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26
1026회. 스프가 식기 전에 갈게요
설마 하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는 기사단장에게 롤프 프릿츠 남작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가 자기 입으로 귀족이 되려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야인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고.”
“흥! 해보라고 해. 그래 봐야 제 놈 명줄만 단축시키는 꼴이지. 알았으니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 보게.”
기사단장은 갑자기 짜증이 나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할 말이 남았는지 우물쭈물하던 롤프 프릿츠 남작은 결국 묵례를 올린 뒤 조용히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기사단장 콜라시오 키퍼 자작은 그리폰 기사단에서 알바 누베스 산맥으로 작전 나갔던 기사들을 소집했다.
“경들을 따로 부른 것은 알려 줘야 할 내용이 있어서다. 영주님을 배신하고 베르나르도 후작가로 넘어간 ‘산의 부족’ 출신 야인이, 복수를 꾀하고 있다.”
기사단장의 말에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대륙의 위기라는 히르헤라 균열 주둔지에서 뜬금없이 ‘산의 부족’ 이야기가 나오니 황당한 것이다.
기사단장은 손을 들어 소요를 가라앉힌 뒤 계속해서 말했다.
“출세를 위해 영주님과 부족을 버린 야인이 복수라니, 다들 기막히고 역겨울 줄로 안다. 하지만 사실이다. 놈이 이곳 히르헤라 주둔지에 있다는 것을 롤프 프릿츠 남작이 알려 왔다.”
그러자 부단장 밴 리치터 자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놈이 벌써 베르나르도 후작 부대에 배치받았습니까?”
“배치받은 것뿐 아니라 그동안 공도 세웠다. ‘균열의 기사’ 엘리오가 우리 푸토코아를 배신한 야인이다.”
“…….”
한순간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균열의 기사’라는 칭호가 비록 베르나르도 후작가에서 만든것이라 해도, 내용물은 진짜였다.
엘리오는 빙벽 너머 마족의 땅 타메이온에서 사흘간이나 돌아다닐 수 있는 담력과 검술을 가진 자다.
‘히르헤라의 영웅’인 롤프 프릿츠 남작이 ‘광염의 히드라’ 목을 네 개나 잘라 버린 것처럼, 엘리오의 무력도 거짓 없는 진실인 것이다.
기사단장은 기사들의 염려를 알고 급히 말을 붙였다.
“알다시피 놈의 검술은 롤프 프릿츠 남작보다 위다. 어설프게 접근하면 도리어 당한다는 소리다. 그러니 주둔지에서 생활할 때 셋 이상 무리를 지어 다녀라. 소드 비기너 셋 이상이 모인 자리라면 놈을 도발해 죽여도 좋다. 놈이 아직 봉작을 받지 않았으니 소명 절차도 형식선에서 그칠 것이다. 야인 출신 기사의 죽음에 신경 쓸 만큼 히르헤라의 사정은 녹록지 않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서른 명의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기사단장이 ‘소드 비기너’들에게 떼거리로 싸우라고 주문했지만, 그 말에 어떤 기사도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잠시 후 기사단장이 기사들을 해산시키자 부단장인 밴 리치터 자작이 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단장님. 그러다 진짜 엘리오가 죽으면 베르나르도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소드 비기너 셋이면 엘리오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한 부단장은 벌써부터 그 이후를 염려했다.
“균열에서 마물이 나오는 판국에 일을 키울 수 있겠나? 나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라고 보는데.”
“그건 또 그렇군요.”
밴 리치터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왕국군에 기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에서 물고 늘어지려 해도 주둔군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이 허락하지 않으리라.
***
남작이라고 해서 모두가 봉토를 받는 건 아니다.
예컨대 그리폰 기사단의 경우 기사들 대부분이 남작이지만 봉토를 가진 자는 없었다.
‘소드 비기너’가 되면 기본적으로 신분의 혜택은 주지만, 봉토의 하사 여부는 그가 세운 공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어느 기사단이든 기사들은 항상 공적과 명성에 목말라 있을 수밖에 없다.
기사단장이 모임을 해산시킨 직후 기사인 토드 프리먼 남작은 켈리 렌, 듀크 윌리암스 남작과 파티를 구성했다.
셋 모두 그리폰 기사단에서 십강 안에 드는 실력자들이었다. 물론 기사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토드 프리먼 남작이 두 남작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것은 어떻소? 공적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명성은 날릴 게요. ‘균열의 기사’ 소리를 듣고 있으니.”
켈리 렌과 듀크 윌리암스 남작도 반대하지 않았다.
공적만큼이나 명성을 쌓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켈리 렌 남작은 한술 더 떠서 자신들의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엘리오와는 ‘산의 부족’ 일로 이미 원수지간이 됐소. 그에게 급습을 당할 바에야 먼저 치자는 데 동의하오.”
토드 프리먼 남작의 말에 반응하지 않던 듀크 윌리암스 남작이지만 켈리 렌 남작의 말에는 흔들렸다.
야인은 부족을 가족처럼 여기니 둘 중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날 일이었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나을 테니……. 나도 동의하오.”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엘리오를 노리기로 했다.
***
같은 시간 알파 중대.
균열 감시 임무 교대를 하루 앞두고 알파 중대에는 가벼운 긴장이 감돌았다.
최근 마수가 아니라 마물이 출현한 때문이다.
알파 중대장 데니스 로빈 남작은 쉬고 있는 중대원들을 임시로 만든 연병장으로 불러냈다.
다섯 명의 기사와 세 명의 백인장, 삽십 명의 십인장, 삼백 명의 병사가 중대장인 데니스 로빈 남작에게 주목했다.
