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33
1233회. 이라이자 크로우를 기억하십니까?
도우널 비건 백작의 재판 결과는 금방 이그나스 전역에 퍼졌다.
대귀족들이 혼인으로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은 상식이다.
도우널 비건 백작도 파티마 공국 왕가와 대법관 가문과 사돈을 맺은, 누구보다 기반이 탄탄한 대귀족이었다.
그야말로 이그나스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귀족 가운데 한 사람인 그가, 무슨 반역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자고 일어나니 몰락한 것이다.
공국에서 이십 년 추방은 그냥 다른 나라로 가서 새로 시작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더해 마나석 광산의 압수와 배상금까지!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그를 그렇게 만든 피해자에게로 향했다.
그때쯤 귀족 사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흘러나왔다.
―코랄 상회 마나석 감정사의 딸이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의 공동 제자다.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크나우프 대공가의 기사단이 비공정을 타고 왔는데, 하필 그때 블랙잭 길드가 납치를 한 것이었다.
제국에 또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있었다는 것과 마나석 감정사의 딸이 그랜드 마스터들의 제자가 됐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동부 주거 지구 치안대를 통해 피해자의 신상이 알음알음 퍼져 나갔지만 진위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크나우프 대공가 기사단과 피해자 소녀가 이그나스를 떠났기 때문이다.
호드 캄프스 백작가.
별궁 아포리스.
정오 무렵.
호드 캄프스 백작은 선대가 가장 공들여 지은 별궁을 방문했다.
자신의 궁전임에도 조심스러운 것은 그곳에 귀빈을 모셨기 때문이다.
궁전 안으로 들어간 그는 때마침 거실에 나와 있던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라고아 백작 각하.”
“아, 행정 장관님. 왕궁에 안 나가셨어요?”
“각하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 잠시 나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이라이자 크로우를 기억하십니까?”
“크로우라면 나에게 막말한 아줌마를 말하는 것 같은데 맞죠?”
“예, 오늘 아침 자택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었다고요?”
“그렇습니다.”
“흐음…….”
엘리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자살을 했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족들 말로는 도우널 비건 백작의 재판 결과를 알고 힘들어 했다고 합니다.”
“거참.”
엘리오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잘못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살이라니.
“그 일로 크로우 자작이 각하를 뵙고 싶어 합니다.”
“나를요?”
“딸의 잘못을 사죄할 기회를 달랍니다.”
“됐어요. 점심 먹고 떠날 겁니다.”
이라이자 크로우가 죽었다면 더 이상 이그나스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아, 예. 남부로 여행 중이시라지요?”
“예.”
“그러시다면 가시기 전에 함께 식사라도…….”
“됐어요.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궁으로 돌아가세요.”
“아, 예.”
호드 캄프스 백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표정을 보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잠시 잡담을 나누던 호드 캄프스 백작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갔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엘리오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자살을 하다니?
처음으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손에 묻혔지만, 죄책감을 느낀적은 없다.
‘그게 죽을 일은 아닌데…….’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봐야 ―그녀의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노예밖에 더 되겠냐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노예가 되느니 죽음을 택했다.
자살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자신이었다.
악에 대한 응징이나 전쟁으로 인한 것과는 다른, 업(業)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때마침 거실로 나온 파비안이 지나가듯 말을 걸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이라이자 크로우가 자살을 했단다.”
“예에? 그 막말하던 여자요?”
“어.”
“왜 죽었지?”
파비안의 혼잣말에 엘리오가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게,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표정이 안 좋으셨던 겁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 나 때문에 그런 게 뻔한데.”
“그래도 죽을 짓을 하긴 했습니다. 라고아 백작님이 관대해서 그렇지 다른 대귀족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겁니다.”
그런 말을 들었지만 엘리오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세계 대귀족들과 자신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크로우 자작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해서 점심 먹으면 바로 떠나려고. 오마르 백작님 만나면 그렇게 말해 둬라.”
“크로우 자작은 또 왜요?”
“딸의 잘못을 사죄하고 싶단다.”
그러자 파비안이 눈을 찌푸렸다.
“딸이 자살을 했는데 사죄하고 싶다고요? 이라이자 크로우가 자살한 게 맞긴 맞습니까?”
“독약을 먹은 채로 자택에서 발견됐대. 자살한 게 뻔하잖아.”
“라고아 백작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제국의 귀족들 중에는 잔인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슨 소리야?”
“자기 자식을 죽이는 사람도 많다고요.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식을 전략적으로 사용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귀족보다 부모가 골라 준 사람과 결혼하는 귀족이 더 많습니다. 뭐 그러다 보니 바람을 피우는 게 예삿일이 됐지만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크로우 자작이 죽이고 자살로 꾸몄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이, 설마.”
“이라이자 크로우가 내놓은 자식일수록 그럴 확률도 높아집니다. 이라이자 크로우가 착한 여자는 아니었잖습니까? 크로우 자작가에서 내놓은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딸을 죽일까.”
“도우널 비건 백작의 재판 결과를 보고 크로우 자작이 잠이나 편히 잘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그건 아니지.”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너무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타살을 제기했다.
