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51
1151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손님 접대에 지쳐서 잠깐 쉬려고 발코니로 나갔어요. 그때 락토 에스쿠도가 따라 나와서는…….”
아나이스 아에토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힘들어 하는 그녀를 대신해 낸시 워커 남작이 말을 이어 갔다.
“락토가 엉덩이를 만졌다는 소문은……. 아나이스 영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말이에요. 그 미친놈은 아나이스 양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약탈하듯 아나이스의 속옷을 잡아 뜯었답니다.”
파비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얼마나 맛이 가야 성인식의 주인공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에토스 백작가는 약해요. 기사도, 영지병도 에스쿠도 백작가의 절반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리 공자는 락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요. 에스쿠도 백작가는 사과를 요구했고, 그걸 거부하자 아에토스 백작가를 공격한 거예요.”
“아니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사과를 요구해요?”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물론 강호에서도 사파 고수들이 그런 뻔뻔한 짓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대귀족이 그렇게 후안무치하다니 기가 막혔다.
“에스쿠도 백작은 아나이스 영애에게 ‘락토를 찾아가 사과하면 모든 걸 용서해 주겠다’고 했어요. 아에토스 백작님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죠. 아에토스 백작가에서도 영애에게 몹쓸 짓을 한 놈이에요. 그런데 에스쿠도 백작가로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라고요?”
“큰일 날 소리죠.”
엘리오가 장단을 맞췄다.
아나이스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말만 들어도 눈에 훤했다.
조금 전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한 짓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낸시 워커 남작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나저나 에스쿠도 백작의 오른팔이 죽고, 열세 명의 기사들까지 폐인이 됐으니 고민이네요.”
“왜요?”
“지금까지 에스쿠도 백작은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 큰 피해를 입었으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네, 그렇게 되면 아에토스 백작가는 사라지고 말 거예요.”
낸시 워커 남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나이스 영애에게 들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피데스 마텔로 자작을 죽이고, 기사들의 마나를 없애 버렸다던가.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기 어려웠다.
아나이스 영애가 검술을 수련했지만 입문자 수준이라 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백작과 자작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나 상급이겠지?’
상급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북부의 기사들이 생판 모르는 제국의 귀족 가문을, 심지어 영지전에서 패할 게 분명한 백작가를 도우려 할까?
하지만 자신은 아에토스 백작가의 기사.
백작가를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북부의 귀족들에게 매달려야 한다.
그녀가 막 도움을 요청하려 할 때다.
그사이 감정을 수습한 아나이스 아에토스가 한발 먼저 나섰다.
“자작님, 도와주세요! 아에토스 백작가를 구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무엇이든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드릴게요.”
엘리오는 대답에 앞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돌아보았다. 왕국의 귀족이 제국 귀족들의 싸움에 끼어도 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백작님, 북부의 귀족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요?”
“대부분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라고아 경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도 되지 않습니까?”
사실 제국 귀족과 비교하면 왕국 귀족은 시골 귀족에 불과하다.
사회적인 지위나 가진 힘이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왕국 귀족은 제국 귀족의 일에 얽히려 하지 않았다.
자칫 영지와 가문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서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일 게 분명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경우라면 반대다.
오히려 제국 귀족이 그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엘리오가 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귀족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정치적인 안목을 믿었다.
아나이스 아에토스와 낸시 워커 남작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긴장된 순간 파비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자작님, 들렀다가 가시죠? 누가 압니까? 좋은 일 하고 가면 행운이 따라 줄지?”
아나이스 아에토스와 낸시 워커 남작이 격하게 공감을 표시했다.
엘리오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팔 거들도록 하지요. 두 분은 가던 길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에토스 백작가로 우리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아나이스 아에토스와 낸시 워커 남작이 멈칫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만 달랑 보내자니 그것도 못할 짓 같아서다.
이윽고 결정권자인 아나이스 아에토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안내해 드릴게요.”
***
포메른부르크 공국.
에스쿠도 백작령 플로랜스.
에스쿠도 백작가.
“……그러자 피데스 마텔로 경의 머리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는 피데스 마텔로 경을 죽인 뒤 기사들의 마나홀까지 모두 파괴했습니다.”
보고를 마친 폴 메스 남작은 처연한 얼굴로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엘리오 라고아라는 놈은 어디에 있느냐?”
“북부 귀족들의 마차가 아에토스 백작가 쪽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에토스 백작가로 갔다는 건가. 기사단장, 놈들이 그 북부의 귀족들인가?”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엘리오 라고아는 최소한 4서클 메이지, 백작은 소드마스터입니다.”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소드마스터를 믿고 제국의 귀족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게로군.”