중대원들 앞에 선 데니스 로빈 남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우리 중대가 다시 균열의 최전방에 투입된다. 쉬고 있는 제군들을 소집한 것은 최근 균열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틀 전 균열에서 ‘광염의 히드라’가 나왔다. 그래, 마수가 아니라 악명 높은 타메이온의 마물이다. 흑마법사들이 불러낸 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내일 우리가 균열 감시 중에도 마물이 나올 수 있다.”
알파 중대원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골리앗 중대에서 ‘히르헤라의 영웅’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마물에게 죽은 병사가 서른이 넘는다.
그건 마물이 하나만 나와도 그만큼 죽는다는 소리였다.
아직 하루가 남았는데 급속히 사기가 떨어졌다.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차던 데니스 로빈 남작이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아직도 얼얼하다.
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 소드 익스퍼트라니.
그래도 ‘대대(大隊)에 하나 있다’는 소드 익스퍼트가 중대에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잊었나! 우리 알파 중대에는 ‘균열의 기사’들이 있다! 저 마수와 마물 들로 가득한 타메이온에서 사흘이나 성공적으로 정찰을 한 그들이 우리 곁에 있는데, 뭐가 두려운가! 골리앗 중대에 서른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우리는 세 명도 많다! 그렇지 않소? 엘리오 경!”
늘 반말을 하던 데니스 로빈 중대장이 하오체를 썼다.
오스카 아비드 참모가 엘리오에게 정중히 대하라고 당부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잘했을 게다.
데니스 로빈 중대장은 정치 감각이 살아 있는 기사였으니까.
중대장이 갑자기 자신을 끌어들이자 엘리오는 반사적으로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알파 중대원들이 두 손을 치켜들고 ‘와아아!’ 소리 질렀다.
꺼져 가던 사기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데니스 로빈 중대장은 마물들의 출현에 대비한 대응 요령을 알려 주고 중대를 해산시켰다.
갑자기 돌변한 중대장의 태도에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할 때다.
어느새 다가온 데니스 로빈 중대장이 속삭이듯 한마디 했다.
“참모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소드 익스퍼트’시라고.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비밀로 하라고 하셨으니 남들 앞에서는 하오체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 점 양해해 주십시오.”
“그냥 평소처럼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승작이야 왕국법에 따르더라도, 검술의 경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옆에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데니스 로빈 중대장은 오스카 아비드 참모의 당부가 무색할 정도로 확실하게 숙이고 들어갔다.
***
알파 중대 기사 막사로 돌아가 쉬던 엘리오는 은은한 종소리에 간이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균열 감시 임무를 하루 앞두고는 시간이 너무 잘 갔다.
조금 전에 아침 식사를 한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이다.
엘리오는 조금 더 게으름 피우고 싶었지만 천막 입구에 모여 있는 케일과 기사들을 생각해 침대를 내려갔다.
그가 입구로 다가가자 파비안이 휘장을 열어 주었다.
과한 의전에 엘리오는 부담이 됐지만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심통과 만났다면 딱 저랬을 것 같았다.
부지런히 설원 위를 걷던 케일 일행이 멈칫했다.
맞은편에서 세 명의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딱 마주칠 것 같아서다.
아무리 설원이라 해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생긴다.
길 밖은 눈을 치우지 않아 자칫 허리까지 빠질 수도 있다.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한 준귀족인 케일 일행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마주 오던 세 명의 기사들은 조금도 폭을 좁히지 않고, 마치 시비라도 걸려는 것처럼 그냥 밀고 들어왔다.
자연히 리들리의 어깨가 그들 중 하나와 부딪쳤다.
상대의 어깨를 세게 들이박은 토드 프리먼이 도리어 버럭 소리쳤다.
“이봐!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건가!”
“죄송합니다.”
리들리는 황당했지만 상대의 기세가 너무 세서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토드 프리먼은 리들리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너희들! 소속이 어디야!”
순간 케일과 기사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가 평민으로 구성된 영지병이라면 모를까?
정복을 입은 기사들에게 하대는 경우에 어긋난 행동인 까닭이다.
연장자인 케일이 수습을 위해 급히 나섰다.
“저희는 알파 중대 기사들입니다. 실례지만 그쪽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토드 프리먼 남작이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기사들은 남작을 들이박아도 되나?”
“들이박은 게 아니라……. 길이 좁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저희가 한쪽으로 비켜 주었는데도 굳이 오셔서……. 윽!”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일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토드 프리먼 남작이 상대의 뺨을 후려갈긴 뒤 소리쳤다.
“기사라고 다 같은 귀족인 줄 아나! 너희가 길에서 완전히 비켜섰으면 부딪칠 일도 없었다! 기사들이 후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백작가의 남작들에게 덤비는 건가! 엉? 그런 거냐?”
토드 프리먼 남작의 말에 엘리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롤프 프릿츠 남작을 만난 지 하루 만에 이런 짓거리를 할 백작가라면 뻔하지 않은가.
“케일 경, 기사들을 데리고 먼저 가요. 눈치를 보니까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푸토코아의 귀족들 같은데,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케일은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
고위 귀족들의 시비에 얽히기에 기사들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검술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기사들이 머릿수를 믿고 하극상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나오면 피를 보는 건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엘리오는 ‘소드 익스퍼트’.
‘소드 비기너’ 열 명이 와도 그를 어쩌지 못할 터였다.
“가요 가.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괜히 복잡해질 수 있어요. 지금도 억지 쓰는 거 봐요.”
“예,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자리를 잡아 두고 있을 테니 늦지 않게 오십쇼.”
“스프가 식기 전에 갈게요.”
그러자 케일과 세 명의 기사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귀족들만 남자 엘리오가 천천히 어깨를 풀며 말했다.
“푸토코아 백작가 맞지? 코드란테스 백작가면 뼈만 부러뜨릴 거고, 푸토코아 백작가면……. 어떻게 하지? 해 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