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18
1218회. 칼 휘두르는 것만 검술인 줄 알아?
네 번째 하늘.
아발란트 공국.
시릴 후작령.
피에스트라를 출발한 마차들은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눈에 사흘이나 발이 묶였다.
다행히 나흘째 접어들자 눈발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아침 식사를 마친 운송 책임자 레온 토로스는 가드 중에 자신을 잘 따르는 올라프를 불렀다.
“승객들은 별일 없나?”
“예, 잠잠합니다. 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꼴통은 어디에나 있으니 주의해서 살피게. 승객들 간에 문제가 일어나도 사람들은 역마차 협회를 탓하니까.”
“그래서 말씀인데 그 모험가 말입니다.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겠습니까?”
“누구를 말하는 건가?”
“매일 아침 점심 때마다 여자애를 데리고 나가는 청년 있잖습니까. 승객들 사이에 말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여자애를 그에게 팔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내버려 두지 않으면? 알고리움의 치안대 대장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나? 그는 황족이 아니면 대귀족이야.”
“그렇지만 제가 봐도 어린애한테 너무한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데 밖에서 무슨 검술을 가르친다는 건지. 보나 마나 근처의 다른 여관으로…….”
“신경 쓰지 말게. 어린애 밝히는 귀족을 한두 번 보나? 부모가 허락했으면 그만이야.”
“애가 불쌍해서 그럽니다. 모험가에게 얼마나 당하는지 초주검이 돼서 돌아오더라고요.”
“귀족들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애가 그 애 하나뿐인지 아나? 나는 그 모험가가 다른 여성들에게 찝쩍거리지 않는 게 감사하네.”
“…….”
올라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운송 책임자의 말처럼 모험가가 다른 여자들을 건드리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레온 토로스는 올라프를 내보내고 창가로 걸어갔다.
맥없이 흩날리는 눈발을 보니 오후가 되면 그칠 것도 같았다.
눈이 그치고 사나흘 후면 마차가 다니는 길 정도는 열릴 터였다.
마차 이동 중 한곳에 발이 묶이면 온갖 사건 사고가 벌어진다.
다행히 이번에는 납치 사건의 여파로 다른 승객들이 잠잠했다.
‘그런데 진짜 다른 여관에 가서 그 짓을 하는 건가?’
그는 청년 모험가의 뒤를 따라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올라프의 추측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제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쯧! 부모가 문제라니까.’
결국 아이에게 생기는 일은 부모의 책임이다.
부부가 딸을 아끼는 것 같던데 왜 모험가에게 내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똑.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파비안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엘리오를 돌아보았다.
“또 왔네요. 어려서 그런지 체력 회복이 빠른가 봅니다?”
엘리오가 지긋지긋한 얼굴로 침상을 내려갔다.
“이제는 내가 지친다. 슬슬 나가떨어질 법도 한데 열심이네.”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한마디 보탰다.
“성실한 아이네요. 이러다 파비안을 뛰어넘는 여검사가 나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자극받은 파비안이 버럭했다.
“저를 뛰어넘는다니요? 제가 이래 봬도 ‘클루톤의 천재 기사’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열심히 한다고 아무나 저를 따라올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라고아 경이 보기에 저 꼬마의 재능은 어떻습니까?”
옷을 갖춰 입던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몇 살 때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지?”
“열여섯요. 그때 클루톤이 뒤집어졌습니다.”
“혹시 열두 살에 마나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냐?”
“군신(軍神)으로 불리던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이 열두 살에 마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요? 설마…… 그런 건 아니죠?”
“아직은 아닌데 뭔가 조짐이 보이기는 해. 그래서 애가 저렇게 열심인 거고.”
“이제 겨우 열두 살이 무슨 마나의 축복을! 절대 안 됩니다.”
“안 될 건 또 뭐야?”
“교,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르침을 중단하십쇼.”
“나도 좀 쉬고 싶은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잖아.”
“그런데 뭘 가르치시기에 그런 조짐이 보인다는 겁니까? 설마 어린애에게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라도 가르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지금 그걸 배우면 영기를 수련하게 된다고. 어린애 앞길을 막으면 안 되지. 너도 명심해. 괜히 욕심내서 자식에게 그걸 먼저 가르치면 영기 수련자가 되어 버리니까.”
“헉! 그렇습니까? 와아! 큰일 날 뻔했네요?”
파비안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결혼도 안 한 놈이 큰일은 무슨. 어디 숨겨 놓은 자식이라도 있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중대한 문제는 가르칠 때 말씀해 주셨어야죠.”
“듣고 보니 기분 나쁘네? 그게 왜 문제야? 인마. 나도 영기수련자인데.”
“그건 라고아 경이 특별한 분이라서 그런 거고요. 영기보다 마나가 뛰어나다는 건 라고아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휴! 말을 말자.”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던 엘리오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목검을 들고 기다리던 싱크레어 지터가 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지난 사흘간의 고련으로 얼굴은 초췌했지만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쯧!’
엘리오는 귀찮다고 생각하다가도 고향에 두고 온 딸을 생각해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싱크레어 지터가 그런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모험가에게 검술을 지도받으면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가벼워졌다.
납치의 공포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행복한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밀어내는― 마법이 신기해서 매일 찾아갔지만 이젠 아니다.
엘리오와 싱크레어 지터가 일 층에 나타나자 가드들이 힐끔거렸다.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뭐든 익숙해지면 두려움이 덜해진다.
