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59
1159회. 쉬운 길과 더 쉬운 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근엄한 얼굴로 파비안 남작을 직시했다.
그건 백작의 앞에서 남작이 할 소리가 아니었다.
당돌함을 넘어서 무례한 행동이지만 묘하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라고아 경과 파비안 남작은 실로 파격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라고아 경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듣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나에게 라고아 경은 생명의 은인이자, 생사를 함께하는 동료라네.”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태도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수 있었다.
“자작님이 모쿠바스의 군주인 몰록을 죽인 것은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세 명의 군주를 더 죽였지.”
“그렇습니다. 히르헤라를 침공한 마족 군주들 중에 살아서 돌아간 군주는 헤일록의 군주인 샤모스뿐입니다. 자작님은 샤모스를 이용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셨습니다.”
“헉! 라고아 경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됐다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인간이 마족 군주가 되다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강함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예.”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가?”
“그건 히르헤라로 통하는 균열이 모쿠바스 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쿠바스의 새로운 군주가 히르헤라에 눈독을 들일 수 있으니……. 자작님이 군주가 되어 마족들이 히르헤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으신 겁니다.”
이어서 파비안은 군주가 되기 위해 몰록의 성으로 가는 길에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마물의 심장을 먹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리고 바로 어둠의 에테르에 중독되셨습니다. 해독하기 전까지 자작님의 얼굴과 눈은 마족처럼 무시무시했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대륙에 마수와 마물이 활개치던 시절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마수와 마물의 고기와 심장 따위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걸 먹은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어둠의 에테르에 중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뒤 왕국과 제국은 마수와 마물의 식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조디악에 도착해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공포스럽게 행동하셨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건 알지만, 그 모습은 제가 알던 자작님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작님이 어둠의 에테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고아 경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게로군?”
“예, 주제넘다는 걸 알지만……. 저로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비안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직 하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았지만 그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몫이었다.
“그런데 백작님.”
“왜 그러나?”
“백작님은 대수림까지 동행하실 겁니까?”
파비안이 애매한 눈으로 백작을 보았다.
자신이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가신이니 따라가는 게 당연하지만, 백작은 달랐다.
그에게는 베일럼 왕국에 영지가 있고,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니 과거의 문제로 싸움을 걸어올 대귀족들도 없었다.
“역사의 증인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자네라면 놓치겠나?”
동행하겠다는 소리다.
파비안은 그 소리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착잡했다.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따라다니며 급성장한 반면, 자신은 히르헤라를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백작이 쑥쑥 자라는 포플러 나무라면, 자신은 바위 아래 낀 이끼 같았다.
“나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아, 아닙니다. 그동안 백작님은 소드마스터가 되셨는데 저는 진전이 없어서……. 뭐가 문제인지를 고민했을 뿐입니다.”
“그런 거라면 깊이 생각하지 말게.”
“예?”
“나의 잔은 거의 다 채워져 있었기에 흘러넘칠 수 있었던 거라네. 자네의 잔은 이제 뭔가를 담아 나가는 단계가 아닌가? 잔이 채워지기 전까지 변화가 없는 게 당연하지.”
“그런 겁니까?”
“자네의 잔은 다른 소드 비기너에 비해 빨리 차게 될 걸세. 나를 보면 조바심이 나겠지만, 자네의 나이를 생각해 보게. 나만 해도 자네 나이 때에는 자네의 반반도 못 했다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위로에 파비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 제가 어릴 때부터 천재 기사 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
파비안 남작의 너스레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피식 웃었다.
뻔뻔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라고아 경이 그를 가까이하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
포메른부르크 공국.
에스쿠도 백작령 플로랜스.
에스쿠도 백작가.
늦은 밤.
막 잠자리에 들었던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눈을 번쩍 떴다.
영지전의 패배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고함에 경비병들이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에스쿠도 백작이 손끝으로 테라스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라.”
경비병들이 막 테라스 쪽으로 가려 할 때다.
테라스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두 남자가 침실로 들어왔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알아보지 못한 경비병들이 칼을 뽑아 들자,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다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멈추고 뒤로 물러나라!”
경비병들이 의아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동안 침대에서 내려간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고아 자작, 이 늦은 밤에 테라스로 침입하다니……. 설마 공국의 백작인 나를 죽일 생각이오?”
그는 동행한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은 운종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엘리오는 대답 대신 태연히 창가에 놓인 탁자로 다가갔다.