귀족가에서 일어나는 자살의 대부분이 타살이니 전혀 허튼소리도 아니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솔깃해하자 파비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귀족가에서 명예 살인은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묵묵히 듣던 엘리오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크로우 자작이 딸을 죽였다 해도 나 때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도 마음은 지금보다 가벼워지실 겁니다.”
“과연 그럴까?”
“크로우 자작을 만나 보십쇼. 라고아 백작님에게는 진실의 마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자살한 게 맞으면?”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자살했다는 걸 확인한다고 달라질 게 있습니까?”
“인정.”
“예?”
“네 말이 맞다고.”
“그럼, 크로우 자작을 오라고 할까요?”
“그래, 딱 그 사람까지만 만나고 가자. 여기 집사장에게 그를 만나겠다고 전해. 크로우 남작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까 바로 달려올 거야.”
“예.”
막 돌아서려는 파비안에게 엘리오가 물었다.
“너는 정말 크로우 자작이 명예 살인을 했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이 라고아 백작님 생각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게 낭만적인 거야?”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낭만적인 겁니다. 모든 사람이 백작님처럼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계산에 따라 살아가지요.”
“너도 그래?”
“심심하면 저에게 속물이라고 하시면서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아, 맞다. 너 속물이지. 가 봐.”
“예.”
파비안은 아니라 부인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 나갔다.
만나고 싶어 한다더니 정말 오후 3시쯤 노튼 크로우 자작이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아포리스 별궁 거실에서 엘리오는 노튼 크로우 자작을 맞이했다.
엘리오는 행정 장관에게 언질을 받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
노튼 크로우 자작이 탁자 위에 나무 함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며칠 전 제 딸이 찾아와 각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더군요. 그러다 지난밤 딸이 죄책감에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라도 각하에게 잘못을 빌어야겠다는 마음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건 뭔가요?”
“사죄의 뜻으로 약소하나마 돈을 마련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나, 제가 가진 전부이니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간 엘리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기 자식이 대귀족에게 잘못한 일로 자살을 했는데, 항의는 못 할망정 용서해 달라고 돈을 건네다니.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튼 크로우 자작이 말을 이어 갔다.
“제 딸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처녀 시절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다녔지요. 그래서 남작가에서 청혼이 들어왔을 때 두말 않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이런 큰 사고를 친 겁니다.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은 죄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아무쪼록 넓으신 아량으로 ‘이라이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이라이자의 죄’를 은근히 강조했다.
틀인 말은 아니지만 딸이 자살을 한 상황에서는 참으로 냉정한 소리였다.
“크로우 자작.”
“예.”
“내가 누군지 압니까?”
“예, 황제 폐하께 백작의 작위를 받으셨고, 검의 적자(嫡子)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 크나우프 대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신다고…….”
“내가 마검사고, 특히 진실의 마법을 잘 쓴다는 소문은요?”
“드, 들었습니다.”
진실의 마법이라는 말에 노튼 크로우 자작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상대를 백치로 만들 위험성이 있어서 정신 조작 마법을 잘 안 쓴답니다. 그런데 내 마법은 그런 위험성이 없어요. 그래서 평소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조금 남발하는 편입니다.”
“…….”
“그런데 자작에게는 그걸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실을 말해 봐요. 따님이 자살한 게 맞습니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눈이 마주치자 노튼 크로우 자작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손을 썼습니다. 그것이 각하의 명예와 저희 크로우 자작가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짓임을 밝혔다.
명예 살인은 가문의 일이기에 제국에서도 법적인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미 사돈댁이 작위를 박탈당한 터라 명예 살인을 두고 더 이상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물끄러미 노튼 크로우 자작을 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돈은 가지고 가요.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이 시간 이후로 내 눈에 띄면,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겁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튼 크로우 자작은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는 비록 경고를 받았지만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음에 만족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스코트 남작가(사돈)에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돈 상자를 챙긴 노튼 크로우 자작은 행여나 잡을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파비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제 말이 맞았죠? 자식이 자살했다는데 사죄하러 오겠다고 할 때 알아봤다니까요.”
“그래, 너 잘났다. 이제 그만 떠나자. 오마르 백작님은?”
“궁정백의 초대로 외출 중이십니다. 금방 돌아오신다고 했습니다.”
“궁정백이 왜?”
“왜는요, 베일럼의 영지에 소식을 전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이곳에 궁정 마법사가 있으니까 부탁을 하러 가신 겁니다.”
“아하.”
“라고아 백작님은 영지 관리 안 하십니까? 라티누스야 얻은 지 얼마 안 됐다지만, 북부의 슬래시 랜드는 꽤 되지 않았습니까?”
“그거 관리할 틈이 어디 있냐?”
“그래도 그냥 방치해 두면 세리들이 돈을 다 도둑질해 갑니다.”
“그래? 그럼 네가 해. 입으로만 내 가신이라고 떠들지 말고.”
“제가요? 알겠습니다!”
파비안이 희희낙락하자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을 떠넘겼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