모험가가 매일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역마차 운송 협회에서 일하는 가드들은 모두 용병.
용병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대귀족의 변태적인 욕망 앞에서 고개를 쳐든 것이다.
가드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는 느긋하게 일 층 식당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올라프가 중얼거렸다.
“씨발.”
용병이라고 죄다 인성이 파탄 난 것은 아니다.
“얼어 죽을 새끼.”
“아휴! 귀족만 아니면 대가리를 그냥…….”
부글부글 속을 끓이던 가드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가드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뒤발리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모험가를 욕하기 전에 그가 정말 뭘 하는지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러자 카마인이 툴툴거렸다.
“운송 책임자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일 겁니다.”
“아니면? 괜히 멀쩡한 사람 욕하는 것밖에 더 되나?”
“멀쩡하긴요? 시골 마을에서 바로 여자 후리는 걸 보셨잖습니까?”
“야수에게 끌려가는 걸 구해 줬다는 말도 있잖나.”
“그걸 믿으십니까? 대귀족이 시골 마을의 여자를 구해 줘요? 그런 얘기는 어린애들 동화 속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소문이 날 게 뻔하니 돈 주고 시켰겠죠.”
“의심이 많은 사람이군.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가 뒤를 밟아 보게. 모험가가 여자애와 여관으로 가는지, 아닌지 확인하라는 말일세.”
“지금 저에게 운송 책임자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하라는 겁니까?”
“언제부터 용병이 운송 책임자를 무서워했다고? 모르고 욕하는 것보다 사실 확인이 먼저일 것 같은데. 아닌가?”
“뒤발리에 씨는 모험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네. 그저 무고한 사람을 욕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또 둘이 이 눈밭에서 뭘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가?”
머뭇거리던 카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알아보겠습니다.”
운송 책임자를 핑계로 물러나면 용병들 사이에서 분명 뒷말이 나올 터였다.
카마인은 기세 좋게 태번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마을 외곽 공터.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싱크레어 지터를 보았다.
그동안 ‘세 가지 재능의 검(Three Talented Swords)’을 하루에 하나씩 가르쳤다.
간단한 자세라 그런지, 혹은 싱크레어 지터의 재능이 뛰어난지, 그녀는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를 냈다.
마음을 담기에는 멀었지만 적어도 자세만큼은 고쳐 줄 필요가 없었다.
싱크레어 지터는 세 가지 재능의 검을 쉬지 않고 순서대로 펼쳤다.
그렇게 백 번쯤 목검을 휘둘렀을까?
묵묵히 지켜보던 엘리오가 돌연 소리쳤다.
“천천히!”
그러자 검에 마음을 담기 위해 집중하던 싱크레어 지터가 움찔했다.
그녀는 왜 천천히 하라는지 몰랐지만 속도를 줄였다.
“마음을 담고!”
순간 싱크레어 지터가 귀여운 얼굴을 찡그렸다.
빠르게 휘두를 때는 집중이 잘됐는데 느린 동작은 장난 같아서 어려웠다.
이를 악물고 집중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자꾸 웃음이 났다.
“그만.”
보다 못한 엘리오는 싱크레어 지터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힘의 집중이나, 내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아이에게 둔검(鈍劍)의 묘리는 무리였다. 아니 애초에 나흘 만에 둔검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뒤늦게 그걸 깨달은 엘리오는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그는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에 놓인 바위를 가리켰다.
“저 바위에 가서 앉아.”
“검술은요?”
“칼 휘두르는 것만 검술인 줄 알아?”
말과 함께 엘리오가 손을 흔들었다.
상수리 나무 옆에 있던 잡목의 허리가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콰드드득―!
입을 쩍 벌리고 보던 싱크레어 지터가 상수리나무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바위로 기어 올라간 그녀는 대충 눈을 털어 내고 철퍼덕 앉았다.
바위로 다가간 엘리오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순간 광풍이 일어나 바위에 쌓여 있던 눈을 모두 쓸어 냈다.
“앗! 차가워!”
싱크레어 지터는 눈이 얼굴에 튀자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가볍게 바위로 뛰어오른 엘리오는 보란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발을 이렇게 하고 앉아.”
싱크레어 지터가 낑낑거리며 모험가의 앉은 자세를 흉내 냈다.
“모험가님, 이렇게요?”
“그래, 앞으로는 나를 ‘마스터’라고 불러라.”
“네, 마스터님.”
“그냥 마스터.”
“네, 마스터.”
“눈을 감고, 머릿속에 있는 잡념을 모두 비워 내라.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하지 마라. 세상도 잊고, 나도 잊고, 너도 잊어라.”
“…….”
싱크레어 지터는 왜 그래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마스터가 시키는 대로 하자 놀랍게도 목검을 휘두를 때와 같은 편안함이 찾아왔다.
싱크레어 지터의 얼굴이 안정되자 엘리오는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을 읊조렸다.
“마음을 비움 하나에 두고,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곧 함이니…….”
내공, 즉 영기의 수련은 의식적으로 진기를 인도해야 한다.
엘리오는 싱크레어 지터가 영기를 수련하지 못하게 구천여일진경의 의미만 살짝 던져 볼 생각이었다.
마음의 수련은 영기 수련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예상대로다.
사흘간 쉬지 않고 마음에 집중하게 훈련시킨 탓일까?
싱크레어 지터는 어렵지 않게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엘리오가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돌연 싱크레어 지터의 심장 어림에서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이 떨어진 것처럼― 강력한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