이윽고 의자를 끄집어낸 그는 마치 제집처럼 편안하게 앉았다.
그런 그를 향해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제국에는 소드마스터가 열다섯 분이나 계시오. 자작이 나를 죽이면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닥치고. 가까이 와 봐요. 죽일 거면 눈 마주치자마자 죽였지.”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주춤주춤 탁자로 다가갔다.
엘리오가 에스쿠도 백작을 찬찬히 살폈다.
살집 두둑한 얼굴과 욕망 가득한 눈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매를 부르는 얼굴이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상대는 소드마스터를 이긴 검사.
한순간 ‘울컥!’ 했지만 에스쿠도 백작은 내색하지 않았다.
“쉬운 길과, 더 쉬운 길이 있어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백작의 자유야. 들어 볼래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반말과 존대말을 섞어 쓰자 에스쿠도 백작은 속으로 외쳤다.
‘하나만 해라! 이 개 같은 놈아.’
분노에 찬 마음과 달리 그의 대답은 공손했다.
“들어 보리다.”
“제국과 남부 왕국들 간에 전쟁이 났다는 건 아나?”
“오늘 들었소.”
“알고 있겠지만 나는 로렌 공국으로 가던 중이야. 그래서 알고 지내던 코르보 마법 병단의 킬리언 헤일 공작님에게 당신이 헛소리 하면 막아 달라고 편지를 보냈거든? 그런데 전쟁이 터져 버린 거야. 킬리언 헤일 공작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지.”
“…….”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뜨끔했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직접 해결할 생각으로 달려온 거야. 말했다시피 쉬운 길과 더 쉬운 길이 있어. 선택은 당신 마음이야.”
“쉬운 길은 뭐요?”
그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영지전에 대해 침묵할 것을 요구할 줄 알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의 기대와 크게 달랐다.
“당신이 내 손에 죽는 거야. 그럼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내가 죽으면 에스쿠도 백작가의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에스쿠도 백작가도 죽이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순간 긴장한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왠지 그러고도 남을 놈 같았다.
“그보다 더 쉬운 길은 뭐요?”
“마나의 맹세를 해. 북부 귀족들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막겠다고.”
마나의 맹세를 어기면 마나의 축복이 사라진다.
엘리오는 그것으로 에스쿠도 백작의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다.
‘요즘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파비안의 이야기를 들은 뒤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법을 찾다가 떠올린 것이 마나의 맹세였다.
“내가 맹세한다고 그 일이 묻힐 것 같소?”
“당신이 플로랜스의 영주잖아. 아랫사람은 알아서 단속해.”
“…….”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영지전에서 입은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하기 때문이다.
‘이 개자식아! 그게 어째서 더 쉬운 길이냐!’
100만 골드의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최소 30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 매고 살아야 한다.
그건 30년 동안 숨만 쉬고 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쉬운 길로 가시든가.”
말과 함께 엘리오가 천둔검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의 협박이다.
생전 처음 맛보는 치욕에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보다 못한 경비조장이 버럭 소리쳤다.
“무엄하다! 에스쿠도 백작가에서 그따위 망발이라니! 죽고 싶으냐! 영주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눈치 없는 놈. 정신 사나우니 닥치고 있거라. 네 앞에 있는 사람이 아에토스 백작가가 끌어들인 북부의 귀족이다.”
“…….”
그 말에 놀란 경비조장은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결국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마나의 맹세를 했다.
이 자리에서 북부 귀족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그렇게 한 것이다.
마나의 맹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엘리오가 말했다.
“백작, 자식 교육 잘 시켜. 다시 한번 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 그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쉬운 길로 보내 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소.”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엘리오는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과 함께 발코니로 나갔다.
‘예의도 모르는 놈들. 도둑처럼 왔다가 도둑처럼 가겠다는 건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불청객들의 뒤를 따라가던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사람이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저건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구름이 사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던 백작은 경비병들의 입단속부터 시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나의 맹세를 했다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다.
마나의 맹세와 복수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밤늦도록 북부 귀족들과 아에토스 백작에 대한 복수를 생각했다.
***
말라시아 공국 변방 마을.
새벽 동이 터 오르기 전에 엘리오는 마을 회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엘리오는 빈 간이침대에 길게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서늘한 새벽 공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히르헤라에서 지낼 때는 너무 추워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중부로 나와 계절의 변화를 느끼니 기분이 묘하다.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두고 온 가족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 뭐라고 이 고생인지 한편으로 회의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