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19
1219회. 키우긴 누굴 키워?
싱크레어 지터는 머릿속을 비워 나갔다.
‘세상도 잊고, 나도 잊고, 너도 잊어라’는 마스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무심코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지워 내자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졌다.
목검을 전심전력으로 휘두를 때처럼 근심 걱정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칼 휘두르는 것만 검술인 줄 아느냐?’던 마스터의 말이 맞았다.
이에 그녀는 마스터를 믿고 잊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멍청함, 부모님에 대한 원망, 무서운 어른들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덜어 낼 때 마스터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한 말들이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마스터의 말은 마치 ‘눈이 내리는 소리’ 같았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갔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싱크레어 지터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심장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엘리오는 급히 영기를 방사해 싱크레어 지터의 몸을 조사했다.
‘어라?’
파비안처럼 그녀의 심장에 씨앗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파비안이 알면 꽤나 배 아파하겠군.’
사실 엘리오는 마나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에게 마나의 축복은 이제 막 내단을 형성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바위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엘리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순간 낡은 창고 옆에서 청년 하나가 쭈욱 끌려왔다.
모험가와 어린 여자아이의 뒤를 미행하던 가드 카마인이다.
무형의 힘에 속박된 카마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뭐냐?”
카마인은 모험가의 눈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 그게……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 두라고 해서…….”
“누가?”
“토로스, 아니, 뒤발리에 씨가…….”
당황한 카마인은 무심코 운송 책임자를 거론했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토로스 씨야? 뒤발리에 씨야?”
“뒤발리에 씨입니다.”
“왜?”
카마인은 대귀족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납치 사건도 있었고 하니 승객들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정도는 파악해 두라고…….”
“검술 가르친다고 말했는데?”
“아, 예, 물론 알지요. 단순히 확인 차원에서 따라와 본 것입니다.”
“너, 이름이?”
“카마인입니다.”
“확인했으면 가야지. 왜 계속 숨어서 봐?”
“눈이 두 분을 피해 가는 게 너무 신기해서 그만…… 계속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사실이다.
카마인은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 봐. 내가 너 지켜본다.”
엘리오는 돌연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자신의 눈앞에 댄 후에, 카마인을 향해 뻗어 보였다.
그 기괴한 동작에 카마인은 ―모험가가 자신에게 마법을 건 것으로 오해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예, 예, 감사합니다.”
굽실거리던 카마인은 달아나듯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다시 바위로 올라간 엘리오는 곤하게 잠든 싱크레어 지터를 안아 들고 태번(tavern)으로 향했다.
카마인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태번으로 들어갔다.
그를 발견한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봤나?”
“뭘 하고 있던가?”
“정말 검술을 가르치던가?”
카마인은 묵묵히 창가 쪽 빈자리로 가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가드들이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카마인을 따라갔다.
“봤냐니까!”
답답한 마음에 카마인보다 연장자인 울라프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봤습니다.”
“검술을 가르치던가?”
“반반입니다.”
“반반은 또 뭔가?”
“검술을 가르치다 말고……. 앉아서 잠을 재우더라고요.”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앉아서 잠을 재워? 여관에 갔다는 말인가?”
“아니요. 마을 외곽의 공터에서 그냥 재웠습니다.”
“눈이 내리는데 밖에서 잠을 자게 했다고? 아니,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그런데 눈이 두 사람을 피해 갔습니다. 무슨 실드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요.”
“미치겠네. 실드 마법으로 눈을 막고, 밖에서 잠을 재웠다는 건가?”
“예. 그것도 앉은 자세로요.”
“흐음, 벌을 내렸나? 어린애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은데. 아이는 괴로워하지 않던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잠이 든 것까지만 봐서.”
가드들이 애매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진짜 검술 지도인지, 변태 짓인지 말만 들어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태번 문이 열렸다.
가드들의 고개가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모험가가 싱크레어 지터를 두 팔에 안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가드들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오는 유유히 일 층 식당을 가로질러 이 층 숙소로 올라갔다.
혹시나 싶어 조용히 뒤따라가던 올라프는 모험가가 안드리아 지터 부부의 방문을 두드리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딸이 모험가의 품에 안겨 돌아오자 샤인 코울스로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싱크레어가 다친 건가요?”
“아니요. 잠깐 잠이 든 것뿐입니다.”
“잠이…… 들었다고요?”
“예, 어디에 눕히면 됩니까?”
공황 상태에 빠진 샤인 코울스로를 대신해 안드리아 지터가 나섰다.
“이쪽으로 오십쇼.”
엘리오는 안드리아 지터가 가리킨 침상에 싱크레어 지터를 내려놓았다.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그에게 안드리아 지터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검술 수련을 마치고, 명상 중에 아이가 마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피로가 쌓였던지 마나의 축복을 받고는 바로 잠이 들더군요.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순간 안드리아 지터 부부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예에?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요?”