“면목 없게 됐습니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황금 방패 기사단까지 동원했음에도 결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물론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기사단장을 탓하지 않았다.
“경의 잘못은 없다. 소드마스터의 상대는 소드마스터뿐이니까. 포메른부르크의 소드마스터 중에 가까운 사람이 누구지?”
“헤드나르 후작입니다.”
“잘됐군.”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반색을 했다.
포메른부르크 공국에서 헤드나르 공국까지는 고작 사흘 거리.
헤드나르 후작은 평소 북부 귀족들을 싫어했으니, 북부 귀족이 포메른부르크에서 한 짓을 알게 되면 펄펄 뛸 것이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문득 폴 메스 남작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나이스는 어디로 갔나?”
“북부 귀족들의 마차에 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영지전에 끌어들이시겠다? 제국의 귀족이 북부 귀족과 손잡고 영지전을 하겠다니……. 푸하핫! 아나이스가 많이 놀랐나 보군.”
이렇게 되면 헤드나르 후작은 무조건 달려온다고 보면 된다.
잠시 후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의 특명을 받은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헤드나르 공국으로 떠났다.
***
포메른부르크 공국.
아에토스 백작령 에드문트.
정오 무렵.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사두마차 한 대가 아에토스 백작가 앞에 멈춰 섰다.
마부석 옆자리에 앉아 길 안내를 하던 낸시 워커 남작이 훌쩍 뛰어내려 마차 문을 열었다.
이윽고 아나이스 아에토스와 엘리오 일행이 차례로 마차에서 내렸다.
은밀하게 아나이스 아에토스를 빼돌리려던 아에토스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영주성 중앙 홀.
낸시 워커 남작은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 앞에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일 이후 아나이스 영애께서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께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그 요청을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이 받아들이셔서 모시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중앙 홀 곳곳에서 아에토스 백작가 귀족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복잡한 눈으로 북부의 귀족들을 보았다.
딸을 구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북부 귀족이 제국 귀족을 죽이고, 영지전까지 참가하겠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제국과 왕국의 관계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다.
북부 귀족이 제국 귀족을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큰 문제인데, 영지전까지 끼어든다?
자칫 제국 귀족들이 에스쿠도 백작을 돕겠다고 나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에토스 백작가는 끝이다.
물론 북부 귀족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끝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 엘리오 라고아 자작, 그리고…….”
그는 마지막의 젊은 기사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말끝을 흐렸다.
파비안이 재빨리 자신을 밝혔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아,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 세 분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러나 영지전을 돕겠다는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은 어차피 패할 영지전이라면 명예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러자 백작의 장남인 빈센트 아에토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영주님,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도 승리하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주변 영주들 모두가 에스쿠도 백작의 편에 섰습니다. 누구라도 도움을 주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차남인 테리 아에토스도 거들었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차피 포메른부르크에서 우리를 도와줄 귀족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애잔한 눈으로 아들들을 보았다.
아에토스 백작가의 힘만으로 싸우면, 최악의 경우 영지를 빼앗길 뿐이다.
하지만 북부 귀족과 손잡았다가는 자칫 명예 살인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검은 독수리 기사단장인 젝 퍼셀 자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보수적인 그라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리라.
그러나 이게 웬걸?
믿었던 젝 퍼셀 자작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영주님, 에스쿠도 백작가가 원하는 것은 영지만이 아닙니다. 이기지 못하면 죽음만도 못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북부 귀족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
“소드 익스퍼트 둘이면 큰 전력이 됩니다.”
젝 퍼셀 기사단장은 북부의 백작과 자작을 소드 익스퍼트로 생각했다.
소드 익스퍼트 두 사람은 한 개 중대와 맞먹는다.
아에토스 백작군의 처지에서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북부 귀족들을 보았다.
‘독배(毒杯)라는 걸 알지만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라 이건가.’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묵직한 음성이 중앙 홀에 울려 퍼졌다.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드 익스퍼트가 아니라 소드마스터요.”
“…….”
한순간 중앙 홀에 침묵이 감돌았다.
북부의 백작이 소드 익스퍼트가 아니라 소드마스터란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벌떡 일어나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다가갔다.
“각하께서는 정말 소드마스터십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대답 대신 칼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롱소드 끝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광망이 일 미터나 뻗어 나갔다.
소드마스터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마나 블레이드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드마스터의 개입은 일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일럼 왕국과 제국의 문제로 비화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피식 웃었다.
“라고아 경이 이곳에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