익숙한 길을 따라 고향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기분이 아닌 뭔가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소 뿔의 이야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세네란의 가설을 듣고 나니 최종적으로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던 재난이 나 때문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환생에 관여한 존재가 에파가 님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게 지크프리트처럼 용사를 소환하려다가 뭐가 꼬인 것인지, 아니면 하필 그 순간 죽은 나를 불쌍하게 여겨 자비를 베푸신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덕에 내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건 변함없다.
만약 그 과정에서 마신전에 있었다는 성유물이 존재감을 드러낸 거라면? 그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왕군의 누군가가 신전의 위치를 특정하고 병력을 보낸 거라면?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사달은 내 전생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이었던 게 아닌가?
“엘디?”
잡생각에 너무 빠져 있었는지, 내 품에 안겨 앉아 있던 아실리에가 가볍게 내 손을 쥐고 나서야 세네란을 따라 움직이다말고 옆으로 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안.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네.”
멋쩍게 웃으며 방향을 다시 잡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아실리에의 시선은 여전했다. 잠깐 마주 보고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하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예리한 질문이었다. 상대가 세네란이었다면 시치미를 뗐겠지만 아실리에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실리에는 어중간하게 위로하거나 캐물어보는 대신 가볍게 등을 기댈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정적으로 흘러가던 생각에 제동이 걸리며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딱히 바뀐 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는 오그웬에서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결같이 삭막한 풍경이 나를 반겨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폐허로 남아 있는 고향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발길마저 끊겨 더 심해진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서 내가 느끼는 건 안도감과 편안함이었다. 마치 내가 품은 숙원을 향한 열망이 퇴색되지 않도록 과거를 지켜 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멋대로 마음이 놓인다.
굽이진 길을 지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폐허와 언덕은 그런 내 감성에…
“…저게 뭐야?”
…추가타를 날릴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어야 할 폐허 속에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올라오고 있었다.
“아, 젠장. 또 왔네.”
사고가 멈춰버린 나와 달리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투덜거리는 세네란을 보아하니 그리 우호적이진 않아도 그녀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나보다.
스물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은 뭔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기보단 그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치만 취한 것에 가까운 형태로 세 군데 정도 모닥불을 피운 채 불을 쬐고 있었다.
“…!”
거리가 좀 있었음에도 우리를 빠르게 발견한 그쪽에서 먼저 뭔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냥 적당히 세네란과 대화를 준비하려는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저마다 무기를 움켜 쥠으로써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혹시 친구입니까? 그럼 빨리 무기에서 손 떼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으으음, 친구라기보단 돈냄새를 맡았다고 착각하는 거렁뱅이들에 가깝지. 이번에 사람들 고용하면서 비밀엄수를 위해 돈을 좀 많이 썼거든.”
요약하자면 세네란이 나름 밀수 쪽에서는 크게 노는 손님인지라, 그녀가 쓴 입막음 비용만 보고 뭔가 큰 건수를 물었다고 여긴 이들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이건 일단 내 문제니까 내 선에서 해결할게.”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확신을 담아 말하는 세네란이었기에, 나는 바늘을 꺼내려던 동작을 멈춘 뒤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저도 고향에서 쓸데없이 피보고 싶진 않으니 빠르고 좋게 끝났으면 하네요.”
내 땅도 아니니 단순히 불 지피고 야영 좀 한 거로 지랄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너저분한 문제 때문에 실상 언제 도적으로 바뀔지 모를 녀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은 아실리에를 내려주고 라이카와 함께 뒤를 부탁한 다음 세네란과 함께 말을 몰아 다가가니 덥수룩한 수염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 덩어리 하나가 다른 이들보다 앞으로 나오며 목소리를 냈다.
“황금 아가씨! 이야기도 다 안 끝났는데 그렇게 가 버리면 어쩌나! 꼬리 따라오느라 얼마나 돈이 들었는지 알아?”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고 있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뻔했다. 세네란 역시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과 함께 소리쳤다.
“돈이 문제야? 땅굴 규율이 언제부터 이렇게 볏짚처럼 흐물거리게 된 거지? 난 분명 너희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에이, 그거야 우리의 유용함을 다 알려주기도 전에 아가씨가 움직였으니 그런 거지. 조금 더 이야기하면 생각이…”
“하아… 나 세네란이야. 황금의 마법사 세네란.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평소에 어벙한 태도만 보여줬던 세네란의 목소리에 그간 볼 수 없었던 독기가 서렸다. 하지만 위압감을 주기 힘든 생김새라서 그런지 그녀의 말은 상대방을 위축시키기보다 화를 돋구는 듯했다.
“내가 가치 없다고 판단했으면, 그게 뭐가 됐든 지금의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라고. 네가 한 달을 떠들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당장 네 부하들 데리고 꺼져. 장사 접고 싶지 않으면 규율대로 모두 잊어 버리고.”
“…아가씨,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막무가내로 따라왔으니 날 서 있는 건 이해하지만, 우리도 지금 그리 유쾌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라니까?”
털보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놈들이 무기를 고쳐쥐었다. 이에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싶어 세네란을 바라보니…
“꼬마야…”
피로에 찌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털보를 노려보며 입을 연 세네란이 깊은 한숨과 함께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가 땅굴 밖에서 마주치면 마음대로 털어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니?”
딱 봐도 마법을 쓰려는 것 같아 구경이나 할 겸 마력시를 사용한 내 눈에, 세네란이 흘러가듯 던진 말이 주문으로 작용하며 마법을 발현시키는 게 들어왔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말을 주문으로 쓴다는 사실에 무영창만큼이나 충격을 먹는 사이 순식간에 발동된 마법이 털보와 그의 일행을 덮치자 놈들은 이렇다할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허리까지 얼어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