엘리오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실감이 나지 않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던 안드리아 지터가 말했다.
“마나의 축복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샤인 코울스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뭔가 잘못 안 게 아닐까요? 우리 애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거든요.”
“열두 살에 마나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그래요? 누가 열두 살에 받았죠?”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이 열두 살에 받았다고 하더군요.”
“군신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크나우프 대공가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한미한 귀족이라 뭘 가르친 적도 없어요.”
“그건 제 처의 말이 맞습니다. 싱크레어를 그렇게 높이 봐 줘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마법사나 신관을 불러 확인해 봐도 됩니다. 그럼 이만.”
엘리오는 부부에게 묵례를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멍하니 잠든 딸을 내려다보던 샤인 코울스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마나의 축복을 받은 거면 좋겠네요.”
“그럴 리가 없잖소. 우리가 크나우프 대공가도 아니고, 싱크레어가 검술을 수련한 지 이제 고작 나흘인데. 다른 사람이 알면 별소리를 다 할 테니 그냥 덮어 둡시다.”
샤인 코울스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승객들의 시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나의 축복 얘기까지 더해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지기만 할 터였다.
한편,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간 엘리오는 침상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가 평소보다 일찍 돌아오자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오늘은 일찍 끝내셨나 봅니다? 이제 슬슬 애가 지칠 때도 됐죠?”
“너는 마나의 축복 받을 때 어땠냐?”
“어땠냐고요?”
“어, 느낌이 어땠냐고.”
“몰랐습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심장에 마나의 씨앗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자다가 받아?”
“네, 대부분 자다가 받습니다. 뭐, 수련 중에 받은 사람들도 있다지만 저는 안 믿습니다. 마나의 축복은 인간의 의지로 받는 게 아니니까요.”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이라 이거지?”
“예,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마나의 축복에 관심 있으십니까?”
“내가? 나는 영기 수련자야. 마나와 영기는 물과 기름이라고.”
“저는 라고아 경이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안 놀랄 것 같습니다. 오마르 경도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아 경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할 걸세.”
라르바 오마르 백작까지 가세하자 엘리오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그리고 파비안, 너는 편견을 깨야겠다.”
“무슨 편견요?”
“오늘 싱크레어가 수련 중에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
침상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던 파비안이 튕겨 나듯 벌떡 일어났다.
“예에? 그 꼬마가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요?”
“어.”
“이제 열두 살 아닙니까?”
“왜? 배 아파?”
“배가 아픈 게 아니라, 이건 정말, 제국이 발칵 뒤집힐 이야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데려가려고 눈에 불을 켤 겁니다.”
“내 제자를 누구 마음대로 데리고 가?”
“제자요? 그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까?”
파비안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랜드 마스터보다 강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제자라니!
무엇보다 자신도 아직 제자가 되지 못했는데 열두 살짜리 제자라니!
“뭘 그렇게 놀라?”
“라고아 경은 자신이 제국과 왕국에서 어떤 위치인지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안드리아 지터 부부는 내가 누군지 몰라. 우리만 입 다물면 돼.”
“비밀리에 키우시게요?”
“키우긴 누굴 키워? 잠깐 가르치고 말 건데.”
“그 뒤에는요?”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내가 그 애 부모도 아니고, 평생 데리고 다닐 수는 없잖아.”
“마나의 축복을 받은 열두 살짜리 애를…… 그냥 놓아준다고요?”
“그 애가 내 노예냐? 뭘 놓아줘? 저거 생각하는 게 아주 썩었어.”
“안 됩니다. 그러시려면 차라리 오마르 경이나 크나우프 대공에게 맡기십쇼. 장차 그랜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 방치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줄 알아?”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재능이면 누구보다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마르 경, 제 이야기가 틀렸습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의 말이 맞습니다. 상인 집안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운 재능입니다.”
“오마르 경도 그 애에게 관심 있어요?”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라고아 경과 함께 남부로 가야 하니 맡을 수가 없습니다. 싱크레어의 부모가 제국 귀족이니 크나우프 대공가로 보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말에 엘리오도 생각을 바꿨다.
아카데미보다는 크나우프 대공가가 더 좋을 것 같아서다.
“알겠습니다. 그건 오마르 경이 추진해 보세요. 단, 지터 씨 부부가 내 말을 믿지 않으니 그쪽이 와서 설득해야 한다고 하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크나우프 대공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라 생각했다.
싱크레어 지터의 재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그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터였다.
정오가 지나자 엘리오 일행은 느긋하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하던 승객들이 엘리오 일행을 힐끔거렸다.
최근 들어 시선이 노골적으로 변했지만 엘리오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오 일행이 막 점심을 먹기 시작할 때다.
식당 한쪽에서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보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의 일에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정체불명의 스튜를 떠먹던 엘리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샤인 코울스로가 부들부들 떨며 옆자리의 중년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